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54)

서장.

세상엔 인간이 사는 인계, 환족이 사는 환계, 죽은 자들의 명계. 이렇게 삼계(三界)가 존재했다.

환족은 인간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훨씬 아름다웠다.

몸 안에 영력을 쌓아 막대한 수명을 누렸고 짐승의 모습으로도 변화할 수 있었다.

때때로 인간계로 넘어와 거대한 기적을 행하기도 했는데, 인간들은 이들을 신수(神獸)라 불렀다.

* * *

환계에는 주, 천, 백, 장, 강, 진, 여의 일곱 가문이 종족에 따라 나뉘어 있었다.

그중 제일은 주가(主家)였다.

주가는 환계를 태초부터 지배해온 용의 핏줄이었다.

천리안을 비롯해 각종 강력한 능력을 사용할 수 있었고, 공정하고 자애로운 성품으로 환계를 다스려 모든 환족이 주가를 따랐다.

주가를 위시한 환족들은 이런 날들이 영원히 이어질 줄 알았다.

* * *

끼이이익.

철문이 열리는 소리가 더러운 밀실 속에서 크게 울렸다. 하지만 지저분한 바닥에 누워 있는 여자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오래도록 밀실에서 고문을 당한 여자의 몸에는 손발톱이 남아 있지 않았다.

늘 공들여 가꿔온 흑단빛 머리카락도 지금은 피와 오물에 절어있었다.

항상 우아하고 반듯했던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밀실 안으로 들어온 이가 시체처럼 창백한 그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명령했다.

“영력을 불어 넣어.”

명령에 따라 다가간 간수들이 쓰러진 여자에게 영력을 불어 넣었다.

몸속에 힘이 차오르자 힘없이 닫혀있던 여자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지켜보던 이의 입술이 비죽 위로 솟았다.

“너흰 나가 봐. 아, 그 전에 얼음물 한 동이 가져오고.”

자신만만한 얼굴로 그렇게 명령하는 이의 의복은 더없이 화려했다.

주가의 상징색인 새빨간 비단 위로 신룡의 모습이 금사로 수 놓여 있었다.

온 환계를 통틀어 단 한 사람. 주가의 가모만 입을 수 있는 예복이었다.

간수들이 커다란 물동이에 물을 가득 채워 돌아왔다.

“뿌려.”

촤아아악!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의 몸 위를 뒤덮었다.

강제로 주입된 영력에 의해 정신이 든 주세화가 바짝 마른 몸을 떨며 깨어났다.

“나가.”

간수들이 서둘러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멀리서 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도 이 감옥 안에 남지 않은 것을 확인한 사연주가 붉게 칠한 입술을 열었다.

“언니.”

“……연, 연주니?”

주세화의 새까만 눈동자가 허공을 정신없이 헤집었다.

지독하게 고문을 반복하던 이들이 결국 원신마저 파괴해버렸기에 그녀는 오감이 많이 상실된 채였다.

그나마도 조금 전 간수들이 강제로 불어 넣은 영력 덕분에 간신히 흐리게 듣고 말할 수 있게 된 상태였고.

“다른 건 몰라도 눈이 안 보이면 안 되지.”

소매 속에서 무언가를 꺼낸 사연주가 그것을 주세화의 이마에 대고 눌렀다.

영력을 둥근 구슬의 형태로 실체화시킨 영단이었다.

붉고 작은 구슬이 지저분한 살갗 위에서 녹듯 사라졌다.

그것과 동시에 주세화의 시야가 점차 선명해졌다.

“깼어?”

제 앞에 있는 이를 확인한 주세화가 깜짝 놀라며 기어왔다.

“연주야, 네가, 네가 왔구나.”

사연주에게로 필사적으로 손을 뻗으며 물었다.

“연주야, 아버지와 어머니는? 두 분은 지금 어떻게 되셨어? 두 오라버니는? 모두 살아는 계셔?”

잔뜩 쉰 목소리가 혈색을 잃은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더러워진 주세화의 얼굴이 그녀와 누구보다 가까웠던 사촌 동생을 보며 젖어 들었다.

“연주야. 연주야. 나 좀 꺼내 줘. 나 좀 여기서 꺼내 줘.”

더 참지 못한 사연주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연, 연주야?”

“이렇게 즐거울 수가 있나. 좋을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좋을 줄은.”

새빨간 연지를 바른 입꼬리가 신음처럼 내뱉었다.

“이 얼굴을 정말 보고 싶었지. 아. 정말로. 드디어. 드디어 내 소원이 이루어졌어. 이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면 이런 더러운 곳까지 내려올 가치가 있고말고.”

또각또각. 맑은 발소리가 좁은 밀실 안을 선명히 울리며 주세화에게 가까워졌다.

“언닌 이런 감옥에서 대체 어떻게 오 년이나 버틴 거야? 정말 놀랍다. 지하 감옥 생활이 너무 잘 맞는 것 아냐? 나 같으면 힘들어서라도 빨리 죽었을 텐데.”

“…….”

“뭐, 그것도 오늘로 끝일 테지만.”

이 밀실엔 간수들이 때때로 가져오는 등불 외엔 빛 한 점 들지 않았다.

어둡고 더러운 밀실. 냄새나는 바닥 위에 쓰러져 있는 사촌 언니. 젖은 얼굴과 멍하니 벌어진 입. 황망한 저 표정과 시선.

그 모든 것을 더없이 황홀하게 응시한 사연주가 덧붙였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어떻게 되셨냐고? 두 오라버니는 어떠냐고? 몰랐어? 언니네 가족 모두 오늘 죽을 거야. 모든 혈족들의 앞에서 개처럼 끌려 나온 다음에 목이 잘려서. 그래도 참 다행이지 않아? 가족이 모두 함께 가는 거니까.”

“……연, 주야.”

“그런 얼굴로 볼 것 없어. 언니는 언제 되든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으니까.”

수많은 장신구로 치장된 상체가 천천히 굽혀 들었다.

주세화의 흐릿한 시선 속에 제 마지막 얼굴을 새겨 넣으려는 듯 바짝 다가가 두 눈을 선명히 휘며 웃었다.

환희로 가득 찬 목소리가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그러니 차라리 백가에서 죽었으면 좋았잖아. 내가 그걸 위해 일부러 언닐 거기로 보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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