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254)

* * *

주명윤의 인내심은 등 뒤로 문이 닫히던 순간 끊어졌다.

“너!”

그의 눈매가 순식간에 불그죽죽하게 달아올랐다.

‘대체 이게 무슨…….’

귀한 자식을 그런 험한 자리에 보내야 한다니.

게다가 이 딸이 어떤 딸인가.

오래도록 자식이 없던 그들 부부가 죽은 친우의 아들 둘을 입양하고도 한참이나 지난 다음에야 겨우 태어난 딸인데.

“네가 먼저 희생양을 자초하면 어쩌자는 것이냐! 가주께 그리 고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몰라?”

“아버지.”

“대체 이게 무슨 짓이야.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린 이상, 누가 그 일에 대해 진언을 올린다 한들 가주께서 재고하실 리가 없는데!”

아버지는 그녀를 무섭게 질책하고 있었건만 세화는 그것마저도 기꺼웠다.

떨리는 팔을 들어 아버지의 목을 그대로 끌어안았다.

아까부터 이게 하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다.

“무슨, 너. 네가 이런다고-.”

“사랑해요.”

“…….”

“사랑해요, 아버지.”

맙소사. 따뜻해.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 그리한다고 해서 눈앞에 아른거리는, 목이 잘린 부모님의 환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허공으로 솟구치던 붉은 피.

그들을 둘러싼 이들의 함성.

그것들은 절대 지워지지 않을 것처럼 선명하게 그녀의 눈과 귀를 괴롭히고 있었다.

‘눈조차 제대로 감겨 드리지 못했지.’

세화의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사랑한다고 해야 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그 말을 해야 했는데. 너무 가슴이 아파 그걸 하지 못했다.

“사랑해요.”

그래. 이 상황이 명계든 주마등이든 무슨 상관이 있으랴.

처참했던 과거를 다시 반복하는 것이 신이 그녀에게 주는 형벌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온기가 느껴지는 제 아버지의 목을 끌어안고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많은 것을 다시 얻은 것만 같았으니까.

굳건한 두 팔이 그녀의 등을 마주 끌어안았다.

“나도, 정말로 사랑한단다, 얘야.”

그렇게 대답하는 아버지의 목소리 역시 물기를 가득 담은 채 떨리고 있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넌 전혀 위험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 이렇게 마지막 인사 같은 건 하지 말아라. 아비가 어떻게든 해 보마. 분명 방법이 있을 거야.”

그는 세화가 죽음을 각오한 비장한 마음으로 백가로 가는 일에 응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주세화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도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엔 다를 거예요. 주시는 사랑을 받기만 했던 지난 생과는 달리, 이번엔 제가 꼭 지켜 드릴 거니까요.’

“아가씨, 여기.”

무언가 눈앞으로 내밀어졌다.

세화가 그것의 궤적을 따라 젖은 시선을 돌렸다.

안타까운 얼굴로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고 있는 중년 남성이 있었다.

그녀를 위해 비참한 모습으로 죽어 갔던 아버지의 무사 사단윤이었다.

“아저씨.”

“제가 나가고 나면 문을 걸어 잠그십시오.”

“전 결코 돌아오지 않을 겁니다. 저 바깥에서 죽겠습니다. 그러니 누구의 목소리가 들려도 여시면 안 됩니다. 사위가 고요해지면 비상 통로로 빠져나가십시오. 절대로 돌아보셔선 안 됩니다.”

‘시신을 확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었지.’

그는 주명윤의 유모의 아들이자 대대로 주가를 모셔 온 가신의 가문 사가(蛇家)의 일원이었다.

사단윤은 자신의 세 딸을 모두 주세화의 측근 시녀로 보낼 정도로 맹목적인 충성심을 보였다.

그 마음은 그가 죽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사단윤은 배신자의 죄명을 뒤집어쓰고 빛도 들어오지 않는 감옥에 갇힌 주세화를 구하러 홀로 밀실에 숨어들어 왔다.

주명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의 이름을 가적에서 제명한 상태였다.

결국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고 무사들 손에 잔혹하게 죽어 갔었지만.

그것을 얇은 문 너머의 주세화가 알아차리기라도 할까 봐 혀를 이로 잘라 삼켜 작은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고 했다.

주세화는 그 사실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그가 얼마나 비참한 형태로 명예도 지키지 못하고 죽었는지를 호송 무사에게 비웃음당하며 들어야만 했던 것이다.

비록 직위는 시녀였으나 친자매와 같았던 사단윤의 세 딸들도 모두 그녀를 위해 죽었으니 주세화는 그에게 갚지도 못할 커다란 빚을 진 셈이었다.

‘극악무도한 죄를 저지른 사형수처럼 살가죽이 벗겨진 채 사지가 잘려 평원에 버려졌다 들었는데.’

그 아저씨가 이리도 멀쩡한 모습으로 지금 제 앞에 서 있다니.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뒤섞여 그녀의 볼이 더욱 흠뻑 젖어 들었다.

“아, 아가씨.”

죽은 후 이처럼 건강한 모습으로들 다시 만날 것을 알았다면 원수의 발을 핥아서라도 조금이라도 더 살아남을 걸 그랬지.

그렇게 시간을 벌었다면 홀로 보잘것없이 죽어 갈 것이 아니라.

‘쓰레기 같은 그 짐승들을 하나라도 더 데리고 죽을 수 있었을 텐데.’

눈물을 닦아 주는 아저씨의 손길을 느끼던 그 순간이었다.

타닥. 탁.

잘 손질된 가죽신의 밑창이 대리석 복도 위에 제 존재를 알렸다.

누군가 걸어오고 있었다.

모두의 시선이 모두 복도 너머로 향했다.

장신의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귀 끝에서 흔들리는 새까만 머리카락. 본디 형태가 그런 양 늘 부드럽게 휘어져 있는 눈.

세화를 발견한 그가 더욱 깊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속도를 높여 한달음에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복도 안쪽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후광처럼 등에 업고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건네졌다.

“세화야.”

외로웠던 그녀를 가장 가까이에서 다독여 준 유일한 이였기에.

그녀는 제가 어릴 때부터 늘 다정했던 이 사촌 오라버니가 정말 좋았었다.

평생을 가문을 위해 노력하시는 아버지처럼, 자신이 크면 이 사촌 오라버니를 위해 목숨을 바칠 거라 결심할 정도로.

“세화야.”

감미로운 억양으로 그렇게 이름이 불리울 때면. 둘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가 언급될 때면 그 마음이 더욱 강해졌었다.

“네가 날 많이 도와줘야지. 넌 내 신부가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누구와 함께하고 있더라도 늘 네가 내 마음의 첫째니까.”

‘그렇게, 그를 위해선 뭐든 대신하고 싶어졌었지.’

“……소가주님.”

“여봐라! 그대들을 위해 헌신했다 외치는 이 몰염치한 배신자를 위해 천신주를 가져오라!”

‘이제는 그 마음이 사랑이었는지, 몸에 짙게 배어 버렸던 충성심이었는지조차 혼동되지만.’

사랑은 아니었다고 변명하고 싶어지는 전생의 혼약자.

주가의 후대 가주, 주경현이었다.

* * *

한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 설산을 등 뒤로 놓고, 만화(萬花)가 아름다운 정원이 놀라울 정도로 화려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 정원의 한복판에서 만년설처럼 빛나는 흰 대리석 저택은 호족 백가의 자랑이었다.

파란 하늘과 대비되는 새하얀 조각상들과 석판들. 곡선이 아름다운 계단과 난간들이 찬란한 햇빛 아래 눈부시게 빛났다.

매끄럽게 연마된 하얀 계단을 빠르게 걸어 내려오는 몇 쌍의 다리가 있었다.

앞서 걷던 이가 말을 준비시키기 위해 곁의 시종에게 무어라 지시했다.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따르던 이는 잠시 제가 들은 것을 믿을 수 없어 멈춰 섰다.

“……가주, 지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선두에서 걷는 이가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으며 대꾸했다.

“재상의 귀가 막힌 것 같으니 길을 늦추지 말고 가서 그거나 떼어다 씻어라.”

“방금 실종 사건의 책임자로 올 주가의 후계자를 호위해야겠다고 말씀하신 것 맞습니까? 호송이 아니라요?”

“죄수를 끌고 오느냐? 어디까지나 주가와 백가의 우호적 교류를 위해 본 가문을 방문하는 귀하신 분이시다. 다신 그따위로 언사하지 말거라.”

“…….”

‘뭐, 뭐지. 가주의 머리가 어떻게 되신 건 아닐까.’

총관은 순간 제 주인의 정신을 염려하며 입만 뻐끔거렸다.

“귀한 분이 어디 이리 멀리까지 외유를 해 보셨겠느냐. 긴 행로에 손님의 건강과 안위가 염려되니 내가 직접 가서 살펴야겠다.”

“시종을 보내라고? 그만두거라. 그분의 수발은 내가 들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귀를 의심할 만한 기가 막힐 내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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