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내 일만 생각하느라 그대가 뭘 참고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제논이 더 가까이 손을 뻗었다.
“부디.”
키리아는 멍하니 제논을 올려다봤다.
속 쓰린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은 매우 초췌했다.
눈 밑에는 멍이라도 든 것처럼 다크서클이 짙게 내려와 있었고, 입술은 초조함으로 바싹 말라 있었다.
내밀고 있는 검은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는데, 손가락 끝까지 검은 비늘 한 조각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행여나 키리아가 날카로운 비늘에 다치지 않도록 말이다.
그 때문에 본인의 꼴이 더 괴상해졌는데도.
“…….”
키리아는 울컥 올라오는 또 다른 종류의 분노를 참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이러면 내가 더 화를 낼 수가 없잖아!
“…꼭 만회하셔야 해요!”
키리아는 제논의 붕대 감긴 손을 덥석, 세게 붙잡았다.
그제야 제논이 미소를 지었다.
“네. 물론.”
제논이 힘을 주어 키리아를 끌어올리려 했다.
하지만 키리아의 몸은 위로 올라가기는커녕 아래로 덜컥 잡아당겨졌다.
“……?!”
“둘 다 끌어내려주겠다!”
어느새 쫓아온 마왕이 키리아의 발목을 붙잡고 있던 것이다.
괴성을 내는 수많은 유령들의 차가운 손도 키리아의 발목을 타고 올라왔다.
“으으, 끈질겨!”
키리아는 몸서리를 치면서 기어 올라가려고 애썼다.
하지만 미끄러운 흙 탓에 제논까지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키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아오, 좀 꺼져!”
팍! 팍!
자신의 다리를 붙잡고 있는 손을 다른 한 발로 힘껏 밟아댔다.
뒤를 보지 못해 헛발질만 하길 여러 번.
그러다 한 번이 제대로 들어갔다.
퍼억!
“컥!”
안면을 정통으로 짓밟힌 마왕은 뒤로 휘청 넘어갔다.
키리아는 못 봤지만, 마왕의 코에서 코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우어어―
마왕이 뒤로 넘어가자 상당수의 유령들도 흐릿하게 흩어졌다.
이 탓에 마왕의 몸을 받쳐 줄 것이 사라졌고, 키리아를 놓친 마왕은 가파른 오르막길을 점점 빠르게 굴러 내려갔다.
“으아아악!”
비명이 멀어지는가 싶더니,
풍덩―!
물에 빠지는 커다란 소리가 났다.
‘얼마나 힘차게 굴러갔으면 강에 빠진 거야?’
궁금했지만 돌아볼 순 없었다. 대신 키리아는 후다닥 앞으로 기었다.
동시에 제논이 그녀를 끌어올렸다.
환한 빛이 쏟아지며 시야를 가득 채우는가 싶더니, 발밑이 훅 꺼졌다.
“윽. 눈부셔…! 으악?”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과 함께 사방이 눈부신 빛으로 가득 찼다.
확실히 영혼이 이동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속이 울렁거릴 리가 없었다.
가슴이 철렁한 키리아는 눈앞에 있는 제논을 덥석 붙잡았다.
이윽고 울렁거림이 멈췄다.
º º º
뒤집힐 것 같던 속이 빠르게 편안해졌다.
천천히 눈을 뜬 키리아는 한순간 어리둥절했다.
아직도 시야가 온통 하얬기 때문이다.
그러다 곧 하얀 시야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건 흰 셔츠를 입은 제논의 가슴이었다.
키리아는 제논의 가슴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것이다.
옆에 누워있던 제논이 미소를 지은 채 키리아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어났습니까.”
“네….”
“다행입니다.”
키리아의 이마에 제논의 입술이 깊게 닿았다.
입술이 앉았던 자리에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지만, 동시에 버석하게 거칠어진 입술의 감각도 느껴져 키리아는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접어두고 제논의 가슴에 볼을 부볐다.
“고마워요. 그리고 좋아해요.”
그러며 제논의 반응을 기대했는데….
“…크흠!”
돌아온 건 걸걸한 헛기침 소리였다.
“잉?”
고개를 든 키리아의 시야에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마이언과 리안, 대신녀, 셜론이 보였다.
“……!”
그러고 보니 나, 침대에 누워 있는 게 아니잖아!
모두가 바닥에 누워있는 키리아와 제논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으아악!”
괴성을 지르며 키리아는 벌떡 일어났다.
‘미쳤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가슴에 얼굴을 비비고 고백하다니, 미친, 미친….’
불판 위 오징어처럼 손발을 마구 구부리는 키리아와 달리 제논은 표정 변화 없이 태연히 일어났다.
아니, 오히려 못마땅해 하는 마이언을 보는 눈빛이 살짝 오만했다.
마이언의 표정이 더욱 찜찜해졌다.
“…저 꼴을 보니 제 딸자식이 확실하군요. 감사합니다, 공작 각하.”
“당연히 ‘내가 할 일’이었으니까요.”
“…크흠.”
“누나!”
흐린 눈을 하고 있던 리안이 정신을 차리고 키리아에게 폭 안겼다.
“키리아 양, 아아. 주신이여, 감사합니다.”
“정말 사람 놀라게 하지 마시오!”
이어 대신녀와 셜론도 키리아의 안부를 물으며 돌아온 것을 반가워했다.
덕분에 키리아도 정신적 충격에서 벗어나 평소의 페이스를 되찾았다.
“그런데 저는 왜 바닥에 누워있던 거죠?”
“정확히는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 위지. 공작의 영혼을 저승으로 보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마계의 문을 이용해야 했으니까 말이오.”
설명하며 셜론이 키리아의 뒤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많은 신관과 성기사들이 마계의 문을 둘러싸고 있었다.
조금 열려 있는 마계의 문에서는 종종 소형 마물이 튀어나왔는데, 성기사들이 그것들을 즉시 처리했다.
“키리아 양이 쓰러진 지 이 주일이 지났어요.”
“그, 그렇게나요?”
“네.”
대답하며 대신녀는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그새 얼굴에 주름이 더 는 것 같았다.
“키리아 양과 제논 경이 돌아올 때까지 임시 봉인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더 이상 방치하면 정말 위험했을 텐데…. 때맞춰 돌아와서 정말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대신녀님…. 그런데 봉인 방법을 찾아내셨어요?”
지금은 임시 봉인을 하루 이틀마다 계속 걸고 있었다.
하지만 이 방법은 신관들의 힘을 빠르게 소모하는 데다, 점점 효력이 떨어지고 있어서 제대로 된 해결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시도할 만한 방법은 찾았어요. 하지만 가능하다면 제논 경과 마검의 연결을 우선 끊고 싶군요. 그 편이 양쪽 모두에게 좋을 테니까요.”
“아, 그게….”
키리아가 조금 시무룩하게 말했다.
“저도 가져오고 싶었는데, 그럴 상황이….”
그때였다.
마계의 문의 틈새가 불시에 조금 더 벌어지더니, 이전의 시시한 마물들과는 다른 존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신녀님!”
“저건?”
모두가 그쪽을 주목하는 가운데, 마침내 정체불명의 존재가 문에서 단숨에 빠져나왔다.
털썩!
바닥에 넘어진 그 존재는 번쩍 고개를 들더니, 키리아에게 달려들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잡았다!”
키리아는 흠칫했다. 설마 여기까지 따라올 줄은!
“마, 마왕!? 어떻게?”
마왕은 온몸이 흠뻑 젖어 있었다. 마왕의 뒤로 플루토도 따라왔는데, 그의 다리와 팔도 젖어 있었다.
강에 빠진 마왕을 플루토가 건져낸 모양이었다.
“정말 끈질기네! 네 목적이 그렇게 중요한 거야?”
신관과 성기사들의 경계에도 아랑곳없이 마왕이 씩 웃었다.
“그야 당연하지! 내 목적은 아주 중요하니까! 내 목적은….”
자신감 넘치던 마왕의 표정이 점점 찌푸려졌다.
“내 목적은…. 그러니까….”
마왕의 표정은 찡그림에서 당혹으로, 그리고 순진함으로 바뀌었다.
이내 마왕은 정말 어린 소년처럼 제 머리를 긁적였다.
“내 목적이 뭐였지? 넌 누구고?”
“…엥?”
엥? 마왕의 말을 들은 모두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웠다.
단 한 명, 2년 내내 야근한 사람처럼 보이는 플루토만 한숨을 쉬었을 뿐이다.
키리아는 그의 한숨에서 씁쓸함과 안도감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보내는 무언의 눈빛도.
“으응? 뭐지? 왜 기억이 안 나는 거냐. 넌 누구야?”
어리둥절해 하는 마왕에게 플루토가 차분히 말했다.
“기억 안 나세요? 폐하. 이 분이 절 도와주셨는데요.”
“플루토 너를?”
“네. 덕분에 정말 살았습니다. 이대로는 과로사하는 게 아닌가 싶었거든요.”
“…그 정도란 말인가?”
마왕의 시선에 키리아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네 동생을 도와줬어. 내 목숨을 걸고.”
“목숨까지?!”
꼬마 마왕이 확인하듯이 플루토를 돌아봤다.
키리아를 떨떠름하게 쳐다보던 플루토가 마지못해 맞장구를 쳤다.
“…예. 저분이 목숨 걸고 절 구했죠.”
“그렇군….”
다소 얼떨떨하게 중얼거리던 마왕이 이내 근엄한 얼굴로 키리아에게 말했다.
“넌 비록 인간이지만 내 동생의 은인이니 마땅한 대우를 하겠다. 내게 검을 겨누고 있는 저 인간들도 너를 봐서 특별히 죽이지 않을 거고.”
꼬마 마왕이 힐끗 시선을 향한 곳에는 마왕과 플루토를 경계하고 있는 성기사들이 있었다.
“고, 고마워.”
“그런데 왜 저 인간한테서는 내 힘이 느껴지지?”
마왕이 제논을 가리켰다.
하지만 제논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마왕은 하품을 하더니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인간계로 나온 탓에 현재의 모습을 유지할 힘이 부족해진 것이었다.
“일단은…. 조금 자야겠다…. 플루토.”
“네, 폐하. 걱정마세요.”
“응….”
챙그랑.
마왕은 검이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플루토가 검을 집으려 했지만 성기사들의 검에 제지당했고, 검은 키리아의 손에 들어갔다.
키리아가 대신녀를 보며 말했다.
“마검, 얻었네요.”
º º º
대신녀는 곧바로 마검과 제논의 연결을 끊기 위한 의식 준비에 들어갔다.
“연결만 끊으면 모든 문제가 끝나겠지요.”
대신녀가 기대에 찬 웃음을 지었다.
“제논 경의 마물병도 제대로 치료될 수 있을 테고, 마계의 문 봉인도 더 깔끔하게 진행할 수 있을 거예요. 그렇죠, 마탑주?”
“동의하는 바요. 그러니 걱정 말고 푹 주무시오, 키리아 양.”
셜론이 확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키리아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왜냐면 키리아는 신전이 의식 준비를 시작한 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감사합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키리아는 두 사람의 위로에 감사를 표하고 제 방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침대로 들어가지 않고 신전의 장서관으로 향했다.
한참 후 방으로 돌아온 키리아는 두껍고 오래된 책들을 잔뜩 내려놓았다.
“연결만 끊으면 된다는 건 동의하지만….”
이전보다 더 영역을 넓힌 제논의 마물병. 더 강해진 마왕의 힘.
그것을 생각하면 자꾸만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일단은 만일을 위한 대비를 해야지. 내 방식대로.”
키리아의 방식.
그건 새로운 독약을 만드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