“꺄아아아악!!”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세화는 무아지경이 되어 사연주의 머리를 잡아 뜯고 따귀를 올려쳤다.
“네가 감히! 네가!!”
짜악―!! 짜악―!!! 짝!!
“아아아악!!!”
“맙소사! 아가씨!”
뒤로 넘어간 사촌 동생의 배를 밟고 앉아 양 볼을 거침없이 내리쳤다.
그 사이 누군가 비명을 듣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제 이름을 소리쳐 부르며 어깨를 잡아 뒤로 떼어 내는 감촉에 그녀가 살기를 담은 눈으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상대를 보고 이성이 조금 돌아왔다.
“…….”
숨을 거칠게 몰아쉰 그녀가 제 눈앞에 있는 이를 잠시 믿어지지 않는 것을 보는 눈으로 응시했다.
이전 생, 그녀를 따라간 백가에서 갖은 모욕을 받으면서도 무사했었건만, 고향으로 돌아와 사연주와 주경현의 손에 허망하게 목숨을 잃었던 사단윤의 딸.
주세화의 측근 시녀, 세 자매 중 하나인 사영채였다.
오자마자 밀실 감옥에 갇힌 채 자매 같던 아이들의 마지막을 전해 들었었으니.
이미 주세화의 곁을 떠난 지 오 년도 넘었던 그녀.
“아가씨. 무슨 일이세요.”
영채는 흥분한 상태의 세화를 보며 심각하게 물었다.
세화는 대답하지 않은 채 문을 향해 눈짓했다.
“잠가.”
어느새 영채의 자매, 영무와 영선도 방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방 안의 풍경을 경악에 차 바라보던 그들은 세화의 한마디에 서로의 눈빛을 확인하고 재빠르게 움직였다.
영무가 먼저 누군가가 방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밖으로 나갔고, 그녀가 나가자마자 영채가 문을 닫아걸고 앞을 지켰다.
제일 체구가 큰 영선이 이 틈을 타 달아나려고 허둥지둥 몸을 빼는 사연주의 앞을 가로막았다.
격한 움직임에 세화의 팔 근육이 부들부들 경련했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가 다시금 어여쁜 외모를 가진 사촌 동생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주저앉은 채 벌겋게 부어오른 제 볼을 부여잡고 있던 사연주가 엉덩이를 밀며 뒷걸음질 쳤다.
그마저도 영선의 몸에 가로막혔지만.
“오, 오지 마. 오지 마.”
“영선아. 정신 사나우니까 그 팔 좀 흔들지 못하게 잡아 눌러봐.”
“예, 아가씨.”
“언, 세화 언니. 왜 이래, 대체. 대체 왜.”
“왜?”
그 물음이 어이가 없어서 세화가 낮게 웃었다.
이틀간의 고열로 잔뜩 쉬어 버린 웃음소리가 음산하게 흘러나왔다.
주세화가 사연주의 앞으로 다시 천천히 다가갔다.
대답해 줄 이유도 의무도 없었으나 해 주고픈 말은 있었다.
고문으로 엉망이 된 채 더러운 돌 감옥에 쓰러져 있을 때 이 사촌 동생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그만 내게 모두 주고 떠나. 좋은 곳으로 가라고.”
“너도 좋은 곳으로 가야지.”
환하게 웃은 그녀가 그 말과 함께 엉망이 된 머리채를 휘어잡고 거세게 끌어당겼다.
공포에 질린 양 볼을 다시금 내리쳤다.
퍼억―!
이틀간 앓아누웠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 * *
하아. 하아.
잔인한 타격음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것처럼 끊이지 않던 마찰음도 시간이 흐르며 점차 작아졌다.
“…으, ……흐.”
저항하고 빌고 소리치던 사촌 동생은 이제 제대로 신음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세화가 흐트러진 숨을 가다듬었다.
손가락 사이에 가득한 머리카락 역시 무표정하게 털어 냈다.
폐가 터질 것처럼 허덕이고 있었다.
온몸의 근육 또한 경련하듯 벌벌 떨렸다.
그럼에도 머리를 달구는 분노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는 듯했다.
‘그래. 그럼 이제 내가 당한 걸 갚아 줘야지. 먼저 손톱. 그다음 손가락이었나?’
그녀가 제 몸에 가해졌던 고문의 순서를 헤아리는 동안 영선과 영채는 그들의 아가씨를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긴장한 채 응시했다.
늘 의연하던 아가씨가 이렇게 감정을 격렬하게 드러내는 것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처음 본 그것이 이런 방식일 거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숨을 고르던 아가씨의 시선이 불쑥 사영선에게로 날아왔다.
“영선아, 칼 어딨어?”
영선이 저도 모르게 몸을 떨며 마른침을 삼켰다.
“……칼, 말씀입니까.”
“응. 아버지께서 내 생일에 주신 것 있잖아. 작은 홍옥이 박힌, 이만한 거.”
“……그거라면 짐을 정리하며 별채에 두셨습니다. 제가 가져올까요?”
“아냐. 너흰 그냥 여기 있어. 움직이면서 일단 마음을 좀 추스르게. 흥분하면 너무 빨리 죽이게 될 수 있으니까.”
“!!”
‘……죽, 죽인다고? 사촌 아가씨를?’
삽시간에 창백해진 영선과 영채가 반사적으로 마주 보았다.
떨리는 시선 속에서 서로의 당황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했다.
‘어떻게 하지?’
때리시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덮을 수 있지만, 죽여 없애는 건 문제가 전혀 다른데.
‘우리…… 아가씨를 말리지 않아도 되나?’
‘그러게. 이대로 아가씨께서 살인을 하시게 두고 보아도 돼?’
“…….”
하지만 그들은 이내 입술을 꾹 물고는 결연한 얼굴로 마주 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주인은 이유 없이 이럴 성격이 아니다.
저 사촌 동생이 죽어야 한다고 말했다면 죽을죄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여차하면 그들의 목숨으로 아가씨를 지키면 될 뿐.
아가씨의 행동을 막는 것은 그들의 일이 아니었다.
그 사이 세화가 영선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어깨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아, 아가씨?”
있는 힘껏 영선을 끌어안았다가 놓아준 세화가 이번엔 영채에게로 가서 똑같이 그녀를 안아 주었다.
충직하고 다정한 자매들.
위급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몸을 전혀 돌보지 않은 채 그녀를 위해 생명을 바쳤었다.
그 일을 세화는 바로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아가씨.”
지난번엔 너희가 날 구해 주었지.
이번엔 너희가 행복할 수 있도록 반드시 내가 지킬 거야.
이 사촌 동생이라면 복수의 시작으로 부족하진 않았다.
‘하지만 내가 당한 정도로만 갚아 주는 건 너무 선한 방법이지.’
“아가씨, 사촌 아가씨는 묶어 둘까요?”
“아니, 그냥 놔둬 봐. 깨어나면 뭘 하나 지켜보고.”
기절한 사연주를 세화의 냉랭한 시선이 차갑게 훑었다.
그러고는 제 아버지가 주신 여성용 단도를 가지러 방을 나섰다.
긴장된 얼굴로 방문 앞을 지키고 있던 영무 역시 꽉 힘주어 안아 줬음은 물론이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끔찍한 고통을 더욱 긴 시간 동안 느끼게 할 수 있을까.’
별채로 향하며 그것을 깊게 고민하는데, 문득 마당이 소란스러운 것을 발견했다.
‘뭐지?’
세화는 중문 옆에 붙어 가만히 밖을 내다보았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무사 하나가 긴장한 얼굴로 당도해 있었다. 얼마나 급히 왔는지 옷이 온통 땀투성이였다.
대청에 선 아버지의 표정은 잘 보이지는 않았다. 하나 오가는 목소리에서 잔뜩 긴장하셨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혹시 그 마른 고목 같은 가주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르기라도 한 걸까?’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어, 그녀는 황급히 제 아버지께 달려갔다.
“아버지!”
“맙소사. 세화야! 일어났구나.”
주명윤이 그런 세화를 보며 안심한 표정으로 서둘러 다가왔다.
“몸은 어떠하냐. 좀 괜찮으냐. 왜 여기까지 왔느냐.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가져다주었을 텐데.”
큰 손이 열을 짚어 보더니 의복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나온 것을 탓하기는커녕 재빨리 자신의 겉옷을 벗어 그녀에게 둘러 주었다. 앞섶을 여며 주는 손길이 상냥했다.
“안색이 너무 창백한데. 백가행에 대해선 걱정하지 말거라. 이 아비가 꼭 어떻게든 해 주마.”
“저는 괜찮아요, 아버지. 그런데 무슨 연락이 온 건가요? 좋지 않은 소식이에요?”
“아. 이건.”
“무슨 일이세요. 위험한 일인가요?”
주명윤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온통 찌푸렸다.
“왜요. 가주께서 뭔가 하셨어요?”
적들이 선공하지 않는 이상 교전을 금지하는 명을 내렸던 것에 대해 그녀는 가주 앞에서 자비와 관용이라고 치켜세웠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백가군과 겨뤄서 이길 자신이 없으니 내려진 명령이었다.
또다시 연이은 패전의 소식을 혈족들에게 전하게 되었다가는 신영의 위신까지 떨어뜨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비열한 그 가주라면 드러내 놓고 손을 쓰진 못해도 뭔가 다른 방편을 찾을 수도 있지.’
그렇게 생각하니 혹시 벌써 뭔가를 시작한 건 아닐까, 덜컥 염려가 들었다.
긴장한 세화의 시선이 제 아버지를 향했다.
주명윤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고 고개를 저으며 생각지도 못한 말을 조용히 꺼내 들었다.
“음, 백가에 문제가 생겼는데 말이다.”
“네? ……백가요?”
‘가주의 이야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뜬금없이 왜 백가를 말씀하시지?’
“무슨 문제인데요?”
“백기하가, 그러니까 백가 가주가 이틀 전 오전 저택을 떠났다고 첩자에게 연락을 받았는데 말이다.”
“네.”
“심어 놓은 자들 중 그를 따라갈 수 있는 이가 없어 여태껏 목적지를 몰랐단다. 한데 그가 오늘 인간계로 건너오기 위해 주가의 영지에 방문허가를 요청했다고 하는구나.”
세화가 눈만 껌뻑이다 되물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