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가 녹아내리는 시간은 마치 억겁과 같았다.
처형장을 지키던 혈족들이 대부분 떠나간 이후에도 그녀는 고통 속에 미쳐 가며 아주 천천히 죽어 갔다.
그녀의 최후를 구경하기 위해 몇몇 혈족만이 남아 눈, 코, 입, 귀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그녀를 보고 웃고 있었다.
독액이 섞인 검은 피는 그녀가 죽는 속도만큼이나 느리게 바닥 위에 퍼져 갔다.
그리고 그 피가 그녀의 뒤틀린 손에 닿았을 때였다.
파아앗!
창백한 손등이 빛을 내기 시작했다.
조용히, 천천히.
그녀의 피로 적셔진 곳 위로 바람이 스치며 땅이 흔들렸다.
이 장소에 있는 이들이 이변을 느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뭐, 뭐지?”
“뭐야, 이게!”
밀실에서 시작된 바람이 거대한 처형장을 뒤흔들었다.
스산하게 메아리치던 소리는 곧 굉음으로 바뀌어 바닥을 부수고 단상을 바스러뜨렸다.
콰아아아아아앙!!
빛마저 점멸시키는 광풍이 몰아쳤다.
콰앙 쾅!
귀를 찢을 듯한 폭음과 함께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번개처럼 빛이 튀었다. 우렛소리가 강풍을 타고 이곳저곳을 두드렸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달아나는 사람들의 비명이 메아리쳤다. 그들은 지옥 같은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필사적이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변은 주위에 있는 것을 무엇 하나 남겨 놓지 않고 쓸어 버리며 한참 동안 이어졌다.
이윽고 빛이 한 차례 거세게 발광하는 것을 끝으로, 찰나의 순간에 새까만 허공이 펼쳐졌다.
그 허공엔 모든 것이 사라져 있었다.
빛도 소리도 바람도.
거기 있던 이들마저도.
* * *
하늘에 닿을 듯한 거대한 벼랑 위. 달빛을 요요히 받는 바위 끝에 작은 정자가 있었다.
정자의 난간에 걸터앉은 검은 머리의 미남자는 초조한 표정이었다.
제 아래로 펼쳐진 까마득한 허공이 두렵지도 않은지 긴 다리를 늘어뜨린 채 때때로 손안의 백자 술잔을 빙빙 돌렸다.
일곱 가문 수장의 위치로 격상되어 이제는 신영이라 불리게 된 백가의 가주, 백기하였다.
감미로운 형태의 턱선 안쪽을 채운 그의 완벽한 이목구비는 놀랄 만큼 아름다웠고,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을 머금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남자의 시야 아래, 까마득한 절벽의 저편에는 백가의 일원들이 새로운 신영의 등극을 축하하며 함성을 지르는 중이었다.
그를 위해 세워 놓은 기름 횃대가 너른 평원 위에 별처럼 펼쳐져 있었다.
발밑으로 불의 강이 흐르는 듯한 광경은 눈을 홀릴 만큼 장관이었다.
그러나 표정이 일절 드러나지 않는 남자의 얼굴은 석상처럼 차갑기만 했다.
들고 있는 술잔을 주기적으로 힘주어 움켜쥐는 행동만이 그가 가진 초조함을 보여 주고 있었다.
“주세화 아가씨를 위시한 그녀의 가족이 모두 가주동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보고를 듣자마자 사정을 보지 말고 덮쳐 그녀와 가족들을 빼내 오라 명령했다.
허나 어찌 된 영문인지 이후 상황에 대한 보고가 오래도록 전해지지 않고 있었다.
‘내가 직접 갔어야 했어.’
마디가 선명한 손이 핏줄을 세우며 움켜쥐어졌다.
그때였다.
그가 가진 반지에서 붉은 빛이 새어 나왔다.
“!”
석상 같던 미남자 백기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충격이 역력한 표정으로 반지를 응시했다.
‘……그럴 리 없어.’
그가 연신 부정했다.
하나 어둠을 밝히는 선명한 붉은 빛은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아니야. 그저 어떤 이변일 뿐이겠지. 그럴 리 없어. 그녀가 죽다니, 그럴 리가 없잖아!’
싸늘한 얼굴로 표정을 굳히고 있던 여자의 환영이 그의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쓰러질 듯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있던 여자.
고귀한 피를 이었으면서도 넓은 초원의 야생화처럼 강인하고 포기를 모르던 여자.
데일 듯 뜨거운 그 면면에, 제 평생 처음으로 마음이 쓰이고 눈길이 가던 여자.
미추에 무감각해진 제 안목에도 몹시 아름다웠던 여자.
안쓰러운 어깨를 감싸 주고, 뭐든 해 주고 싶게 만들던 그 여자가.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이 붉은 빛의 원인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보내서는 안 됐어.’
몸을 웅크린 그가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가슴이 조각조각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잡았어야 했는데. 강제로 억류하는 한이 있어도 돌려보내지 말 것을.’
마음이 가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녀가 주가의 젊은 가주에게 얼마나 맹목적인지를 알기에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은 연모의 감정보다는 완벽하게 학습된 충성심과 더욱 닮아 있었으나 그렇다 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만은 바뀔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그가 비통하게 눈빛을 가라앉힐 때였다.
반지의 빛은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지 않고 오히려 점점 더 강하게 타올랐다.
‘……뭐지?’
유려한 눈매가 설핏 일그러졌다.
‘말했던 대로 소원을 빌었나 본데. 대체 뭘 빌었기에 이런 현상이…….’
그 생각이 마지막이었다.
곧 폭발하듯 터진 빛이 주변을 온통 집어삼켰다.
강렬한 붉은 빛은 모든 것을 제 안에서 뒤섞다가 한참 만에야 검은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게 시간이 되돌아갔다.
1장.
뎅- 뎅-.
언뜻 오시(午時)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 듯했다.
주가의 보물이자 환계의 상징인 신종이 깊고 맑은 소리를 내며 울린 것만 같은 착각.
“그래서 너는 이 제안을 어찌 생각하느냐.”
“가주!”
“입을 다물어라, 명윤. 내가 친히 너의 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정신이 들었을 때, 세화는 자신이 누군가의 앞에서 허리를 굽힌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응?’
그녀를 미치게 했던 극한의 고통은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어찌 된 일인지 아래를 향한 시선 안에 담기는 제 모습이 마지막 기억과 뭔가 달랐다.
깨끗한 치마와 새하얀 손.
‘뭐지? 난 처형장에서, 아니 그보다 난 천신주를 먹고 죽었는데? 왜 살아 있지?’
게다가 오랜 고문으로 만신창이였던 몸 역시도 원래대로 돌아와 있는 것이 아닌가.
오래전 뽑혀 나간 손톱이 여전히 손끝에 달려 있는 모습을 세화가 잠시 이상하게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주세화.”
누군가의 목소리에 그녀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곳엔 노쇠한 선대 가주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이십 년 전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마치 사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무감각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석상처럼 앉아 있는 노인.
깜짝 놀란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과 벽 하나를 가득 메운 거대한 창.
그 너머로 보이는 팥배나무가 가득한 풍경.
‘맙소사! 인간계잖아!’
이곳은, 인간계에 지어진 주가의 저택, 가주의 별실이었다.
이십 년 전, 그녀가 소가주 주경현의 혼약자로 결정되었던 그 별실.
그리고.
‘……아버지!’
그녀에 앞서 돌아가신 아버지가 선대 가주의 곁에 서 계셨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젊어진 모습으로.
‘……뭐지. 내가 환상을 보고 있는 건가.’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
그의 시선과 마주하자 눈 가장자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단번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환상이든 뭐든 그게 다 무슨 상관일까. 무탈하게 서서 그녀를 바라보는 아버지가 저기 계신데.
“주세화.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그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아버지를 지극한 마음을 담아 힘껏 안아 드리고만 싶었다.
저 노인만 없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건 다 뭐지? 아까 그 모든 일이 다 꿈이기라도 한 거야?’
꿈 같지는 않았다.
장기를 녹이던 극상의 고통과 슬픔으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던 절망들.
그 모든 순간의 감각이 여전히 놀랍도록 생생했으니까.
‘뭔진 모르겠지만 저 얼굴을 또 봐야 한다니.’
그녀의 눈빛이 일순 시리게 빛났다.
주가의 역대 가주들과 그녀의 혼약자였던 주경현도 문제였으나, 저 노인이야말로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노인이 자신의 영생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짓을 저지르지만 않았어도.
그리하여 주가를 나머지 여섯 가문의 공적으로 만들지만 않았어도.
‘내 가족들이 그리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진 않았을 텐데.’
죽기 전에 느꼈던 모든 격한 감정들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쳤다.
달려들어 저 노가주를 먼저 죽이고 싶은 살의가 팽배했다.
하지만 그 마음이야 어쨌건 간에.
‘……안 돼. 아버지가 옆에 계시니까.’
이 모든 게 실제가 아니라 해도. 어떻게 아버지를 또다시 위험하게 할 수 있을까.
세화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무례하게 가주를 응시하던 시선을 거둬들였다.
떨리는 목소리를 가장하며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직접 뵙게 된 신영의 광휘에 눈이 멀고 위엄에 짓눌리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소녀의 무례를 부디 엄벌해 주십시오.”
‘이 정도의 관용어구야 늘 듣고 있는 정도일 테지만.’
탈피도 하지 못한 어린애가 하는 말이니 이것보다 과해도 문제일 것이다.
한데 어쩐지 가주가 그녀의 말을 듣고도 대답이 없다.
‘더 높여 줘야 하나? 무릎이라도 꿇을까?’
그때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노인에게서 흘러나왔다.
“나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감정을 추스르거라.”
다행히 살아 계신 아버지를 보고 붉어졌던 눈시울이 말에 신빙성을 주었던 듯했다.
“그래서 내 제안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안? ……아. 그 제안을 지금 받은 거구나.’
그녀의 시선이 잠시 과거를 더듬으며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