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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화가 태어난 주가는 환계를 대대로 다스려온 용족의 후손이었다.
환족은 방대한 영력을 지니고 태어나 탈피를 통해 영수(靈獸)로 거듭나며 성체가 된다.
이후 또 한 번의 탈피로 신수가 될 수 있지만 지난 천오백 년 동안은 한 번도 신수가 탄생하지 않았다.
주가의 가장 중요한 능력인 천리안 역시도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용의 본신과 함께 사라져 갔다.
그럼에도 주가 혈족들이 품은, 지배자 일족이라는 아집은 희석될 줄을 몰랐다.
향락과 부패, 나태에 오랜 세월 길든 주가 일원들은 의무를 짊어지기보다 책임을 미루고 누군가를 짓밟는 데 더 익숙했다.
그런 지배자를 두고 있는 만큼 나머지 여섯 종족의 삶은 점차 고단해졌다.
그러던 중 주가를 제외한 여섯 가문에서 다수의 실종자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실종 사건은, 행방불명된 이들이 모두 탈피하지 못한 아이들이었기에 큰 문제가 되었다.
여섯 가문은 치밀하게 지워진 흔적을 복원해 가며 꼼꼼하게 범인을 쫓았다.
한데 그 흔적은 매번 주가의 영지로 향하는 곳에서 끊어져 있었다.
주가의 권역은 대대로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하여 그들은 주가에 일의 해결을 요청했으나 신영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주가의 횡포에도 지금껏 입을 다물었던 여섯 가문이었으나 이 방임에는 참지 못했다.
종래엔 사건의 조속한 해결을 요구하며 지배자인 신영의 권위에 대적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런 행동을 괘씸하게 여긴 주가의 가주는 각 가문을 압박하기 위해 막대한 병력을 보냈다.
하지만 믿을 수 없게도 이 전투의 패배자는 주가였다.
여섯 가문 중 하나인 백가의 가주, 백기하가 그토록 젊은 나이에 신수(神獸)의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었다.
굴욕적인 종전 협의의 자리에서, 백가는 주가에 실종 사건을 맡아 처리할 책임자를 요구했다.
반드시 신영의 핏줄이어야 하며, 범인을 밝혀내고 잃어버린 아이들을 찾기 전까지는 백가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종전 합의서에 들어 있는 내용이었다.
신영, 즉 주가 가주의 핏줄이라면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소가주 주경현 하나밖에 없었다.
그를 인질로 삼으면 주가에서 조속히 사건을 해결할 거라 기대한 것이지만 일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치욕적인 요구에 응해 후계자를 보낼 수 없었던 신영이, 제 아들을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아낸 것이다.
* * *
“그래서 내 제안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금 이 제의가 바로 그것이었다.
주경현과 혼약한 뒤, 주가를 대표해 실종자를 찾는 막중한 임무를 맡아 백가에 다녀오라는.
길어야 몇 달이면 충분히 사건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러고 나면 삼계를 통틀어서 가장 성대하게 소가주와의 혼인식을 치르게 해 주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저 약속은 두 가지 모두 지켜지지 않는다는 걸.
게다가.
“혼약이라니. 그곳에서 무슨 짓을 당했을 줄 알고. 아니지. 무슨 짓을 하며 적진에서 그리 오래 살아남았을 줄 알고 언니를 가모의 자리에 앉히죠?”
“나 같으면 백가에서 쫓겨나 이곳으로 돌아온 날, 부모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진했을 거예요. 아니면 지조를 지키기 위해 백가에서 죽었던지. 언니한텐 수치심이란 게 없나요?”
“백가와 결탁하여 가문의 위상을 떨어뜨린 배신자들을 처단한다!”
그녀의 주먹이 치마를 있는 힘껏 움켜쥐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미래를 알고 있다고 해도 이 제안을 거절할 방법이 없다.
이것은 제안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 명령이니까.
두 오라버니들은 그녀의 친오라비가 아니었다.
그러니 모든 주가의 핏줄 중, 가장 신영과 가까운 주명윤의 딸, 그녀가 아니라면 주경현을 대신할 자격이 되지 않는 것이다.
“가주, 재고해 주십시오. 저 아이는 아직 탈피도 하지 못했습니다. 저런 어린아이가 무슨 사건을 해결하고, 무슨 대표자를 맡겠습니까.”
“의무를 수행하기에 부족한 나이는 아니지.”
“주가의 존엄을 떨어뜨리기만 할 것입니다.”
“그대의 딸이 결정할 문제다. 명윤 넌 물러서 있거라.”
“아직 어린아이입니다. 가주!”
“물러서 있으라 했느니.”
황급히 노인의 앞으로 나온 주명윤이 무릎을 꿇는 것으로도 모자라 노예처럼 바닥에 이마를 대고 부복했다.
딸의 안위를 위해서 체면조차 벗어던진 것이다.
“가주! 부디 재고해 주십시오.”
“주명윤!”
‘저 광경을 또 보게 되다니.’
세화의 눈시울이 다시금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예전에도 저렇게 막으려 하셨었는데.’
대체 뭐지 이건. 이곳이 혹시 말로만 듣던 명계인 걸까? 아니면 이것이 죽을 때 보게 된다는 주마등인가?
사실 무엇이든 상관없었다.
다시 과거를 되풀이할 수 있다면 이번에야말로 가족들을 살릴 테니까.
“가주.”
부러 목소리를 떨며 그녀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깨가 바짝 긴장했다. 입안이 바짝 마르며 치맛자락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제가 맡겠습니다.”
“주세화!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빠져 있거라!”
“괜찮아요, 아버지. 제가 갈게요.”
“현명한 대답이다. 명윤, 네 딸은 너보다 이치에 맞는 말을 하는군.”
노인은 그녀의 대답에 안심한 듯 숨을 길게 내쉬며 상좌에 몸을 기댔다.
“그러나 소가주님과 혼약하라는 명만은 거두어 주십시오.”
“……뭐라?”
“제가 사리에 밝지 않아 옳게 판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혼약 후 보내려 하신다는 건 백가에서 직계, 혹은 그에 준하는 핏줄을 요구했다 사료됩니다.”
“…….”
“하지만 가주. 저 역시 선선대 신영의 피를 잇는 주가 핵심 원로의 독녀가 아닙니까. 소가주님과 혼약하지 않아도 제가 가는 것이 백가의 요구와 맞지 않는 일은 아닐 겁니다.”
“…….”
“소가주님께서는 장차 일족을 이끄셔야 할 분이신데 백가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저를 혼약자로 두게 하시다니요.”
치마를 부여잡은 세화의 손등 위로 파란 혈관이 돋았다.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비록 제가 아직 성인이 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지배자 일족으로서의 고결한 의무를 모르지 않습니다. 어떤 보상과 약속 없이도 기꺼이 신영의 말씀을 받들어 백가로 향할 것입니다.”
그 말에 노인의 마음이 제법 흡족해졌다.
낮고 거친 웃음소리가 상좌에서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하지만-.”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던 그녀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 전에 신영의 명징한 판단과 자비로우신 마음에 기대 감히 주청 드리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뭐지? 말해 보라.”
그녀는 이제까지보다 더욱 가녀리고 겁먹은 표정으로 입매를 떨었다. 가주의 눈에 보이도록 마른침을 삼키기도 했다.
지금 요구하는 것을 반드시 얻어 내야 한다.
그걸 위해서라면 어떤 모습이든 꾸며 낼 수 있었다. 제 아비가 저를 위해 모든 체면과 자존심을 벗어던진 것처럼.
“송구하오나, 만일 허락하신다면 경계지대 무사들의 운용권을 가지고 떠나고 싶습니다.”
“뭐라, 운용권? 지금 병력 운용권을 언급하는 것이냐?”
“예, 가주.”
대답이 없던 노인은 잠시 가소롭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탈피도 하지 못한 어린아이가 뭘 알아서 그런 걸 달라고 하는지.
‘혹시 아비가 시키기라도 한 걸까?’
하지만 주명윤은 창백한 안색을 한 채 제 딸의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꼴을 보니 원하는 방향으로 대화가 흘러간다 여기는 것 같지는 않았다.
눈살을 찌푸린 노인이 큰 관심 없이 대꾸했다.
“그건 너 같은 어린애의 손에 쥐여 줄 만한 것이 아니다.”
주세화는 치마를 더욱 힘주어 쥐며 두려워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미래에 저 경계지대에서 뭐가 나오는지를 이미 알고 있다.
‘고시대의 영단 팔백 개. 그거라면 대기 중에서 영기가 사라져 가는 지금 상황에서도 영수를 뛰어넘어 곧장 신수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렇기에 반드시 운용권을 가져야만 했다.
* * *
그들의 고향인 환계는 죽어 가고 있었다.
대기 중에 가득했던 생명력과 힘은 점차 흐려져 인계와 다름없는 꼴이 되어 가고 있었다.
태어나는 아이들 역시 점점 약해지기만 했다.
영력을 무엇보다 중요한 보물로 여기는 환족에게 이것은 대단히 큰일이었다. 영력에 따라 젊음을 유지하는 시간과 수명이 좌우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환족 사이의 전투는 인원에 승패가 구애되지 않았다.
이번 전쟁에서 신수인 백기하가 홀로 주가군을 상대했던 것처럼.
방대한 힘을 가진 한 명의 환족이 그보다 영력이 적은 수백 명, 수천 명의 인원을 짓밟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말이 실종 사건 해결을 위한 책임자이지. 분노한 여섯 가문이 실종된 아이들을 찾아내라며 목줄을 잡을 인질을 원하는 거잖아?’
그녀 스스로가 이미 겪어 보지 않았던가. 필연적으로 대단히 모멸적으로 흘러갔던 백가에서의 그 나날을.
그런 상황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저 팔백 개의 영단을 반드시 그녀가 먼저 가져야만 했다.
힘을 확보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도 시작할 수 없을 테니까.
병력 운용권이 있어야 경계지대에 출입할 수 있고 영단을 손에 넣을 동안 무사들의 접근을 막을 수도 있다.
* * *
‘그럼 무슨 핑계를 대어야 할까.’
한두 가지 이유로는 저 의심 많은 노인이 남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리가 없으니.
‘최소 세 가지는 말해야겠지.’
“네. 소녀의 짧은 견식이지만 아뢰옵기로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말해 보라.”
“첫 번째로 곧 건기가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건기?”
세화의 말을 들은 노인의 눈매가 설핏 찌푸려졌다.
“건기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중강의 수위 때문입니다.”
그녀가 공손한 목소리로 고했다.
번뜩이는 제 살의를 들키지 않도록 눈을 내리깐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