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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화 (140/141)

140화

“자, 이제부터는 바짝 긴장해야 하네. 준비됐는가?”

상단의 대장이 말하자 다른 상인들과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교역품을 잔뜩 싣고 이동 중인 상인들이었다.

남부와 달리 북부는 마물이 들끓어 위험하다.

최근에는 북부 공작의 휘하로 들어가는 마물이 많아져 좋아졌다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을 습격하는 마물은 많았다.

“특히 이 산길은 흉악한 마물이 자주 출몰하기로 유명한 곳이야. 하지만 이곳을 지나야 기한에 맞출 수 있으니….”

방심하다간 사람의 목숨이 날아갈 수 있다. 실제로도 그런 사고가 몇 번 있었다.

북부에서 유독 남부의 물건이 비싼 이유에는 남부 상인들의 횡포도 있었지만, 운송 문제도 작용했다.

그것은 북부의 발전을 저해하는 큰 요소였다.

그리하여 상인들은 바짝 긴장한 채 위험한 산길을 지났다.

그리고 몇 시간 뒤.

그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너무 안전하게 왔는데?”

마물을 한 마리도 마주치지 않다니 이게 말이 되나?

“아무래도 오늘 운수가 엄청나게 좋은가 보군!”

“맞아. 기적이라도 일어난 기분이야!”

북부의 다른 상인들 역시 비슷한 행운에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였다.

그런 사람들을 마계 참새가 한가롭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륵, 키르륵….”

참새는 작은 마물 무리가 무장한 사람들의 수를 보고 물러가는 모습도 내려다봤다.

북부에서 마물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다.

사라진 건 왕에게 충성을 바칠 정도의 지능은 있지만, 북부 공작을 따르지 않는 녀석들 뿐.

남은 건 마계 참새와 같은 동물들과, 충성을 따질 정도의 지능이 없는 하급 마물들이었다.

공작성의 마물 기사들이 여전히 활약하며 명성을 높일 기회가 많다는 뜻이었다.

“째짹.”

고개를 갸웃거리던 참새는 포르르 제 둥지로 날아갔다.

그리고 부리에 물고 있던 먹이를 새끼들에게 먹였다.

산들거리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다.

변화의 바람이었다.

º º º

평화로운 북부와 달리….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황궁의 회의실은 전에 없이 초조함을 띠고 있었다.

상석에 앉아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는 황제.

그리고 저들끼리 떠드는 흥분한 중앙 귀족들.

전부 위세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오르는 란페르세 공작을 견제하는 이들이었다.

“게이트키퍼라니요. 마계의 문이 골치 아프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해결되길 바란 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어찌 보면 위험부담을 전부 공작이 가져가게 되었으니 잘된 부분도 있지 않을까요?”

“잘 되긴요!”

“신전에서 봤잖습니까. 란페르세 공작이 마계의 문을 자유자재로 여닫는 모습을요.”

“심지어 마음대로 마물을 돌려보내기까지 했죠. 중요한 마족까지 말입니다!”

“하, 하지만 마계의 문은 이제 사라진 게 아닙니까? 그럼 일단 안심해도….”

“아니요. 특별히 설명하지 않았지만 공작의 태도로 보면 사라진 게 아닙니다. 아마 뜻대로 다시 불러낼 수 있겠죠.”

“허어, 그렇다면 큰일이군요.”

귀족들의 흥분 섞인 대화를 듣고만 있던 황제가 근심어린 한숨을 쉬었다.

“…공작이 짐의 머리 꼭대기에 올라앉으려 하는군.”

움찔.

그랬다. 귀족들이 초조해하고 흥분한 이유가 바로 저 한 문장에 들어 있었다.

다들 조용해지자 한 귀족이 애써 긍정적으로 말을 꺼냈다.

“하지만 란페르세 공작가는 대대로 황실에 깊은 충성을 보이는 가문이 아닙니까? 오히려 폐하께 무기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

깊은 충성의 진짜 이유를 알고 있는 황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실을 모르는 다른 귀족들은 이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오히려 그렇게 흘러갈 수도 있겠군요.”

“맞습니다. 란페르세 공작은 폐하의 충실한 검이 될 겁니다.”

“그래도 자신이 가진 힘을 휘두르려 할 텐데요?”

“그거야 공작에게 유감스러운 사람만 아니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유감스러운 사람…?

멈칫한 귀족들은 재빨리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란페르세 공작에게 서운하게 한 건 없겠지…? 없어야 할 텐데?

이때였다.

시종의 알림과 함께 화제의 중심이 직접 등장했다.

제논은 무감한 표정으로 황제를 향해 가볍게 예를 취했다.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행동이었지만 지금의 황제와 귀족들에게 그 행동은 유독 거만해 보였다.

부러울 정도로 말이다.

제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폐하. 지난 ‘검은 3일’과 이번 마계의 문을 두고 청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하라.”

“아시다시피 두 문제 모두 제국의 존망을 위협할 정도로 큰 사건이었고, 해결의 배경에는 공통적으로 한 사람의 공로가 컸습니다.”

황제와 귀족들 모두 제논이 누구를 말하는지 알았다.

“…공작의 주치의 키리아 양을 말하는 것인가?”

“맞습니다.”

제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이름이 나오자 무표정했던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1급 훈장과 부상을 수여하신 것은 알지만 제국을 구한 영웅에게는 부족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지 않아도 그녀에게는 특별히 대우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지. 공작은 그녀에게 뭘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저는….”

제논이 원하는 바를 말하자 황제와 귀족들의 눈이 커졌다.

귀족 중 한 명이 책상을 손바닥으로 탕 쳤다.

“란페르세 공작! 그게 공작이 요구를 한다고 뚝딱 떨어지는 건 줄 아십니까?”

“그녀에게는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오히려,”

제논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찬찬히 훑었다.

“그녀가 제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 공과 상을 축소한 건 아닙니까?”

“그, 그럴 리가!”

“아니라면 어째서 인마전쟁에도 버금갈 사건의 공로자가 수여받은 게 훈장밖에 안 되는 겁니까.”

“…크흠. 아무리 그래도 인마전쟁에 비교하는 건 무리가 있습니다.”

“1급 훈장 자체만으로도 이미 제국에 큰 공헌을 했다는 증거입니다. 욕심이 과하군요.”

대꾸하는 말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서로 눈치를 보는 귀족들.

황제도 불편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침묵을 지켜보던 제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심히 말했다.

“폐하께서도 같은 생각이시라면 하는 수 없군요.”

제논이 휙 몸을 돌렸다.

“유감이지만 ‘문’을 여는 수밖에.”

“……?!”

“지, 진심입니까!”

덜컹, 덜컹. 의자들이 뒤로 밀리거나 넘어지며 귀족들이 벌떡 일어났다.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이오, 공작! 마계의 문을 열겠다니…!”

끼익.

제논은 회의실의 문을 반쯤 열다가 말을 멈춘 귀족들을 돌아봤다.

그러며 놀리듯 빙긋 웃었다.

“이 문을 말한 겁니다만, 왜 다들 그리 겁먹은 겁니까.”

“…크흠!”

“하지만 게이트키퍼의 능력을 정확히 알고 계셔서 안심했습니다.”

회의실을 나가며 제논이 황제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제가 굳이 ‘문’을 열게 하시지 않으리라 믿습니다. 특히….”

제논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검은 3일’의 다른 결말을 보고 싶지 않으시다면 말입니다.”

“……!”

탁.

문이 닫히자 귀족들의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황제는 제논이 다녀간 사이 주름이 몇 개는 더 늘어 있었다.

이로써 한 가지가 모두의 뇌리 속에 확실히 자리잡았다.

만인의 태양인 제국의 황제, 그 위의 존재가 나타나고 말았다고 말이다.

º º º

키리아는 부동산 카탈로그를 보고 있었다.

옆에서 쿠키를 먹으며 함께 카탈로그를 보고 있던 리안이 입술을 삐죽였다.

“누나. 꼭 독립해야 되겠어? 나를 두고?”

“나도 이젠 사업체의 사장이니까 좀 그럴듯해야지 않을까?”

“여기서도 그럴듯하게 있을 수 있잖아.”

“아니.”

키리아는 고개를 젓고 진지하게 말했다.

“에메랄드 가든에 저택을 살 거야. 사업을 불릴수록 여러 사람을 어쩔 수 없이 알고 지낼 텐데, 그들에게 얕보이지 않으려면 클로버필드 백작가의 영애로는 안 돼.”

작위가 없는 만큼 독립적인 영역을 구축했음을 보여줘야 했다.

그리고 개인적인 욕심도 있었다.

“비즈니스를 위한 저택이지만, 한 층 전체는 내 개인 공간으로 만들 거야.”

황홀한 듯 제 두 손을 깍지 낀 키리아의 눈이 빛났다.

“남부와 북부의 독초 온실과 개량 품종 온실을 따로 둬야지. 저장고와 연구실도 용도마다 최소 다섯 개는 두고. 아, 벌써부터 말린 독초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

낮에는 우아한 사업가이자 제국의 스타.

하지만 밤에는 은밀한 개인 공간에서 포근한 힐링을 만끽하는 나.

‘상상만으로도 행복해!’

이전에는 생각도 못했던 독립의 꿈이 이젠 현실로 다가왔다.

“게다가 에메랄드 가든에 집을 잡아야 출퇴근하기도 좋고.”

“치잇.”

리안은 아쉬워하는 티를 숨기지 않았지만, 키리아를 힐끔거리는 눈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했다.

남몰래 볼을 붉힌 리안은 안 그런 척 슬그머니 키리아와 더 가까이 붙어 앉았다.

“그런데 우리 매형은 왜 안 찾아오지?”

“…매, 매형이라고? 얘는 무슨.”

당황한 키리아가 에헴 헛기침을 했다.

“글쎄, 모르겠는데. 게다가 정말 매형이 될지는…. 그분은 북부를 다스려야지. 난 사업체를 한창 돌봐야 할 시기라 여길 뜰 수 없고.”

“흐음.”

이때 하녀가 공손히 노크를 했다.

“아가씨. 황실에서 교지가 도착했습니다.”

“엥?”

황실에서 왜?

키리아는 어리둥절해하며 교지를 가져온 황실의 관리를 맞이했다.

관리는 교지의 내용을 읽고 키리아에게 수여하듯 전달했다.

내용을 들은 키리아는 물론, 백작과 리안, 그리고 사용인들까지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

키리아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교지를 받아들었다.

내용을 여러 번 곱씹듯 읽어본 후에야 말을 꺼낼 수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 저에게… 공작의 칭호를 내리셨다고요?”

“예.”

관리가 사무적인 태도로 대답했다.

“이 교지는 사전에 알려드리기 위함이며, 곧 정식으로 황실의 부름을 받으실 겁니다.”

황실의 혈통과 거리가 먼 귀족이 공작위에 봉해지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이게 뭐지? 그 치사한 황제가 왜 나한테 자작도 아니고 공작위를? 누가 협박했나?’

리안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키리아를 올려다봤다.

“누나, 이제 공작님이야?”

“그런… 모양인데?”

“그럼 아버지도 누나한테 높임말 쓰는 건가?”

“……!”

서로를 보는 키리아와 마이언의 눈이 동그래졌다.

뜻밖에 찾아온 불 속성 효녀가 될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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