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언니. 난 언니가 너무 좋아.”
“혼인? 싫어. 언니만 있으면 난 아무도 필요 없어.”
“언니도 혼인하지 않고 계속 나랑 살았으면 좋겠다.”
늘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가 지금은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그게 무슨.”
황망한 얼굴의 주세화가 손을 뻗었다.
사연주의 발끝을 붙잡으려 했으나 그 전에 새빨간 신발이 그 손을 짓이기며 짓밟았다.
주세화는 통증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연주야. 그, 그게 무슨 말이야. 나야. 네 언니 주세화.”
사연주의 얼굴을 바라보며 더듬더듬 목소리를 냈다.
“연주야. 연주야. 나라고.”
하지만 그러면서도, 뭔가를 알아차리고 있었다.
사연주가 입고 있는 가모의 옷에서. 그녀가 꺼내 놓는 말에서.
제 가족 모두를 위험하게 만든 이가 누구인지.
자신을 이 더러운 감옥 안에 오 년이나 처박아 놓은 이가 누구인지. 믿어지지 않는 진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일그러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사연주가 깔깔 웃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버린 듯한 그 사촌 동생을 주세화가 아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언제 어디서나 항상 제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 줬던 사촌 동생이 아니던가. 그런데.
“너, ……였다고?”
“응.”
“지금껏, 네가……?”
“응, 나야. 그런데 언니 정말 몰랐어?”
“…….”
“뭔가 이상하다고 정말 생각 못 했어? 그건 아니잖아.”
사연주가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언니는 그저 믿고 싶지 않았던 거지. 내가 언니를 배신했다는 걸. 그렇게 생각하면 딱히 내 탓은 아니야. 언니가 멍청하고 미련해서 이런 꼴이 된 거지.”
“연, 주야…….”
“아, 정말 기뻐. 난 그동안 언니가 미워서 견딜 수 없었거든.”
기다란 손톱이 주세화의 얼굴 위를 긁었다. 날카롭게 다듬어진 손톱이 피부를 가르자 붉은 피가 질금 배어났다.
“계속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너보다 내가 더 아름답고 내가 더 뛰어난데. 그런데도 왜 너만 주씨고 난 사씨여야 하지? 왜 너만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고 나는 아닌 건데.”
도대체 이 사촌 언니와 내가 다른 게 뭐길래. 그깟 피의 정통성이 대체 뭐라고.
태생에 대한 억울함을 계속 곱씹어 왔던 사연주가 지금까지의 인생 중 가장 기쁘고 환하게 웃으며 속삭였다.
“너도 그냥 부모를 잘 만난 것뿐이잖아. 그러면서 나한테 몸가짐을 바르게 하라느니 부정한 연회에는 참석하지 말라느니, 재수 없게 훈계하며 잘난 척하니 이런 꼴이 되는 거지.”
“…….”
“언니 때문에 죽는 거야. 언니네 가족 모두는.”
“…….”
“그래도 언니 덕분에 얻은 것이 제법 있어서 고맙긴 해.”
사연주가 제 몸 안에 들끓는 힘을 과시하며 발현시켰다.
“이 영력 보여? 언니가 요청했다는 얘기만 하면 언니네 부모님도, 두 오라버니들도 뭐든 아끼지 않고 내게 내어 주셨거든. 내 몸에 가득 찬 이 영력들. 이것도 다 언니 부모님과 오라버니들이 준 거야.”
등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고 맑은 진홍색 불꽃이 사연주의 주위로 퍼져 나갔다.
“멍청한 것도 정도가 있지. 언니가 도와달라고 했다는 말에 자기들의 원신까지 깎아 가며 영력을 떼어 주더라니까.”
“…….”
높은 웃음소리가 밀실 안을 낭랑하게 울리는 동안에도 주세화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명백함에도. 더없이 명백함에도 어떻게 이 아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있는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연주야.”
주세화가 필사적으로 말을 이었다.
“내, 내가 네 마음을 알아주지 못했던 건 미안해. 널 훈계하듯 꾸짖었던 것도. 하지만 그건 다 내 잘못이고 부모님은 죄가 없으시잖아. 두 오라버니도 그래. 오라버니들은 우리와 친혈육도 아닌데. 그런데 같이 죽는다니.”
시체처럼 파리한 안색을 한 그녀가 울면서 빌었다.
“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나만 죽이고 가족들은, 가족들의 목숨만은 살려 줘. 응? 그분들은 너에게 잘 대해 주셨잖아.”
“…….”
“제발. 제발 이렇게 빌게. 나야 백가에 다녀왔으니 첩자로 몰릴 수 있다 하더라도 그분들은 가문을 열심히 지키신 게 다잖아. 사람들을 구하려고 애쓰신 게 다잖아. 응?”
“그건 안 될 말이지.”
듣고 있던 사연주가 애석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동안 언니네 가족들은 너무 많은 것을 누렸잖아. 다 같은 신영(神令)의 피를 이었는데 너희만 그 피가 아주 약간 더 진하다고 말이야. 안 그래?”
“연, 주야.”
“그리고 어차피, 언니의 부모님과 두 오라버니를 엮어서 백가와의 내통 증거를 만든 사람도 나야.”
“……뭐?”
“그런 표정 할 필요 없어. 가주께서 원하신 일이었거든. 언니도 가주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하는 사람이었으니 날 이해하겠지.”
“…….”
“얼굴 봐. 가주가 시키신 일이라는 게 그렇게 충격이었어?”
“……너.”
“저런, 딱하지. 하지만 이제 알겠지. 이곳엔 본래부터 네 자리가 없었다는 걸.”
사연주의 긴 손톱이 다시 한번 주세화의 젖은 얼굴 위를 부드럽게 쓸었다.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추고, 다정하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니 이제 그만 내게 모두 주고 떠나. 좋은 곳으로 가라고. 여기서 이렇게 고통받을 필요 없잖아.”
타지에서 생활하는 그녀의 안위를 진심으로 염려해 주는 듯했던, 그때의 그 목소리였다.
* * *
간수들은 움직이기도 힘들어하는 그녀를 줄로 묶어 질질 끌고 나갔다.
굴욕적인 모습으로 양팔을 붙잡힌 채 끌려 나가면서 주세화는 이 지옥 같은 상황이 그저 한 편의 악몽이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눈을 뜨면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백가는 주가로 쳐들어온 적이 없고, 아버지와 오라버니들도 전장에 나간 적 없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서 웃음꽃을 피우며.
아버지는 가문의 존경받는 원로로, 오라버니들은 주목받는 신진 무장들로. 어머니는 현숙한 장부인으로.
자신 역시도 그런 제 가족들을 자랑스러워하며 뿌듯한 하루를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비록 진짜 현실은 이런 끔찍한 모습일지라도.
주가의 거대한 처형장 바깥을 가문의 장수들이 벌레 한 마리 날아들지 못할 정도로 철통처럼 막아서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들려진 잘 벼려진 창들이 스산하게 번뜩였다.
“죄인을 들이라!”
“들이라!”
그 처형장 안에서.
주세화의 아버지인 주가원로 주명윤과 그의 처 천수아는 몇 년이나 보지 못했던 딸이 반병신이 되어 끌려 들어오는 것을 보며 눈가를 붉혔다.
“처형을 시작한다!”
“시작한다!”
집행관의 목소리에 맞춰 원로들이 발을 구르며 처형을 외쳤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
주명윤과 천수아를 억압한 손들이 그들을 가주가 앉은 상석 앞까지 끌고 와 굴욕적인 자세로 꿇어 앉혔다.
양옆에 도열해 자신들을 노려보는 종주들의 사이에서도 그들은 당당히 고개를 들어 올렸으나, 처형인이 곧장 다가와 그들의 목을 거친 손놀림으로 눌렀다.
시리게 벼려진 검 아래에 두 목이 놓였다.
“어머니! 아버지! 안 돼요!! 안 돼요!”
만신창이의 몸을 하고서도 주세화가 제 부모를 보며 울부짖었다.
‘……한평생 가문을 위해 몸 바쳐 충성한 결과가 이것인가.’
이를 악문 주명윤의 시선이 먼 곳에 있는 가주의 얼굴을 향해 찢을 듯 날아갔다.
젊은 가주 주경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명윤의 가족들을 무료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뻔뻔한 그 모습에 더없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명윤은 전장의 형세에 밝은 무인. 이미 모든 노력과 분노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다음 차례가 될 아이들만은…….’
결국 명윤은 가주에게 악을 쓰는 대신 시선을 돌려, 자신처럼 결박되어 있는 자식들의 얼굴을 면면이 눈에 담았다.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것을 자신이 먼저 보여야 했다.
“부인. 미안하오.”
“그런 말 마세요. 당신과 함께한 모든 나날이 행복하였습니다.”
명윤의 부인 천수아 역시 같은 생각인 듯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위한 소원 하나를 간절히 빌었다.
부디 저 아이들이 고통 없이 한순간에 그들이 가는 곳으로 올 수 있기를…….
“집행하라.”
“집행!”
“집행하라!”
“참수하라!”
“가문의 반역자를 참수하라!”
“참수하라!”
거대한 공간에 일렬로 도열하고 선 원로들이 일제히 발을 구르며 목소리를 높였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칼날이 삽시간에 두 사람의 목 위로 떨어졌다.
“안 돼!!!”
마음 같아서는 제 몸을 날려서라도 부모님의 처형을 막고 싶었으나, 결박된 주세화의 몸은 처형장을 지키는 무인들에 의해 빈틈없이 바닥으로 짓눌려져 있었다.
눈조차 제대로 감지 못하신 두 부모님의 목이 붉은 피가 번져 가는 바닥을 굴렀다.
“!!”
그러나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을 새도 없이 다음엔 그녀의 오빠들의 차례였다.
“주경현! 그들은 내 친오라비들이 아니야. 알지 않나. 그들은 상관없잖아!”
그녀의 두 오라비는 부친의 죽은 친우의 자식들을 거둔 것이었다.
조작된 배신의 증거는 아버지와 제 것밖에는 없었으니 저 두 오라비라도 이 지옥의 연좌를 벗어난다면 좋으련만.
우환을 남기지 않기로 결심한 듯한 혈족들은 그 필사적인 외침에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의 첫째 오빠 주가한만이 제 부모처럼 의연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너는 내 동생이고 돌아가신 두 분은 우리의 또 하나의 부모님이시다! 우린 기꺼이 운명을 함께할 것이니 그런 말은 말아라!”
둘째 오빠 주가윤은 눈물로 범벅된 동생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속삭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할 수 있다면 꼭 살아남아. 어떻게든. ……정말로 백가와 결탁해서라도.’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먼저 떠난 부모의 피로 흠뻑 젖은 바닥에 꿇어 앉혀지자마자, 그들 역시 처형인의 칼날 아래 빠르게 목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