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키리아 폰 메데이아.
제국에 나타난 새로운 공작의 이름이었다.
황실에서는 마계의 문이 사라지고, 대부분의 마물이 사라졌음을 공표했다.
사람들은 끔찍했던 마계의 문이 드디어 사라졌다는 사실에 열광했다.
열광은 이를 가능하게 한 사람에게 고스란히 옮겨갔다.
키리아가 작위를 수여받는 순간 함성이 터졌다.
“키리아! 키리아!”
키리아는 애써 진지해지려 했지만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환호하는 사람들 속에서 마이언과 리안, 그리고 릴리를 비롯해 북부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공작성 식구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과 한 번씩 눈을 마주친 키리아는 퇴장하며 테라스 커튼 뒤로 들어왔다.
그곳에 만면에 흐뭇한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로하넨이 보였다.
“로하넨!”
키리아가 그를 반기며 쪼르르 가까이 다가갔다.
“고생하셨습니다, 키리아 양. 아니, 메데이아 공작 각하.”
“으, 갑자기 너무 오그라드는데요!”
“하하, 익숙해지셔야죠.”
“가울은요?”
“오늘 같은 날 마족이 모습을 보이면 메데이아 공작님께 안 좋을 거라면서….”
안 왔나?
키리아가 내심 실망하려던 참이었다.
로하넨이 싱긋 웃으며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그러자 덩치 큰 검은 개가 드러났다.
“굳이 이런 모습으로 따라오더군요.”
삐죽. 가울이 눈을 세모꼴로 떴다.
<인간이 바글바글한 곳은 절대 오고 싶지 않았지만… 풀떼기가 귀족 작위를 받는다는데 친구로서 내가 안 와볼 순 없잖냐!>
키리아는 웃음을 터뜨리며 가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맞아. 네가 와줘서 기뻐.”
<흐, 흥. 당연히 기쁘겠지. 근데 누가 머리를 쓰다듬으래. 손 안 떼냐?>
틱틱대는 가울의 꼬리가 바람개비처럼 힘차게 돌아갔다.
히히 웃고 있던 키리아가 문득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그런데 공작님은요?”
“아…. 주군 말씀이죠.”
로하넨이 웃음을 참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아주 잠깐 뿐이었다.
그는 대답하기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요즘 마음이 급한 일이 있으셔서요.”
“마음이 급한 일…? 뭐기에 이런 기념식에 와 보지도 않고요.”
마계의 문이 사라진 것을 기념해 황제는 이에 공로를 세운 모든 이들을 언급했다.
덕분에 키리아를 비롯해 대신녀와 마탑주를 연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려오고 있었다.
오늘 참석했다면 인지도를 더욱 높일 수 있었는데 말이야.
게다가 나한테는 정말 기념할 만한 날인데….
키리아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로하넨이 얼른 달래듯 말했다.
“물론 주군께서도 키리아 양이 작위를 수여받으신 것을 축하한다고 하셨습니다. 조만간 선물을 보낼 거라면서요.”
“…뭐, 알았어요.”
내심 많이 서운했지만 여기까지 와 준 로하넨과 가울에게 티내고 싶지는 않았다.
키리아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화제를 돌렸다.
도대체 얼마나 마음이 급한 일인지 나중에 꼭 들어봐야겠다고 결심하며.
º º º
키리아 영애에서 메데이아 공작이 된 후 키리아는 부쩍 바빠졌다.
마계의 문이 사라진 사건은 제국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큰 관심을 갖는 일이었다.
거기다 황실과 연이 없는 귀족 영애가 무려 공작이 되었으니 그 호기심은 더욱 컸다.
덕분에 제국 내에서도 키리아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제국의 잡지와 신문이라면 키리아를 다루지 않은 곳이 없었다.
[독점 인터뷰: 스타 독초 약제사 키리아 폰 메데이아]
[보프스 선정, 올해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키리아 폰 메데이아]
[‘마법학교의 아리키’ VIP팬 사인회에 메데이아 공작 참여… 암표조차 없어서 못 사]
또한 키리아를 표지 모델로 하는 잡지도 속속들이 나오면서, 키리아의 사실적인 표지 그림을 수집하는 수집가들도 나타났다.
잡지를 펼치면 의약품 브랜드 메데이아의 전면광고와, 전속모델 릴리가 가장 눈에 띄었다.
이렇다보니 키리아에 대해 더욱 자극적인 기사를 원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키리아에게 청혼하는 남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특히 두드러졌다.
“으윽, 아가씨….”
“조앤?! 무슨 일이야?”
복도를 지나가던 키리아는 발밑에서 들리는 신음소리에 깜짝 놀랐다.
호텔에서 자주 보이는 큰 트롤리가 넘어져 있었고, 그 바람에 쏟아진 온갖 선물상자와 꽃다발에 조앤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키리아는 조앤을 끄집어냈다.
“휴우, 감사합니다. 저걸 운반하다가 그만 짐 때문에 넘어졌지 뭐예요.”
“오늘도 많네….”
“너무 많죠….”
조앤의 눈이 흐릿해졌다.
아쉬워하는 앨마를 뒤로 하고, 키리아의 전속 시녀이자 조수, 그리고 작가라는 본분을 위해 키리아의 곁으로 거처를 옮긴 그녀였다.
조앤은 마물들의 조공을 관리하던 실력을 살려 이번엔 키리아의 청혼자들의 선물을 관리하고 있었다.
더불어 반갑지 않은 선물의 처리도.
널브러진 선물을 줍던 키리아가 꽃다발을 보고 인상을 구겼다.
“…또 왔네.”
“어머. 죄송해요. 제가 다 못 치웠나 봐요.”
키리아는 불쾌한 얼굴로 꽃다발을 꽉 움켜잡고 바닥으로 퍽퍽 내려쳤다.
“스토커가 보낸 꽃 따위 필요 없다고. 으으! 더러워.”
키리아에겐 혐오스럽지만 가십지 기사들에게는 맛있는 소재.
바로 스토커였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스토커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지칭하기엔 이 청혼자는 고위 귀족에다 사교계에서 제법 인기까지 좋은 유망한 청년이었으니까.
“얼굴은 멀쩡한 게 왜 싫다는 데도 자꾸 들러붙는 거야? 가는 곳마다 얼굴을 비치니까 미치겠어, 정말. 뭣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이 자식하고 사귀는 줄 알잖아.”
“허우대는 정말 멀쩡하던데요. 그러니까 클로버필드 백작님께서도 그쪽 가문과 사업을 시작하셨겠죠….”
“하아. 그거 때문에 아버지한텐 말도 못 하겠고.”
어떻게든 내 선에서 처리를 해야 큰 일로 번지지 않는다.
그래서 점점 강하게 거부해봤지만 스토커에겐 도전의식만 불태우는 모양이었다.
“어머. 꽃다발에서 카드가 떨어졌어요.”
카드를 펼쳐 본 조앤이 내용을 읽었다.
“제 진심이 얼마나 깊은지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밤 7시, 로즈 강변의 골든플라워 레스토랑으로 나와 주십시오. 단 둘만의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미친놈.”
“태울까요?”
“응. 아니다, 잠깐만.”
“아 그렇죠. 먼저 찢으셔야죠.”
“그게 아니라, 생각이 바뀌었어. 거기 나가봐야겠어.”
“네? 진심이세요?”
“응. 그리고 몰래 기자들한테 정보 흘려.”
키리아의 보랏빛 눈이 활활 불타올랐다.
“스토커라는 걸 다 인정하게 한 다음 싸대기를 날려버리게.”
º º º
내 기필코 오늘 끝장을 본다!
각오한 키리아는 스토커가 말한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화가 가득 났지만 애써 덤덤한 표정도 했다.
스토커인 걸 실토하게 하려면 장단에 어울려주는 시늉을 해야 했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몸매가 돋보이는 슬림한 드레스까지 화려하게 갖춰 입었다.
‘만일을 위한 호신용 독약은 물론 챙겼지.’
단둘만 보자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레스토랑 안에는 손님이 없었다.
‘대신 혼자서 징그러운 꽃다발을 들고 날 기다리고 있겠지.’
그런 예상을 하며 들어섰는데….
“엥?”
이게 무슨 꼴이야?
‘레스토랑 안에서 칼부림이라도 났었나?’
귀족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던 고급스러운 내부가 엉망진창이었다.
한쪽에는 꽃다발이 짓밟혀 있었고, 또 다른 한쪽에는….
“맙소사.”
스토커가 3단 케이크에 얼굴을 처박고 울고 있었다.
그는 손발에 힘이 안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케이크 근처로 다가간 키리아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
뭐 하나 성한 게 없는 실내에서 유독 얌전히 놓인 술병과 술잔.
거의 바닥을 드러낸 술잔을 자세히 보니 침전된 하얀 가루가 보였다.
키리아는 기가 막혔다.
“…나한테 약 먹이려 그랬어?”
“흐윽, 흐으으윽….”
스토커는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는 상태였다.
“넌 인류를 위해 박멸돼라, 진짜.”
쏘아붙인 키리아는 술병 옆에서 또 다른 카드를 발견했다.
열어보니 단정하고도 정갈한 글씨체가 보였다.
[곧 성기사들이 나타나 범죄자를 데려갈 겁니다. 그리고 과거에 묻혔던 사소한 먼지까지 털어내겠죠. 그 전에 밖으로 나와 오른쪽으로 스무 걸음 오세요.]
“응?”
어리둥절했지만 호기심이 더욱 컸다.
키리아는 약이 남은 술잔을 스토커의 손에 들려준 후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밖에 있는 기자들이 명문가 외동아들의 불법 약물 복용 현장을 고스란히 볼 수 있도록.
º º º
거리로 나온 키리아는 카드에서 말한 대로 오른쪽으로 스무 걸음을 걸었다.
“열아홉…. 스물.”
고개를 들자 눈앞에 상아와 황금으로 장식한 마차가 있었다.
군청색의 푸른 어둠이 깔린 거리에서, 가로등에 비친 그 마차는 유독 아름답게 반짝였다.
“여기도 카드가 있네?”
키리아는 마차 문틈에 끼워진 카드를 발견했다.
[마차가 멈추면 붉은 꽃과 흰 꽃을 번갈아 지나 네 번 두드리세요.]
“음…? 점점 수수께끼 같은데.”
재미있어하면서 키리아는 마차에 올랐다. 이 글씨체의 주인이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마부가 느긋이 마차를 몰았고, 곧 흰 말의 말발굽 소리가 밤거리를 울렸다.
다각다각.
마차의 창밖 풍경이 점점 익숙한 것으로 바뀌어갔다.
“어? 여긴?”
가게가 있는 에메랄드 가든과 인접한 최고급 주거 지역이었다.
게다가 마차가 멈춘 곳은,
“맙소사.”
최고급 주거 지역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안전하며 비싸기로 유명한 초호화 대저택이잖아?
여길 어떻게 모르겠어?
‘귀족들조차 부담스러운 곳이라 나도 손가락만 빨면서 포기했는걸!’
키리아는 마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길 양옆의 희고 붉은 장미꽃들을 지나 저택의 현관 앞에 당도했다.
똑똑똑똑.
네 번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얌전한 콧수염을 기른 노신사가 키리아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네, 네?”
“오늘부터 당신께서 이 저택의 주인이십니다.”
“아뇨, 그게 무슨…?”
“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집사의 말에 따라 후원으로 향했다.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후원의 한가운데, 한 남자가 아름드리나무 밑에 서 있었다.
그는 키리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몸을 돌려 그녀와 마주봤다.
키리아는 놀라지 않았다.
그야, 내가 공작님의 글씨를 못 알아볼 리 없잖아.
잔물결이 일렁이는 듯한 제논의 금빛 눈동자가 키리아를 바라봤다.
“그대에게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 전에 내 목줄을 끊어내야만 했습니다.”
“목줄이요?”
“왕의 맹세라는 목줄이죠. 힘의 균형이 잡히니 의외로 쉽게 풀렸습니다. 다 그대 덕분입니다.”
“…그럼 왜 나 축하해주러 안 왔어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담백하게 말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서운함이 가득 묻어 나왔다.
미안한 표정을 지은 제논이 돌연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마치 충성을 바치는 기사처럼.
“공작님?”
“미안합니다. 그대에게 이 모든 걸 주고 싶어서요.”
“모든… 것이요?”
키리아의 손끝을 두 손으로 잡은 채 제논이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대에게 달라붙으려는 오물의 청소부터 그대의 것이 되어야만 하는 집. 그리고….”
제논이 등 뒤로 숨기고 있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그가 제 손 위에서 상자를 열자, 세밀하게 커팅된 퍼플 다이아 반지가 정원의 불빛을 아름답게 반사했다.
작은 왕국 하나와 맞바꿀 정도로 귀하다는 투명한 보랏빛의 다이아몬드.
일전에 경매에 나와 큰 화제가 되었는데, 웬만한 귀족의 재력으로도 구하기 힘든 고가라 깔끔히 관심을 접었었다.
그게 지금 내 앞에 있다니.
“그대를 닮은 이 반지와 나라는 존재까지.”
부드러운 온기를 머금은 제논의 시선.
“모든 걸 그대에게 주고 싶어서.”
“공작님….”
“사랑합니다, 키리아.”
“……!”
키리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토록 듣고 싶어했던 말이건만 어째선지 대답할 말을 찾기 힘들었다.
어떤 대답도 지금의 벅찬 가슴을 표현하기엔 부족했다.
천천히 일어난 제논은 그녀의 마음을 짐작하듯 키리아를 끌어안았다.
그녀에게 끼워진 반지처럼, 두 팔로 단단히 그녀를 옭아매고 속삭였다.
“사랑해요. 사랑해. 아무리 말해도 부족할 만큼 사랑해.”
흘러넘치듯 계속되는 달콤한 속삭임.
어쩐지 대답해 달라고 조르는 듯한 귀여운 느낌에, 키리아는 그만 웃어버렸다.
이러면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잖아.
발뒤꿈치를 들고 제논의 목을 두 팔로 감쌌다.
그리고 제논에게 귓속말을 했다.
“…….”
대답을 듣고 놀랐다가 웃음을 터뜨리는 제논.
그러더니 단숨에 키리아를 공주님 안듯 안아 들고 성큼성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불이 꺼지는 후원과 저택의 복도.
하지만 단 한 곳.
침실만은 밤이 늦도록 불이 꺼지지도, 커튼이 걷히지도 않았다.
이따금 작은 웃음소리만이 밤공기에 녹아들 뿐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