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54)

가뜩이나 백가를 필두로 연합한 여섯 가문들 사이가 배상금의 분배 문제로 이미 혼란하고 시끄러웠다.

그간 신영의 횡포를 힘겹게 견뎌 온 가문들은 기세를 몰아 주가를 완전히 굴복시켜야 한다며, 그때까지는 절대 종전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까지 높이고 있는 판국인데.

그 와중에 주가 후계자의 안위가 걱정되어 여섯 가문 연합의 수장 격인 백가 가주가 친히 마중을 나갔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라도 하면.

‘허미.’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재상이 가주 앞에 무릎을 꿇으며 호소했다.

“가주, 옛 역사서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세상 어느 군주도 적의 인질을 호위하러 친히 나섰던 경우는 없었습니다. 심지어 수, 수발까지 손수 드시겠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발 거두어 주십시오!”

“비키거라.”

“가주! 배상 문제로 여섯 가문의 관계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이런 때에 어찌 원수 같은 주가의 후계자를 친히 마중하려 하십니까!”

“그 후계자가 온다고 누가 그러더냐.”

“……네?”

주가 가주의 어린 핏줄이라 하면 아직 탈피를 치르지 못한 소가주 주경현 하나다.

그걸 노리고 일부러 대상을 한정해 책임자를 요구하지 않았던가.

‘한데 가주께서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지?’

침통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재상이 저도 모르게 머리를 들었다.

‘……!’

그리곤 깜짝 놀랐다.

그곳엔 늘 무료한 얼굴로 권태롭게 앉아 있던 가주의 모습이 아니라, 누구보다 생동감 있는 표정으로 웃고 있는, 더없이 아름다운 주인의 모습이 있었다.

……가주께서 웃고 계신다.

재상은 그 사실이 목이 멜 정도로 너무나 놀라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급한 일이 있어 홀로 먼저 갈 것이니 너는 성심을 다해 귀빈을 맞을 준비를 하여라. 알겠느냐.”

그 말을 끝으로 백기하는 재상을 지나쳐 훌쩍 말 위에 올랐다.

히이이이힝-!

주인의 기승에 검고 투박한 근육을 지닌 거대한 전마가 앞발을 치켜들며 환호했다.

“아니 잠, 잠시만. 왜 그리 서둘러서…… 가주!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가주!”

재상이 서둘러 따라갔으나 주인은 그를 몰인정하게 외면했다.

“세상에! 정말 지금 이대로 주가 영지로 가려 하시는 겁니까? 그럼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호위 없이 가실 수 없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서둘러 준비하겠습니다!”

“필요 없다. 너희들은 천천히 와라.”

“후계자의 출발은 한 달이나 후의 일인데 어찌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혼약식을 망치러 간다!”

“네?”

……혼약식?

……누구의?

……아니, 그보다 왜?

재상의 의문을 뒤로하고 백기하는 홀로 정원을 달려나갔다.

“가주!” 하고 그를 부르는 소리가 빠르게 뒤로 멀어져갔다.

날랜 전마가 무서울 정도로 속도를 냈다.

수목향 가득한 바람이 세차게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더 빠르게 속도를 내기 위해 마편을 휘두르는 손길은 조급했으나 전마를 재촉하는 마음은 그 언제보다도 가벼웠다.

“이랴!”

굽이치던 흑단빛 머리카락이 눈앞에 선연했다.

“주세화.”

백기하의 입술이 더없이 그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세 글자를 입속에서 삼켰다.

살아남기 위해선 자존심을 굽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지.

타오르는 불꽃 같은 눈동자로 강렬히 미래를 준비하던.

너무나 뜨거워서 델 것 같이 느껴졌던 그 여인.

“하하!”

시간이 되돌아왔다!

아직 그녀는 주경현과 혼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늦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 있을 것이다.

그 손을, 다시 한번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주세화.”

달콤한 세 음절의 단어를 입안에서 뇌까리는 그의 눈빛이 강렬하게 번뜩였다.

이번에야말로.

절대로 놓치지 않을 것이다.

평생 미소조차 제대로 지을 일 없던 백가의 가주는 지금 이 순간 가슴이 시원하도록 웃으며 앞으로, 앞으로 달려나갔다.

“주세화.”

다시, 그녀를 만난다!

* * *

‘주경현!’

그사이 주세화는, 제 앞으로 다가온 사람을 보며 그저 당황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우아하고 눈을 현혹하는 외모는 여전했다.

달콤한 시선과 늘 그녀에게만 보여 줄 것 같았던 부드러운 미소 역시도.

“눈이 왜 빨갛지? 혹시 운 건가?”

다정한 얼굴로 그녀를 부르는 그의 존재 외에 모든 것이 급속도로 멀어졌다.

‘필요할 땐 저리 다정한 얼굴을 꾸며내 놓고 오 년간 날 지하 감옥에 처넣은 채 고문했었지.’

눈앞에 확실히 그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자 당황은 사라지고 끓어오르는 분노만이 남았다.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제대로 이유조차 알려 주지 않은 채 세화가 백가에서 돌아오자마자 주경현은 그 전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그녀를 잔혹하게 고문했다.

“가주보다 명망이 높아져만 가는 원로를 세상에 남길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내 충성스러운 혼약자를 고문할 필요가 있었지. 무슨 짓을 해도 한결같이 충실한 네 아비는 결코 내게 칼을 겨누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네 손톱을 뽑고, 손가락을 자르고, 살을 인두로 지지고, 고통에 찬 네 비명을 들려주자 그 두터운 충심도 결국 흔들리기 시작하더군.”

“내가 바라던 빌미가 그렇게 만들어졌지.”

‘살을 죄며 날 결박하던 포승줄도, 굴욕적으로 어깨를 짓누르던 무사들도, 저놈의 곁을 단단히 지키던 친위대도 지금은 없는데.’

이 짐승만도 못한 놈을 죽이지 않을 이유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허나 그 순간이었다.

“소가주님. 지금 딸아이가 몸이 좋지 못해 예의를 제대로 갖추지 못함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단단하고 강인한 손이 세화의 어깨를 잡았다.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그녀는 퍼뜩 몸을 떨었다.

……아버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기라도 한 건가?”

‘아버지를 또다시 처형장에 올릴 순 없어. ……그러니 지금은 안 돼.’

사단윤 또한 다시금 비참하게 살해당하게 할 순 없다.

주세화는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분노를 간신히 목 아래로 밀어 넣었다.

입술을 힘주어 물어 증오로 얼룩진 시선을 감추고, 핏줄이 서도록 힘껏 주먹을 움켜쥐었다.

‘참아야 해. 여기선 아니야.’

손톱이 날카롭게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제 살의를 누르는 것만으로도 벅차 그녀는 손바닥이 온통 피투성이로 변해 가는 것도 몰랐다.

“이런, 정말 몸이 좋지 않은 듯하군. 먼저 물러남을 허락하네. 딸을 데리고 어서 돌아가 보게.”

“감사합니다. 소가주님.”

“내 눈엔 아파도 아름답지만, 그래도 걱정되니 일단 돌아가 푹 쉬고 있어라. 내가 곧 찾아가겠다.”

입을 열면 온통 저주의 말이 흘러나올 것 같아 그녀는 입술을 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저 금수를 이곳에 몸 성히 두고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의 가슴을 타들어 가게 했다.

“여봐라! 배신자 무리의 목을 광장에 효시하고 몸뚱이는 갈기갈기 찢어 모두 개 우리에 던져 넣어라!”

제 가족들이 당했던 것처럼 목을 자르고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개 먹이로 던져 버리고 싶은데.

그걸 하지 못하고 자리를 떠야 한다니.

분노의 열기를 주체하지 못해 눈가가 온통 뜨끈히 젖어 들었다.

‘이게 뭐라고 울어. 울지 마. 눈물 따위 보이지 마. 또 기회가 있을 거야. 반드시.’

살의가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막느라 딱딱하게 긴장된 그녀의 몸을, 그녀의 아버지가 걱정 어린 손길로 천천히 이끌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으나 그 손길이 있어 앞으로 걸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마. 절대로 이게 마지막이 아닐 테니까.’

결국 눈물이 다시 쏟아졌다.

* * *

어떻게 집으로 왔는지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온몸이 뜨겁다 싶더니 그대로 쓰러져 꼬박 이틀을 앓았다.

정신을 잃은 그녀는 꿈속에서 누군가를 보고 있었다.

아버지와 오빠들을 전장에 보낸 이후, 그녀는 성인이 되지 못한 몸으로도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여러 가지로 고민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조언을 받아들여 선택한 것이 인간들의 사이로 숨어들어 그들의 삶을 경험해 보는 것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로 인간계로 옮겨 가야 할 때가 올지 모른단다. 그때를 대비해 인간들의 삶과 사고방식을 먼저 알아두면 좋지 않겠니. 그러니 세화 네가 먼저 내려가 보렴.”

환족들은 인간보다 월등히 수명이 길었다.

하여 그들이 멸족하는 속도보다 그들의 고향인 환계가 스러지는 속도가 더 빠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인간계는 환계에서 추방당한 죄인들이 가는 곳 아닌가요? 저는 아직 탈피도 하지 못했는데 혹시 그 죄인들과 마주치게 되면 어쩌죠?”

“걱정하지 말아라. 환계에서 쫓겨날 때는 가주께서 직접 근원을 파괴하신단다.”

“파괴되면 어떻게 되는데요?”

“영력이 몸에 저장되지 못하니 인계의 공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되지. 어릴 때 추방당했다면 탈피조차 하지 못한단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라고. 그 죄인들은 네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고.

그녀는 그때 전장에 나간 가족들의 걱정에 매일매일 불안해하고 있었다.

하여 어머니가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안심시켜 주고자 할 일을 부여해 준 것이지만 그때는 그것을 몰랐다.

그런 이유로 세화는 인간들의 세상에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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