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제논의 봉인 마법진과 마검의 연결을 끊는 의식은 외부에 비공개였다.
그렇지만 주요 귀족들과 황제는 이 소식을 알았다.
그들과 함께, 황제 역시 비공식 일정으로 의식을 참관한다고 알려왔다.
“드디어 오늘이네.”
내가 다 떨린다.
키리아는 가슴을 꾹 누르며 후우 심호흡을 했다. 부디 의식이 성공적으로 치러지길 바랐다.
의식 장소로 미리 가려는데 신전의 성기사 한 명이 키리아를 향해 다가왔다.
“키리아 님. 죄수가 키리아 님을 꼭 뵈어야 한다며 난동을 피우고 있습니다.”
“죄수요?”
“그…. 마족 말입니다.”
“아.”
“워낙 시끄럽게 굴어서…. 하지만 마족의 말을 다 들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원치 않으신다면 저희 선에서 해결하겠습니다.”
“음….”
마왕을 따라 인간계로 나왔던 플루토는 마왕이 마검으로 돌아간 직후 성기사들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감옥에 갇혔다는 건 들었는데 한 번도 찾아가보지 않았다.
‘나도 워낙 바빴으니까. 안 그래도 한 번은 가 봐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잘 됐네.’
키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안내해주세요.”
“네. 그럼 이쪽으로 오십시오.”
º º º
감옥으로 들어서지도 않았는데, 안에서 쾅쾅 시끄러운 굉음이 연달아 터졌다.
이러다 감옥 전체가 무너지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키리아를 안내한 기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키리아 님을 모셔오지 않으면 절대 멈추지 않을 거라고 했습니다. 신관들이 신성력으로 다중 결계를 쳐 놓은 것도 몇 개 부숴버렸습니다.”
“어, 어서 가죠.”
키리아는 빠른 걸음으로 플루토가 갇혀 있는 감옥 앞으로 왔다.
그제야 감옥 여기저기로 마기를 날리고 있던 플루토가 행동을 멈췄다.
“오, 드디어 납셨군요?”
비아냥거리는 말투에 비해 플루토의 안색은 매우 창백했다.
안 그래도 키리아를 급히 저승으로 데려와야 했을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던 그였다.
그런데 인간계로 다시 온 데다, 이렇게 힘을 마구 쓰며 난동을 부렸으니 상태가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이었으면 진즉 죽었을 거야. 어휴.’
키리아는 성기사를 적당한 거리로 물리고 플루토의 앞에서 팔짱을 꼈다.
“왜 날 부른 거야? 고맙다는 인사를 듣고 싶어서?”
“저한테 고마워요?”
“…글쎄. 납치범이 풀어줬다고 고마워하는 건 좀 이상하잖아. 어쨌든 당신은 마왕과 한패니까.”
“말은 그렇게 해도 조금은 고마운 모양인데요. 그렇죠?”
“…왜 불렀냐니까?”
키리아가 뚱하게 묻자 플루토는 피식 웃었다.
그러다 이내 표정을 진지하게 굳히고 얼굴을 철창 가까이로 가져왔다.
“어쨌든 내가 저승에서 당신을 도운 건 맞잖아요.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렇죠?”
“…….”
키리아는 찜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가 아니었다면 마왕에게 붙잡혀 수상한 저승의 음식을 먹어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엔 당신이 날 도와줘요.”
“도와달라고…?”
마왕의 안위를 걱정하는 걸까?
그런데 플루토가 원하는 것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간절한 열망으로 그의 눈이 더욱 붉게 타올랐다.
“그래요. 이곳에 마계의 문이 있잖아요. 나와 형님을… 그곳으로 돌려보내줘요.”
“……!”
“나랑 형님을 돌려보내주기만 하면 그 뒤에는 마계의 문을 어떻게 하든 상관하지 않을게요. 그러니 그것만 해줘요.”
“그건… 불가능해. 문을 봉인하려면 마왕이 갇혀 있는 마검이 필요하니까.”
플루토가 철창을 세게 움켜잡았다.
“문이 봉인돼버리면… 또 얼마나 버텨야할지, 아니, 버틸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 그러니까 제발.”
“…….”
“부탁입니다. 굳이 형님이 없어도 다른 수를 찾으면 되잖아요. 하지만 나와 형님에겐 이 방법밖에 없어. 제발… 도와줘요.”
키리아는 난처하게 시선을 피했다.
‘이 마족 형제는 워낙 대단한 인물들이라, 인간계에서 사라져 주는 게 좋긴 해.’
죄수니 포로니 해서 데리고 있는 건 불안하다.
약해진 마왕과 플루토를 이용하려는 인간이 없을 거라는 장담도 없고. 그러다 플루토가 역으로 인간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마검을 포기하라니. 그럼 공작님은 어떡하라고?’
마검과의 연결 때문에 공작님의 마물병이 낫지를 않잖아.
“…미안하지만 안 돼.”
안타깝지만 하는 수 없다. 나한텐 우선순위가 엄연히 있어.
“하지만 만약….”
만일의 경우를 말하려던 키리아는 얼른 입을 다물었다.
매우 불확실한 가능성이다. 함부로 얘기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키리아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냉정히 몸을 돌렸다.
“안 돼! 가지 마, 제발!”
뒤에서 플루토가 처절하게 불렀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º º º
의식 장소에는 이미 황제와 중앙 귀족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선으로 연결된 두 개의 마법진이 있었는데, 각각의 마법진 위에는 제논과 마검이 자리했다.
키리아는 제논의 주치의로서 그와 가까운 곳에서 대기 중이었다.
마침내 대신녀가 의식의 시작을 알렸다.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대신녀가 거느린 신관들이 일제히 무어라 읊조리기 시작했다.
‘아마 신성 마법의 주문이겠지?’
낮고 신비로운 신성 주문이 이어질수록 두 마법진이 강하게 빛났다.
특히 마법진을 잇고 있는 여러 개의 선들이 팽팽하게 가장 강렬하게 빛나며 곧 끊어질 듯했다.
이윽고 대신녀가 제의용 스태프를 바닥에 강하게 찍었다.
쿵!
그 순간 마법진의 연결선이 과열된 듯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끊어진다!’
키리아가 눈을 질끈 감은 순간 환한 빛이 터져 나오며 모두의 시야를 일시적으로 가렸다.
“…성공했나?”
키리아는 눈을 가렸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고, 공작님!”
“아니, 저런!”
다른 사람들도 기겁했다.
제논이 당황한 얼굴로 제 두 손과 몸을 내려다봤다.
“……!”
마룡의 비늘이 몸을 좌우로 양분하듯 한쪽을 뒤덮어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완벽한 반인반마였다.
그에 비해 마기로 새까맸던 마검의 검신은 본래의 쇳빛으로 돌아왔다.
“설마 연결이 끊어진 게 아니라 마검의 마기가 공작님에게로 이동한 거야…?”
사람들이 웅성웅성 시끄러웠다. 특히 황제의 곁에 있는 중앙 귀족들이 그랬다.
“맙소사, 저래서야 인간이라고 볼 수도 없겠군.”
“아무리 영웅이라지만 저런 모습이라면 타국에 보이기도 창피한데….”
이런 말에 황제는 흡족한 듯 히죽 웃고 있었다.
‘아니, 저 사람들이!’
이를 본 키리아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키리아는 의식을 중단시키고 급히 의논 중인 대신녀와 셜론, 제논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대신녀님, 설마 누군가 또 수작을?”
“아니, 어떤 절차에도 이상은 없었소. 신전 측에 이어 우리 마탑에서도 확인한 사항이오.”
대신녀 대신 셜론이 먼저 대답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거예요?”
“내 생각엔 공작의 몸에 새겨진 봉인마법 때문인 것 같소. 그게 정상적인 봉인마법이 아니라는 건 아시겠지?”
“네.”
“마법은 의지를 갖고 있소. 불완전한 봉인 마법이라면 의지 또한 불안정하지. 이 탓에 예상치 못한 효과로 이어진 것 같소.”
“…나 역시 마법의 의지 비슷한 것을 느꼈습니다.”
제논이 제 가슴에 새겨진 봉인 마법진을 찌푸린 눈으로 내려다봤다.
“…연결을 끊으려고 시도하자 마법진이 오히려 마검의 마기를 끌어오더군요. 그것까지 봉인하려는 것처럼.”
“…….”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이윽고 대신녀가 다시금 결의를 다지며 말했다.
“이런 돌발적인 상황도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이미 다른 방법도 준비해 놓았으니 그걸 시도해보면….”
“하지만 대신녀님.”
키리아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의식에 걸리는 시간이 상당하던데, 그동안 버틸 수 있을까요? 공작님과 저기….”
키리아가 마계의 문을 가리켰다.
“저 문 말예요.”
임시 봉인을 씌워놓은 마계의 문은 육안으로 보기에도 금방 다시 열릴 것처럼 가늘게 흔들렸다.
이제는 임시 봉인을 아무리 덧씌워도 마계의 문을 잡아놓기가 힘들었다.
“아, 이런….”
가느다란 탄식을 중얼거린 대신녀가 키리아를 바라봤다.
“좋아요. 알겠어요. 그렇다면 키리아 양이 준비해 온 방법을 들어볼게요.”
“어… 어떻게 아셨어요?”
안 그래도 내 방법을 써보자며 설득하려 했던 키리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신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장서관을 그렇게 드나드는데 제가 모를 리가요. 키리아 양이 반출한 장서 중에는 열람이 제한된 고서들도 많답니다. 그래서 짐작했죠.”
“아…!”
어쩐지 장서관의 사서가 아무 말도 없이 다 내어준다 싶었다.
‘대신녀 님이 미리 조치해주셨구나.’
키리아는 살짝 뺨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이 의식이 성공하길 바랐지만 이렇게 되었으니…. 이젠 제 방법을 시도해보고 싶어요.”
말한 후 키리아는 자신을 빤히 보고 있던 제논에게 고개를 돌렸다.
“공작님, 기억하시죠? 황실과 공작가 사이에 맺어 있던 마법 계약을 우리가 수정한 것 말이에요.”
“물론입니다. 마탑주의 도움으로 계약의 내용을 일부 바꿨죠.”
“네. 글자를 수정해서요. 그리고 공작님의 몸에 있는 그 마법진도 기본적으로는 글자로 구성된 마법진이죠.”
여기까지 말했을 때 대신녀와 셜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키리아 양, 그 말은…?”
“맞아요.”
키리아가 씩 웃으며 유리관에 있는 꽃잎을 들어보였다.
“마법진의 기능을 구성하고 있는 게 고대 신성 문자라면, 문자 전체를 수정해보는 거예요. 바로 이 망각의 꽃으로요.”
철저한 조사 덕에 이젠 꽃의 명칭을 제대로 알고 있는 키리아였다.
본래의 효과까지 말이다.
“기억을 잃게 하는 스틱스의 물로 자라는 망각의 꽃. 이걸로 포션을 만들어봤어요. 엄연히 말하자면 이건 극독약이에요.”
특히 키리아는 제논을 바라보며 긴장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성공한다면 이 독약이 공작님의 마법진을 중독시킬 거고, 내용을 재구성할 수 있을 거예요. 마검과의 연결을 끊어낼 수도 있겠죠. 하지만 부작용이라도 일어난다면….”
굳이 뒷말을 잇지 않아도 제논과 대신녀, 셜론은 부작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죽음이겠지.
어쩌면 영혼이 분리되어 죽음보다 못한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하실래요?”
“내 의사를 묻는 겁니까?”
“당연하죠. 공작님이 거부하시면 절대 하지 않을 거예요.”
그러자 제논이 피식 웃었다.
“만약 그대의 자신감보다 위험요소가 크다면 내게 말조차 꺼내지 않았겠죠. 안 그렇습니까?”
“…….”
키리아를 향한 신뢰가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키리아는 일부러 굳히고 있던 표정을 풀고 씩 웃었다.
그리고 불길한 보랏빛 독약병을 가볍게 흔들어보였다.
“그렇다면 공작님, 이 독약은 어떠세요?”
“좋습니다.”
대답한 제논이 독약을 가져갔다.
그는 동의를 구하듯 대신녀와 셜론을 한 번씩 쳐다봤다.
두 사람도 고개를 끄덕이자 제논은 망설임 없이 독약을 입에 털어넣었다.
그리고 이어진 결과는 키리아의 기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