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9화 (139/141)

139화

“헉.”

약을 삼킨 제논이 돌연 숨을 들이켜며 제 목을 움켜잡았다.

“고, 공작님!”

놀란 키리아가 상태를 살피기 위해 가까이 달려왔지만, 제논은 손을 가볍게 들어보였다.

“괜찮…습니다.”

키리아는 걱정하며 마법진이 새겨진 제논의 가슴을 바라봤다.

그러다 눈을 크게 떴다.

“마법진이 사라지고 있어요!”

“……!”

“놀랍군…!”

대신녀와 셜론도 몇 걸음 가까이 다가와 관찰했다.

마법진을 구성하고 있던 신성 문자가 꿈틀거리더니, 바람에 흩어지듯 사라지고 있었다.

하지만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글자들이 자리를 잡으려 들었다.

키리아가 얼른 외쳤다.

“대신녀님! 마탑주님! 지금 재구성해야 해요!”

“알겠어요!”

그냥 두면 어떤 마법으로 구성될지 알 수 없었기에 외부의 힘이 가해져야 했다.

셜론이 마나를 집중해 마법진에 개입할 여지를 만들고 대신녀가 신관들과 함께 신성 주문을 외웠다.

셜론은 이미 황제와의 마법 계약을 수정할 때 해봤던 일이었고, 대신녀 역시 의식 준비를 했으니 익숙했다.

그렇게 신성 문자는 새로운 것과 스스로 변형되는 것이 뒤섞이며 구성되기 시작했다.

이는 키리아와 가까이에 있는 세 사람만 알 수 있는 변화였으나….

“오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는 건 다른 사람들도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

제논의 신체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몸의 반이 마물로 변해버렸던 그에게서 검은 비늘이 툭툭 떨어졌다.

하나 둘씩 떨어지던 비늘은 이윽고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져 먼지로 화했다.

남은 자리에 나타난 건, 마물의 흔적이 전부 사라진 본래의 제논이었다.

다만 단 한 군데.

그의 황금빛 눈동자에 기묘한 붉은빛이 깃들었다는 점만이 달랐다.

금안과 적안을 오가던 그의 색깔이 드디어 안정된 것처럼.

사람들의 놀라워하는 시선 속에서, 마침내 대신녀의 주문이 잦아들었다.

“…그리하여 주문을 이에 봉하노라.”

말을 마친 대신녀의 이마에 땀이 흥건했다.

그녀가 창백해진 얼굴로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됐습니다. 마검과의 연결은 끊어졌어요.”

“그럼 이제 공작은 마계의 문과 상관없어진 것이오?”

“어디 한번 보죠.”

대신녀가 새로운 마법진의 문구를 찬찬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만족스러워하던 대신녀의 표정이 점차 당혹으로 변했다.

“이건…?”

하지만 낭패의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좋아해야할지 말아야할지 잘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왜 그러십니까?”

의아해하는 제논에게 대신녀가 대답하려던 때였다.

솨아아!

갑작스럽게 한쪽으로 공기가 빨려들어가며 바람이 일었다.

“임시 봉인이 깨졌습니다!”

신관들이 마계의 문에서 물러나며 외쳤다.

사람들의 옷자락이 펄럭였고 종이, 부채 등의 가벼운 물건들이 마계의 문으로 빨려들어갔다.

“꺄아악!”

“으악!”

사람들이 혼비백산하는 바로 그때.

제논은 제 몸 안에 흐르는 힘을 느꼈다. 그는 믿기지 않는 얼굴로 제 손을 쥐었다 폈다.

이윽고 그가 점점 벌어지는 마계의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닫혀라.”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마계의 문이 절로 스르르 닫혀버린 것이다.

마치 고분고분하게 눈을 감듯이!

바람이 뚝 그치자 옷과 머리가 헝클어진 사람들은 휘둥그레진 눈을 끔뻑였다.

그들의 시선이 천천히 손을 뻗고 있는 제논에게 모였다.

설마…?

다들 같은 생각을 하는 분위기.

이 어색한 정적을 깬 건 대신녀의 얼떨떨한 물음이었다.

“키리아 양, 혹시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했나요?”

“확신하지는 못했어요. 어쨌든 성공했지만.”

키리아가 씩 웃었다.

재구성 덕에 현재 제논과 마검의 연결은 끊어졌다.

제논과 마검, 마계의 문. 이렇게 셋으로 구성된 관계에서 마검이 빠진 것이다.

그런데 제논과 마계의 문의 연결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졌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망각의 꽃.’

봉인 마법진을 중독시키고, 재구성되게끔 만든 것이 다름 아닌 강력한 마계의 식물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공작님이 지닌 마왕의 마기.’

본래 마계의 문을 여닫을 수 있는 자는 마계의 주인인 마왕이다.

그러니 마왕의 힘을 지닌 제논 역시 마계의 문을 다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키리아는 ‘검은 3일’ 때 제논이 마물들을 제도에 소환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고, 이 힘을 자신의 약을 통해 이끌어 내고자 했다.

‘솔직히 가능성이 높진 않았는데, 조금 전 의식 실패가 오히려 득이 됐어.’

마검에 있던 마왕의 남은 기운까지 제논이 가져왔으니까.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제논은 마검과의 연결을 끊어낸 것에 더해 마계의 문을 스스로 닫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봉인 마법진을 완전히 없애기 힘들다면, 차라리 다룰 수 있는 도구처럼 만들어야지.

“…라는 게 제 생각이었어요.”

이러한 키리아의 설명을 들은 셜론은 입을 벌렸고, 제논의 표정엔 감탄의 빛이 어렸다.

제논이 자신의 마법진을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내려다봤다.

“…과연. 어느 시점부터 알 수 없는 힘이 섞였다고 느꼈는데 그래서였군요.”

“지금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키리아 일행끼리만 숙덕거리고 있자, 답답해진 황제가 목소리를 높였다.

“어서 폐하께 사실을 고하시오!”

다른 귀족들도 황제의 편을 들며 성을 냈다. 그들은 제논이 무언가를 일부러 숨기고 있다며 의심의 눈빛을 보냈다.

“폐하.”

그런 황제와 귀족들을 향해 키리아가 한 걸음 나섰다. 그리고 공손히 말했다.

“주치의의 소견으로 봤을 때, 란페르세 공작님께서는 게이트키퍼가 되신 것 같습니다.”

“게이트… 키퍼?”

숙덕숙덕하는 귀족들.

황제가 이들과 귓속말을 나누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짐을 놀리는 것인가? 방금 있었던 의식의 결과를 보고하지 않고 엉뚱한 말을 늘어놓다니!”

“그렇다면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키리아가 제논에게 속닥였다.

잠시 키리아와 대화를 나누던 제논은 얼핏 고민스런 표정을 했다.

하지만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폐하, 설명보다 직접 보여드리죠.”

그가 마계의 문을 향해 다시 손을 들었다.

“게이트키퍼가 무슨 의미인지.”

말이 끝나는 순간, 마계의 문이 단숨에 활짝 열렸다.

다시 한번 사물을 빨아들이는 돌풍이 몰아쳤다.

“으아악! 고, 공작!”

“호들갑이십니다. 사람까지 휩쓸릴 정도로 강한 바람은 아닙니다.”

“공자악!”

황제의 노성을 무시한 제논이 문을 바라보며 기운을 조절하기 시작했다.

그의 붉은빛 섞인 금안이 빛을 발하고 잠시 후.

어딘가에서 날아온 검은 그림자들이 마계의 문 안으로 빨려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수가 적었던 그림자들은 빠르게 불어나더니 이윽고 하늘을 뒤덮을 정도로 늘어났다.

“저건…?”

“마물입니다.”

“네?!”

키리아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마, 마물을 지금 마계로 돌려보내고 계신 거예요? 그런 것도 가능해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해보니 되는군요.”

“헉….”

이건 또 기대 이상인데?

“잠깐만요, 그럼 공작성의 마물들도…?”

“글쎄요.”

제논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내가 강제로 돌려보내는 건 그대와 날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마물들입니다.”

“그 뜻은….”

오늘 이후 제국에 남은 마물들은 전부 내 부하라는 뜻이었다.

‘대, 대박! 이런 건 기대하지 못했는데!’

마계의 문이 마물들을 빨아들이는 두렵고도 기묘한 광경.

황제를 비롯한 모두가 할 말을 잃고 이 광경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마물들 사이에서 이질적인 무언가가 제논의 앞으로 떨어져 굴렀다.

“으윽!”

다름 아닌 감옥에 있던 플루토였다.

그 역시 제논의 힘으로 강제 소환된 것이었다.

얼떨떨해하던 플루토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얼른 마검을 집어들고 보호했다.

그가 제논을 뚫어져라 보더니 허탈하게 웃었다.

“…폐하의 힘으로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는군요. 보나마나 이 이상한 약제사의 작품이겠지.”

“이상하다니?”

키리아가 항의했지만 플루토는 무시하고 말했다.

“마물들까지 역소환하고 속이 시원하겠군요. 그래서 이젠 날 어쩔 셈이죠?”

“마왕을 데리고 사라져라.”

“…뭐라고요?”

플루토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날 사형시키거나, 봉인하거나, 실험하는 게 아니라 그냥… 보내준다고?”

“그녀가 널 보내길 원하니까.”

제논의 대답에 경악에 찬 플루토의 시선이 키리아를 향했다.

키리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플루토에 대해 이미 제논과 이야기를 나눈 뒤였다.

“…연구하다 알게 됐는데, 마왕을 죽이면 마계엔 새로운 마왕이 나타난다며. 그럼 우리가 피곤해.”

“하지만 황제와 신전은… 동의하지 않을 텐데요.”

키리아가 엣헴, 콧대를 들며 자랑스레 말했다.

“우리 공작님이 결정하신 일인데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어?”

제도를 마물로부터 두 번이나 구한 영웅이자, 이제는 마계의 문을 오롯이 혼자 감당하게 된 사람이 바로 제논이니까.

“그리고 난 내 주치의인 그대의 말이라면 다 듣죠.”

“그래야 착한 환자죠.”

주거니 받거니 하는 키리아와 제논을 보며 플루토는 헛웃음을 뱉었다.

그는 조금씩 물기를 띠는 제 눈을 웃음으로 감추며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 은혜는 반드시 갚아드리죠.”

“아냐. 오지 마. 오면 공작님이 당신을 죽일 거니까.”

키리아의 손사래에 웃음을 터뜨린 플루토는 마검을 갖고 마계의 문으로 뛰어들었다.

“저, 저런!”

“잡아!”

황제와 귀족들이 뒤늦게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제논이 딱, 손가락을 튕기자,

쿵―

마계의 문이 둔한 진동음을 내며 닫혔다. 그리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

마계의 문을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분노, 황당, 혼란 등이 뒤섞인 무수한 시선이 키리아와 제논을 향했다.

무표정한 제논을 등에 업고, 키리아가 위풍당당하게 섰다.

“이제 게이트키퍼가 뭔지 다들 아셨겠죠? 이의 있으신 분?”

“…….”

황제와 귀족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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