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주가에선 죄인들을 근원을 파괴한 채 인계로 추방해 왔고, 그들의 관리를 이유로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계에 터를 잡아 놓고 있었다.
때때로 별난 혈족들이 이곳에 머무는 동안 인간 행세를 하며 높은 관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여, 인간계에서 주가 혈족들은 가상의 신분이라 하나 권세가 대단하였다.
그 권세가의 핏줄인 양 나타난 세화는 인간들이 수학하는 학당에 이름을 올렸다.
이곳이 그녀가 사는 곳과 어떻게 다른지. 인간들의 사고는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학습하려 함이었다.
인간계에서는 여성보다 남성이 훨씬 자유로웠기에, 그녀는 긴 머리를 위로 틀어 올리고 사내 행세를 하고 다녔다.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홀로 다니는 편이 좋았으나 차가운 그녀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다가오는 이들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주세화의 옆자리에서 오래도록 함께한 인간 정흥생이었다.
우연히 알게 되었지만 정흥생 역시 사내로 변복한 여인이었다.
그러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 입을 다물었을 뿐이지만, 정흥생은 제 정체를 알고도 비밀을 지켜 주는 주세화를 멋대로 친근하게 여기며 속엣말을 늘어놓곤 했다.
그러던 어느 초여름의 날이었다.
평소라면 규방에만 머물러 얼굴조차 보기 힘들 규수들이 단오를 맞아 모두 외유를 나온다 했다.
계곡에서 머리를 감고, 해사한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채 그네를 탈 예정이라고.
한창 혈기 왕성할 나이의 사내들이라 학당의 모두가 우르르 그곳으로 몰려갔다.
이럴 땐 함께 휩쓸려 줘야 비밀을 들킬 염려가 없다며.
사내로 분한 주세화 역시 정흥생의 손에 이끌려 내키지 않는 걸음을 디뎠었다.
높이 높이 그네를 타는 여자들과, 그런 그녀들에게 멀리서 함성을 보내는 사내들의 무리를 흰 눈으로 지루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정흥생이 어느 곳을 가리키며 웃었다.
“봐 봐. 저분이 내가 말한 그 사내야. 어때?”
흥생의 시선이 가리키는 풀밭에는 한 미남자가 느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손에 든 백자 술병은 이미 반은 비었는지 입에 댈 때마다 바닥이 높이 치솟았다.
의복도 단정치 못했고,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행태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정말 빼어난 미남이시지 않니.”
마치 한 폭의 미인도처럼.
정흥생의 말대로 잘 단련된 신체와 유려한 외형이 눈을 현혹할 만큼 완벽히 어우러지긴 했다.
세화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생각했다.
‘뭐 생김새가 잘나긴 했네.’
“학당에도 나오지 않으니. 자주 볼 수 없어 아쉬워.”
그래도 저 얼굴을 볼 수 있으니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라고 마음을 토로하던 정흥생이 조용히 덧붙였다.
“난 사실 저분을 처음 봤을 때 꿈까지 꾼 거 있지. 꿈에서 저분과 혼인해서 백씨 성을 가진 아이 이름은 뭐가 좋을까 이러고 있더라고.”
깔깔 웃는 흥생의 목소리를 미간을 찌푸린 채 듣고 있던 세화가 하나를 물었다.
“백씨야?”
“응?”
“저 사내, 백가냐고.”
“응. 백가 도련님이라던데.”
참나. 백씨래.
“그만 가자. 스승님께서 벌써 오셨겠어.”
“뭐야. 갑자기 왜 그래?”
“난 백씨 싫어한다.”
“응?”
“백씨 정말 싫어.”
거리가 아주 멀어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 풀밭에 앉아 있던 미남자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곧장 날아왔다.
칠흑처럼 검은 눈과 마주친 것 같았으나 세화는 무심하게 시선을 흘려보냈다.
우연이겠지. 우릴 보는 게 아니겠지.
별 신경을 두지 않으며 돌아선 그녀가 정흥생에게 다시 한번 턱짓했다.
“가자.”
“……저분이 우릴 보고 있어.”
“무슨 소리야.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데. 이쪽에서 오는 누굴 기다리나 보지.”
“아닌데. ……우리 보는 거 맞는 거 같은데.”
“가자고.”
정흥생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걷기 시작하자 조금 후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흥생도 그녀의 곁에 붙어 걸었다.
“봐 봐. 아직도 보고 있어. 우릴 보는 거 맞다니까.”
“알았어.”
“한번 보라고.”
“우릴 봤으면 본 거지, 그게 뭐. 그냥 보나 보지. 늦겠다. 빨리 가자. 학당에 아무도 없어 스승님께서 많이 노하셨을 거야.”
“어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는 흥생을 보며 세화가 피식 웃었다.
그녀도 느끼고는 있었다. 뒤로 누군가의 시선이 닿고 있다는 걸.
하지만 그녀는 백씨가 싫었다.
‘백씨들이 주제를 모르고 감히 주가에 대적하지만 않았다면…….’
그랬다면 제 아버지와 오빠들이 전장에서 그토록 고생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만 이리 편하게 지내는 게 미안해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을 거고, 밤잠을 설치며 가족들 걱정에 속을 끓이던 어머니마저 전장으로 향하는 상황이 오진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흥생을 재촉하며 빠르게 걸었다.
집요하게 등 뒤로 날아오는 시선은 끝까지 모르는 척했다.
* * *
그 어느 날의 기억이 스러지고 나자 이번엔 여러 가지 환영이 흐린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서로를 보며 미소 짓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울부짖는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두 오빠의 모습이.
그녀를 위해 죽은 사단윤의 딸들의 모습이.
한목소리로 처형을 외치던 혈족들의 모습이.
혼몽을 헤매다 목이 메어 나직이 기침을 토했을 때였다.
그 소리를 듣고 그녀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언니. 깨어났어?”
다가온 사람이 여전히 뜨끈한 세화의 상체를 받쳐 일으키며 물잔을 입에 대 주었다.
바짝 마른 목을 축이려고 갈라진 입술에 닿는 물을 그녀가 천천히 삼켰다.
“어쩌다 이렇게 아프게 된 거야. 갑자기 왜 이러지. 지금은 어때. 옷을 갈아입을래? 일으켜 줄까?”
물을 넘기니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눈을 몇 번 깜빡여 시야를 선명히 했다.
누군가가 다정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언니.”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가 반사적으로 제게 다가오는 하얀 손을 쳐 버렸다.
“세화 언니?”
세화의 초췌한 얼굴이 날카롭게 변했다.
‘얘가……얘가 여긴 왜.’
그녀를 향해 다정히 말을 건네며 열을 짚으려 한 사람은 그녀의 방계 사촌 동생 사연주였다.
그녀 대신 주경현의 부인이 되었던.
아주 좋은 생각이 있다며, 주명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주세화에게 아무 죄나 뒤집어씌워 먼저 고문해 보라고 의견을 내었던.
주세화는 눈앞의 방계 사촌 동생 사연주와 대단히 사이가 좋았다.
사연주는 대부분의 일을 애교 있게 조르거나 웃어넘길 뿐, 좀처럼 언성을 높이는 일도 없었다.
주세화가 백가에 넘어가 있을 때도, 드러내 놓고 행동하기 어려운 그녀의 부모님 대신 연락책을 맡아 주었었다. 한데.
“모임에서 실종 사건의 책임자 얘기에 대해 듣고 그거다 싶었거든. 혹시 소가주님과 혼약하게 되면 언니도 신영의 직계 가족이 되니 언니가 대신 백가에 갈 수도 있겠다고.”
“난 뭐 그렇게 사람들 사이로 한마디 흘렸을 뿐인데 지금의 가주께서 그 말을 들으시고 단번에 언닐 그곳에 보내자고 선대 가주께 직접 요청을 드렸지 뭐야. 경현 님이 직접 말이야.”
“그분은 그때부터 언닐 버리실 생각을 하신 거야. 알겠어? 십이 년 전부터 말이야!”
고문으로 엉망진창이 된 주세화를 보러 직접 밀실의 가장 밑바닥 감옥까지 내려온 사연주가 즐거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었다.
불결한 감옥 환경에 눈살을 찌푸리며 불쌍하고 가련한 것을 본다는 것처럼 안타깝게.
주세화야말로 정상인의 얼굴을 하고 미친 소리를 늘어놓는 그녀를 경악에 차 바라봤었다.
제 아버지는 부모를 잃은 저 사촌 동생을 가엾게 여겨 본가로 데려와 키워 주지 않았던가.
혹시 주씨들 사이에서 위축되기라도 할까 봐 딸인 그녀보다 더 많은 것을 용인해 주었는데 그 결과가 이것이라니.
뒤늦게 후회해 보았자 돌이킬 방법이 없었다.
한데 그 여자가 지금 눈앞에 있었다.
그녀만큼 어려진 모습을 하고 아주 무방비한 상태로.
소가주를 마주쳤을 때와는 다르게, 이 방엔 이 사촌 동생 외엔 아무도 없다.
무얼 더 생각할 정신도 없었다.
그녀가 그대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