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강은 환계를 동에서 서로 가로지르는 가장 큰 강이었다.
강의 동북쪽에서는 대기 중의 영기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식물인 영목의 자생지가 있었다.
환계 전체에서 생명력이 줄어가며 영목의 자생지 역시 면적이 점차 줄어들었다.
뒤늦게야 사람들은 영목이라도 있어야 소멸이 지체된다는 것을 알고 영목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하여 자생지로 물줄기를 끌어오기 위해 강의 물줄기를 많이 갈라 내었는데, 그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건기에는 걸어서 건널 수 있을 만큼 중강의 수위가 낮아지곤 했다.
“그 동북쪽 경계 초소에 주가가 소유한 인간계로 가는 통로가 있고요.”
“그건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강을 넘어서 초소를 공격한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어.”
‘예전에는 누구도 감히 주가에 검을 겨눌 생각을 하지 못했었으니까. 이런 식으로 주가가 육가에 지게 될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주가 무사들이 철통처럼 강변을 지키던 그때와는 다르게 지금은 간악한 폭도 무리들이 우리 권역 가장 가까이까지 몰려와 있지 않습니까. 신영의 핏줄을 백가까지 호송하기 위해.”
“호송?”
듣기 불편한 언급에 노인의 눈썹이 일그러지려는 찰나.
그녀가 다시금 공손한 목소리로 고했다.
“하여 그들도 낮아진 강의 수위를 볼 수 있을 터. 견물생심이라고, 이미 종전을 한 상황이라지만 혹여 우리가 가진 통로에 새로운 탐욕을 부리진 않을까 염려하였습니다.”
환계가 스러져 가며 인간계를 새로운 터전으로 생각하는 환족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간계로 가는 통로가 예전보다 훨씬 중요히 여겨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환계의 곳곳에 퍼져 있는 통로 중 생명체가 아무런 조건 없이 어떤 상황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주가가 가진 것 하나뿐이었다.
“신영께서 쓸데없는 교전을 엄금하셨기에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길 경우, 초소에선 빠른 대응이 힘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지금 주가는 패자의 위치에 있었고, 백가주가 신수인 것이 밝혀진 이상 그 위치는 결코 변할 수 없었다.
이쪽에서 먼저 칠 이유가 없음에도 굳이 저 노가주가 교전을 금한다 명을 내린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당연히 이후 반복될 패배에 변명으로 사용하기 위해서겠지.’
그 말이 또다시 비위에 거슬린 듯 고목 같은 손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시선만을 조금 들어 올린 세화가 그것을 확인하고 덧붙였다.
“그 명이야말로 신영의 자애와 관용에서 비롯된 것이건만, 불순한 역도들은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니까요.”
“…….”
“하여 만약 저를 호송해 갈 백가 무사들이 통로를 차지하려 초소를 공격하게 될 경우, 운용권이 있다면 사태에 한발 앞서 대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노인이 제 말을 허투루 듣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세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제 외가이기도 한 천가의 입지 때문입니다.”
“……천가는 또 왜.”
“듣기로 천가의 현 가주는 이번 전쟁의 배분 문제에 대해 여러 번 연합에 불쾌함을 드러냈다고 들었습니다. 여섯 가문이 혈맹 관계를 맺었다고는 해도 그것은 전시의 일이니까요.”
“…….”
“배분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각 가문의 가주들이 백가의 본가, 백석저에 머물 것이라 합니다.”
“그래서?”
“천가의 가주는 핏줄로 따지면 제 숙부가 되시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것을 핑계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그들 사이의 갈등을 발견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요.”
주세화가 공손한 자세로 덧붙였다.
“천가가 혈맹 선언을 포기하기라도 한다면 연합 사이에서 큰 반향을 불러올 수 있을 테니까요. 천가를 자극해야 할 때 가장 가까운 초소와 긴밀한 연락이 필요해지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 큰일을 네가 해낼 수 있다고?”
“어찌 가문의 위기를 방관하고만 있겠습니까. 몸을 사리지 않을 것입니다.”
“……. 마지막은?”
“마지막 세 번째 이유는 인간계로 가는 통로를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이번 전쟁에서 백가는 인간계와 연결된 통로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여 저희를 기습하고 타격을 입히지 않았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생명체가 자유자재로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주가의 손에만 있는 것을. 내통자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그들이 어떻게 통로를 사용해 우리 군을 급습한 걸까요?”
인계와 통하는 틈은 환계 각지에서 발견되지만 다른 것은 겨우 물체를 던져 넣거나 할 뿐.
생명체가 직접 넘어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주가가 가진 통로뿐이었다.
하지만 연합군은 물건이나 간신히 통과하는 저 작은 틈을 사용해 이동하며 주가군의 뒤를 쳤다.
‘뭐, 난 이미 어떻게 그렇게 한 건지 알고 있긴 하지만.’
세화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꺾으며 말을 이었다.
“종전을 맞이한 지금까지도 우리는 아직 그 방법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는 적에게 계속해서 등 뒤를 내주고 있는 상황이 아니겠습니까.”
“……계속하라.”
“많은 연합군이 그 방법을 알고 있으니 백가에서 생활하다 보면 저도 그에 대해 알게 되는 상황이 올지 모릅니다. 하나 저는 통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어 엿듣거나 보게 되어도 그것이 그 방법에 대한 정보인 줄 모를 확률이 높습니다.”
“…….”
“초소병은 인간계의 통로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여 운용권을 이용하여 초소병 하나를 제 개인 시종으로 삼아 백가의 상황을 지켜보게 하고 싶습니다.”
“…….”
“장수도 아닌 제가, 조금 전 말씀드린 것들 이외의 일로 병권을 사용할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저 어떻게든 가문에 도움이 되고 싶어 무리한 청을 드려 보았습니다. 송구합니다.”
“…….”
노인이 세화를 가느다란 눈으로 응시했다.
바짝 마른 고목과도 닮은 팔이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렸다.
‘그저 너밖엔 맡아 줄 이가 없다 치켜세우며, 저 계집을 백가로 보내 일을 해결하려 했을 뿐인데.’
생각보다 저 어린것의 언변이 제법이다.
치마를 생명줄처럼 움켜쥐고 있는 주명윤의 딸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허나 운용권을 원하는 이유가 어린아이의 머리에서 나온 것 치고 제법 사리에 맞았다.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탈피조차 하지 못한 몸으로도 이 주씨 혈족을 위해 무언가를 해 보려 하는 의지였다.
‘그래. 뭔가를 하려 해도 능력조차 제대로 깨우치지 못한 몸이니 혼자 힘으로는 무리가 있겠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노인의 속은 이미 썩어 들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위대한 주가는 환계의 시작부터 지배자의 위치를 지켜왔건만, 같잖은 것들을 상대로 얻은 패전의 오명이라니.
그 와중에, 비록 패했으나 홀로 최전선에서 무사들을 다독이며 혈족을 지킨 주명윤에 대한 찬사까지 이어지고 있었으니.
노인은 술이 없으면 잠에도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
제 곁에 선 우직한 성격의 원로가 노인은 항상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거슬렸었다.
후계자의 앞길을 생각하면 주명윤은 반드시 쳐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시발점으로 삼으려 했던 주명윤의 딸이지만.
‘그래. 이왕 버리기로 한 것, 조금 더 쓸모 있게 사용해도 괜찮겠지.’
“좋다. 합당한 이유가 있다면 못 줄 것도 없지.”
“감사합니다. 가주.”
“허나 그 전에 가문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네 결심을 확인해 보고 싶다.”
“분부하실 일이 있으십니까. 하명하십시오.”
“혼사 동맹을 맺으려 하는데 네가 해 줄 수 있겠느냐.”
“예? 혼사라 하시면.”
“백기하, 백가 가주의 비로 말이다. 그편이 네 처우에도 도움이 될 테니.”
“가주!!”
주명윤이 창백한 낯빛을 하고 소리쳤다.
아직 미혼인 백가 가주 백기하는 여섯 가문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이제부터 여러 혼사 동맹을 맺게 될 것이 자명했다.
그 사이에서 여섯 가문의 공적이 된 주가의 핏줄이 제대로 된 취급을 받을 수 있을까.
말이 혼사지, 그건 그저 가문을 위해 평생을 그곳에서 치욕적으로 살다 죽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런 자리에 제 딸을 보내겠다고?
그런 걸 용납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항변하려던 그 순간 딸의 목소리가 먼저 알현실에 퍼져나갔다.
“하지 않겠습니다.”
“뭐라?”
노인의 눈초리가 섬뜩하게 굳어졌다.
“저의 처우를 배려하여 주시는 가주의 마음에 먼저 감사드립니다.”
주세화가 그런 노인의 반응 따윈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허나 백가의 여인들은 대부분 남편의 말에 순종하고 외출을 삼가며 집안의 내실을 다지는 것을 최고의 덕목으로 친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혼사를 치르고 백가에 가는 편이 모양새가 더 그럴싸할 수는 있겠으나 그렇게 되면 제 행동반경이 저택의 내원으로 제약되지 않을까요?”
“…….”
“저는 수모스러운 생활을 견뎌 낼지언정 가주께서 적당한 때 어떤 형태로든 저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노출되어 있고 싶습니다.”
바짝 일그러져 있던 노인의 눈썹에서 천천히 힘이 풀렸다.
대놓고 명을 거부하는 당돌한 대답에 번쩍 화가 났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그 화를 다시 내리누르는, 분명 그럴듯한 이유였다.
‘그런데도 뭘까 이 껄끄러움은.’
노인이 제 앞에 선 채 고개를 숙인 작은 소녀를 응시하며 그를 계속 자극하는 어떤 위기감의 이유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찾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눈앞에 있는 건 그저 탈피도 못 한 한낱 반편이 어린아이일 뿐이니.
“…….”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 운용권을 넘겨줘도 될까?’
어린것의 말처럼 그편이 주가의 미래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저 주명윤의 손에 힘을 실어 주게 되는 건 아닐까.’
손톱 밑 가시처럼 거슬리는 저 사내에게 아주 조금의 이득도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더불어 이 소녀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껄끄러움 때문에 노인은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뭐. 지휘권이 아닌 운용권이니, 경계 초소들에 한해서라고 명확하게 제한을 둔다면 상관없겠지.’
성인식도 치르지 못한 아이일 뿐이라고. 영력조차 희미해 보이니 그저 자신의 염려가 과할 뿐이라고.
정 거슬리면 탈피를 했을 때 다시 회수해도 된다고.
노인은 제 불안을 그런 말로 설득시켰다.
아무리 주시해도, 고개 숙인 주명윤의 딸에게선 어떤 위화감도 찾아낼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저 붉어진 눈은 확실히 꾸며 낸 것이 아니었다.
‘맹랑한 행동이긴 했으나 나의 위엄에 짓눌려 두려웠다는 말 자체는 거짓이 아닌 듯하고…….’
결국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출발은 한 달 뒤가 될 테니, 명윤 너는 딸의 여정을 준비하거라. 누가 알아서 좋을 것은 없으니 초소의 운용권은 네 딸에게 따로 전달토록 하마.”
“예, 가주.”
“그 전에 환송식이 있을 테니 그 준비도 하도록 하고.”
“예.”
“알아들었으면 이만 물러가라.”
노인은 피곤한 얼굴로 바짝 주름진 손을 내저었다.
가주가 그렇듯 대화의 종결을 선언하고 눈을 감아 버리자,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시종이 조용히 줄을 잡아당겼다.
노인과 그들 사이에 발이 내려왔다.
퇴실의 종이 울렸다.
단단하게 턱을 굳힌 주명윤은 노인을 향해 묵례한 다음, 큰 보폭으로 딸의 손을 잡은 채 그곳을 빠져나갔다.
“…….”
그들이 뒤를 돈 순간부터 다시 눈을 뜬 노인은 소리도 없이 별실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전쟁의 승기가 백가로 넘어간 이후로 그는 하루도 편히 잠이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분명 이 껄끄러운 불안감은 그 때문일 것이다.
“소가주님과 혼인하라는 명은 거두어 주십시오.”
‘발칙한 년.’
소가주를 위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그럼에도 감히 제까짓 게 먼저 거부의 의사를 비치다니.
괘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그 답변 또한 더욱 기억에 남았다.
‘백가 가주와의 혼인이야 당연히 하기 싫을 수 있지.’
말이 혼인 동맹이지 평생을 그곳에서 비참하게 살다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으니.
하지만 내도록 그를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인 저 소녀는, 이상하게도 두 번의 혼사를 거부할 때만은 조금도 두려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희열에 차기라도 한 듯, 그토록 당돌하고 명백한 대답.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그녀의 본심인 양.
‘뭐, 일단 딸을 치워 주명윤을 압박하고 내 후계를 지켰으니 당분간은 한숨 돌리겠군.’
노인이 피로한 눈꺼풀을 내리눌렀다.
뜨거운 햇살이 거대한 창을 지나 노인에게로 느른히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