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54)

차디찬 돌바닥을 구르는 제 어머니와 아버지, 오빠들의 잘린 머리. 붉은 피에 흠뻑 젖은 그것들을 발로 차 치워 버리는 집행인까지.

“아아아!”

주세화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가주 주경현과 그 옆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사연주를 향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이것이 가문의 일원으로 의무를 다한 대가인가? 앞으로 누가 너를 위해 의무를 다하려 할까!”

주경현의 입술이 성의 없이 열렸다.

“너는 너의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고, 나는 나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뿐이다.”

“가주의 의무가 가문의 충신들을 해하고 십이 년간 그 누구보다 이 가문의 존속과 번영에 기여한 자신의 혼약자를 살해하는 거라고?”

“하! 그딴 소리를 하고 있다니 정말 우습네요. 자기 입으로 혼약자라 칭하다니. 뻔뻔하기도 하지.”

상석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언니가 지금 뭔가를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데, 언니는 주가의 중요한 신분으로 백가에 머문 게 아니에요. 종전의 상징으로 백가를 위시한 여섯 가문에 공녀로 바쳐졌던 거죠.”

“……!”

표독스러운 얼굴의 사연주가 몸을 일으키며 대답했다.

“혼약이라니. 그곳에서 무슨 짓을 당했을 줄 알고. 아니지. 무슨 짓을 하며 적진에서 그리 오래 살아남았을 줄 알고 언니를 가모의 자리에 앉히죠? 그 당연한 사실을 혼자 몰랐다는 자체가 어이가 없네요.”

“……너,”

“나 같으면 백가에서 쫓겨나 이곳으로 돌아온 날, 부모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진했을 거예요. 아니면 지조를 지키기 위해 백가에 도착한 첫날 죽었던지. 한데도 살아서 그딴 소릴 입에 올리다니. 언니한텐 수치심이란 게 없나요?”

틈새 없이 가주인 주경현도 입을 열었다.

“게다가 이미 집행관이 너와 네 가족에게 내려진 형벌의 정당한 이유를 공표했다. 기억하지 못하는가.”

“그따위 조잡한 핑계들은 너희나 기억하겠지! 너희들이 오늘 왜 이 꼴이 됐는지를 이제야 알겠구나.”

그녀의 입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떻게 공녀라는 단어를 쓰지? 마치 주가가 오래전부터 여섯 가문의 지배를 받아 오기라도 한 양 아주 비굴하게. 배상은 그야말로 배상일 뿐이고, 가문의 세가 줄어들어 위태로워졌다 한들 적은 적일 뿐인데. 가주라는 자리에 앉아 그딴 노예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백가와 결탁하여 가문의 위상을 떨어뜨렸다니.”

십여 년에 걸쳐 계속된 백가의 공격을 일선에서 가장 용맹하게 막아 낸 것이 오늘 살해당한 그녀의 아버지였다.

어떤 혈족도, 심지어 원로들까지도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 그녀의 오라버니들과 아버지는 후계를 생각지 않고 참전하여 장수로서 무사들을 이끌었건만.

그녀 역시도 가주의 혼약자라는 이유로 의무를 다하기 위해 백가로 건너가 수치와 모멸로 범벅된 임무를 수행해 왔다.

그 대가가 이거라고?

“그러는 주경현 너야말로 지금껏 뭘 했지? 그 긴 시간 동안 백가가 무서워 모든 의무에서 달아나 숨어 있어 놓고도 할 말이 있다니, 낯짝이 두꺼워도 너무 두껍구나. 그런 주제에 충신의 가족을 학살하고 오명을 뒤집어씌워?”

팔걸이를 움켜쥔 주경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를 사리문 그가 차갑게 명령했다.

“말이 많군. 듣기 싫으니 당장 형을 집행하라.”

“오늘날 주가가 이 꼴이 된 것이 누구 때문인지. 태고부터 지켜 온 일곱 가문의 수장 자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치욕을 맞이한 것이 누구 때문인지, 다른 주가 혈족들이 모를 거라 생각해?”

주세화가 소리 높여 웃었다.

“그래. 그게 아니라는 건 너 자신도 잘 알겠지.”

주경현의 턱이 단단히 굳어졌다.

“넌 그저 네 탓만은 아닌 척하고 싶은 거니까. 나태하고 방만했던 역대 가주와 종주들의 잘못이 아닌 척. 비굴하게 달아났던 자신 때문이 아닌 척! 무고한 희생자를 만들어서라도 뻔뻔한 얼굴로 나 때문은 아니었다, 자위라도 해야 하니까!”

“너!!”

팔걸이를 강하게 내리친 가주 주경현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일어섰다.

감히!

감히 제 앞에서 저따위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됐다.

비록 모든 혈족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해도!

주가가 일곱 가문의 수장이라는 위엄을 잃고, 신영의 호칭을 빼앗기고, 가주가 가주의 권위를 잃는 오늘이 되어서도.

누구도 감히 주가의 위대한 역사와 그를 지켜 낸 역대 가주들의 위상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관용의 은혜를 모르고 발칙한 세 치 혀를 놀리는구나.”

주경현의 입매가 강하게 맞물렸다. 터질 것처럼 세게 쥐어진 주먹 위로 핏줄이 섰다.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군.”

“빨리 죽이세요, 가주. 혀를 뽑으시든가요.”

“그래. 너에게 단두의 형은 너무 가볍지. 여봐라! 그대들을 위해 헌신했다 외치는 이 몰염치한 배신자를 위해 천신주를 가져오라!”

그 말에 처형장을 둘러싸고 있던 원로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천신주라니…….

그것은 천천히 장기를 녹이고 종래엔 천 가닥으로 신체를 조각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죽게 하는 극독이었다.

그 이름을 듣고 사연주 혼자 소리 높여 웃었다.

핏발이 선 눈을 한 채 주경현이 긴 단상에서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밤을 한 자락 베어 내어 실을 자은 듯한 머리카락.

언제까지라도 마주 보고 싶었던 깊은 눈과 더없이 수려한 이목구비.

귀를 울리는 사연주의 웃음소리를 기억하며, 주세화는 한때 미칠 듯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주경현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저 얼굴을 잊으면 안 되니까.

다시 태어난다 해도 기억해 내 반드시 복수해야 하니까.

그녀의 가까이로 다가온 주경현이 결박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담긴 분노가 그녀를 조금은 기쁘게 했다.

“죄를 시인하고 뉘우쳐. 잘못했다고 이 자리에서 큰 소리로 고하고 내 발밑에서 빌어. 그러면 천신주가 아니라 네 가족과 같은 방법으로 죽게 해 주마.”

“지옥에나 떨어져, 이 소인배야.”

“주세화!”

“내세가 있다면 반드시 너희를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죽일 거야.”

주세화가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을 기억하며 속삭였다.

“너와 원로들. 몸을 사리며 내 가족을 사지로 밀어 넣은 혈족들. 네 옆에 앉아 있는 저 아름다운 사촌 동생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 처형에 관련된 모두, 내게서 일말의 자비도 기대하지 말아야 할 거다.”

“말이 통하지 않는군.”

그사이 빠르게 다가온 누군가가 주경현의 귓가에 무언가를 보고했다.

“백가의…… 단이 지금…… 신영의 명을 받고 ……배신자를…….”

“누가 신영이냐, 누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린 주경현이 말을 전한 자의 뺨을 힘껏 내리쳤다.

“감히 주가의 혈족들이 그 더러운 역도를 신영이라 부르다니!”

주가 가주의 피에만 허락되던 그 호칭을!

“천신주는 아직인가!”

헐레벌떡 달려온 집행관이 주경현에게 쟁반을 내밀었다.

쟁반 위 작은 술잔에는 검은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입에다 부어 넣기 전에 마셔라!”

반항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있던 무사 중 하나가 결박을 풀었다. 그러나 겨우 두 손이 자유로워졌을 뿐 몸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체념한 척 고개를 숙이고 팔을 뻗었다. 그리고 술잔을 받아드는 척하며 강하게 쟁반을 쳤다.

쾅!

“가주!”

약은 의도대로 주경현 쪽으로 흩뿌려졌지만, 이 최후의 발악 역시도 그를 지키는 무인들 때문에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주경현이 노기를 그대로 드러내며 집행관에게 소리쳤다.

“부어 넣어라!”

“너희를! 꼭 죽일 거다. 너희가 내 가족에게 그러했듯 이 혈족들 중 누구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누가 저 입을 막아라!”

그 말과 동시에 그녀의 어깨를 잡고 있던 무사 하나가 강하게 주세화의 뺨을 쳤다.

퍽!

이가 빠지고 입안이 온통 찢어졌다.

다시 한번 사연주의 긴 웃음소리가 처형장 안을 맴돌았다.

주세화는 고통 속에서도 눈을 감지 않고 증오스러운 원수들을 노려보았다.

그사이 집행관이 서둘러 천신주를 한 잔 더 가지고 달려왔다.

몸을 짓누르던 무인들이 강제로 그녀의 입을 벌리고 틈새로 극독을 부어 넣었다.

“……!”

주세화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검은 액체가 혀에 닿은 순간부터 걷잡을 수 없이 강렬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오 년간 모진 고문을 받아 낸 그녀조차도 난생처음 겪어 보는 고통이었다.

비참하게 바닥을 구를지언정 비명을 지르고 싶지는 않아, 그녀는 제 혀를 씹어 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참아야 했다.

주경현이 차게 웃었다.

“꼴좋군. 여봐라! 배신자 무리의 목을 광장에 효시하고 몸뚱이는 갈기갈기 찢어 모두 개 우리에 던져 넣어라!”

하지만 그녀의 노력도 거기까지였다.

돌아서는 저 원수들의 얼굴을 계속 보고 싶은데.

가문을 위해 끝까지 몸 바친 아버지와 오라버니들, 그들을 모두 전장에 보내 놓고도 제대로 마음 편히 연락 한 번 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처형을 구경하기 위해 모인 주가 일원들.

그들을 돕지 않은 것뿐 아니라 오히려 제 딸을 가주의 품 안으로 집어넣기 위해 그녀의 자리를 빼앗는데 급급했던 방계 친척들.

이 모든 혈족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싶은데, 뼈를 헤집고 살을 깎아 내는 듯한 고통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벌레처럼 바닥을 기며 모든 이를 원망했다.

사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가장 원망스러운 사람은 그녀 자신이라는 걸.

“언니 때문에 죽는 거야. 언니네 가족 모두는.”

그래서 그 말이 이토록 아프다는 걸.

시체처럼 창백하게 갈라진 그녀의 입술이 조금 달싹였다.

“……다시 ……돌아간다면.”

내세가 있다면.

내게 부디 단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진다면.

다신 저 남자를 마음에 담지 않으리라.

그것만으로도 분명 많은 것이 바뀔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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