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뭘 도와주면 되는데?”
마침 플루토가 말해준 ‘저승을 나가는 방법’을 실천하려면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래서 키리아는 마지못한 척 마왕을 따라나왔다.
마왕이 키리아에게 빈 양동이를 내밀었다.
“물을 떠와.”
“저 강물 말이야?”
“그래. 난 준비를 마저 하고 있을 테니까.”
마왕의 뒤에는 그가 음식을 만들기 위해 벌려놓은 여러 재료가 있었다.
‘근처에 짐승 한 마리 없는데 대체 저건 무슨 고기지…?’
알고 싶지 않다…. 쳐다보지 말자.
“요리에 써야 하니까 어서 다녀와. 아니면 네가 요리할 건가?”
“다, 다녀올게.”
잘린 고기가 꿈틀거리는 모습을 보고 키리아는 얼른 대답했다.
강 가까이 온 키리아는 흐르는 강물을 찜찜하게 쳐다봤다.
“유령이 나온 물을 요리에 쓴다니, 우웩….”
난 절대 안 먹어야지.
다짐하며 키리아는 양동이에 물을 조심조심 떴다.
그러며 다리 건너편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금이 가 있는 나무…. 금이 가 있는…. 저거다!’
맞은편에는 기이하게 비틀린 나무들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금방 쪼개질 것처럼 금이 가 있는 나무도 있었다.
바로 그게 플루토가 말한 나무였다.
「문은 저승의 물건에 반응하니, 저승에 속한 물건을 먼저 소지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튕겨 나갈 겁니다.」
주변에 널린 게 저승의 물건이었다.
키리아는 강가에 널려 있는 꽃을 몇 송이 꺾어 품에 감췄다. 자신을 쓰러뜨렸던, 메두사꽃과 비슷하게 생긴 그 꽃이다.
‘지금 튈까?’
도망가기 적당한 틈을 가늠해보는 이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다 했어?”
깜짝 놀란 키리아는 얼른 몸을 일으켰다.
“으응. 양동이 가득 담았어.”
“좋아. 갖고 따라와.”
키리아는 양동이를 들고 마왕이 요리를 하던 자리로 돌아왔다.
마왕은 양동이의 물을 이용해 능숙하게 요리를 했다.
찻주전자에 물을 올리고 정체불명의 찻잎을 넣고, 고기가 지글지글 익고 있는 냄비에 물을 국자로 두르고….
홀린 듯이 보게 되는 솜씨에 키리아는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많이 해 봤나 봐? 엄청 잘하는데?”
“어렸을 때―”
히죽 웃으며 말하던 마왕이 갑자기 정색했다.
“인간이 알 일이 아니다.”
“네에, 네.”
이윽고 마왕이 요리를 한 상 가득 완성했다.
키리아가 쟁반에 요리들을 담았다.
“동생에게 갖다 주면 되지?”
“그래. 하지만 그 전에 네가 먼저 먹어봐.”
“응?”
마왕이 요리를 조금 담은 앞접시와 함께 방금 강물로 우린 차를 내밀었다.
“자.”
“어, 하지만 이 물은….”
“애초에 내가 수고를 한 건 플루토 때문이 아니라 인간 너 때문이다.”
마왕의 붉은 눈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먹기 싫다고 하지는 않겠지?”
“…….”
키리아는 주춤 찻잔을 받아들었다.
루비빛 찻물은 겉보기에는 아름다웠다. 석류가 떠오르는 빛깔이었다.
향기도 좋아서 유령에 관한 것을 잊고 먹을 수는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키리아는 제 품속에 있는 꽃을 떠올렸다.
향을 조금 맡는 것만으로도 의식을 잃게 만들고 지금은 저승까지 잡혀오게 만든 꽃이다.
그런 꽃들을 키운 건 저 강물이었다. 강변에 가득 피어 있었으니까.
평범한 물일 수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이곳이 저승이라는 특수성도 마음에 걸렸다.
‘저승의 음식은 함부로 먹으면 안 될 것 같아. 특히 마왕이 나한테 주는 거니까.’
결정한 키리아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지금은 배가 고프지 않아서…. 나중에 먹으면 안 될까…요?”
“나중엔 식어. 지금 먹는 게 좋다.”
“어, 그럼…. 저 마족, 아니, 플루토랑 같이 먹어야겠다. 이렇게 된 거 상을 거하게 차려서.”
여럿이 있으면 먹는 시늉만 할 틈도 생길 거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마왕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지금 여기서 먹어.”
“…….”
이쯤 되자 마왕이 아무래도 수상했다.
눈빛을 보니, 마왕도 키리아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음을 알아챈 듯했다.
‘얌전히 도망치기는 글렀네!’
그렇다면 먼저 움직여야 한다.
키리아는 찻물을 마왕에게 끼얹었다.
“안 먹어!”
촤악!
“윽!”
마왕이 주춤하자마자 키리아는 강의 다리를 향해 내달렸다.
아무리 마왕이라도 아이에게 찻물을 끼얹다니,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나중에 마저 느끼기로 했다.
‘지금은 도망치는 게 먼저야!’
뒤에서 마왕의 짜증스런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말을 안 듣는 인간이군.”
딱, 손을 튕기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강에서 수십 명의 유령들이 흐느적거리며 기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유령들은 온몸에서 물기를 진흙처럼 뚝뚝 흘리며 키리아를 향해 손을 뻗어왔다.
“흐악!”
기겁한 키리아는 유령들에게 붙잡히지 않도록 요리조리 피하며 다리 가까이 왔다.
하지만 다리를 건너지는 못했다.
이미 유령들이 다리 위로 기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진로가 막히고, 퇴로조차 다가오고 있는 마왕에게 막힌 상황.
느긋하게 걸어온 마왕이 말했다.
“공작에게 돌아가려는 거면 그렇게 아등바등할 필요 없다.”
“뭐…?”
“영혼이 비어버린 네 몸이 아직도 멀쩡히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해?”
“……!”
흠칫하는 키리아를 보며 마왕이 씩 웃었다.
“저승과 인간계의 시간축은 다르다. 넌 여기 고작 몇 분 있었을 뿐이겠지만, 인간계에 있는 네 몸은… 지금쯤 거름이 됐을 걸?”
키리아는 입술을 달싹일 뿐 말을 하지 못했다.
마왕이 고개를 기울였다.
“몸이 없는데 함부로 인간계로 돌아갔다간 넌 망령이 될 거다. 그대로 자아를 점점 잊어버리겠지.”
“…….”
“자, 그러니 이리 와라.”
마왕이 손을 내밀었다.
“내 말을 듣는다면 네게 새로운 몸을 줄 테니까. 그러면 인간계로 언제든지―”
마왕의 말이 뚝 끊겼다.
멍하니 서 있던 키리아가 돌연 각오에 가득 찬 얼굴을 들었던 것이다.
“나 그런 말 많이 들었어.”
“뭐?”
“안티들이 나 망할 거라고 엄청 예언을 했었거든? 근데 뚜렷한 근거는 하나도 제시 못 하고 입만 털었지. 그거랑 똑같네, 지금.”
키리아는 마왕을 향해 서너 걸음 다가왔다.
“한마디로 들을 가치가 없다는 뜻이야.”
마왕에게 다가가던 키리아는 휙 몸을 돌리더니 힘차게 도움닫기를 했다.
땅을 박차며 키리아가 휘익! 날아올랐다.
목적지는 유령들이 점거한 다리.
그곳의 좁은 난간이었다!
“으아악!”
난간을 한 발로 디딘 키리아의 몸이 위험하게 휘청거렸다. 양팔을 옆으로 쭉 뻗어 겨우 균형을 맞췄다.
그러고는 멈추지 않고 난간 위를 폴짝폴짝 밟으며 개구리처럼 뛰었다.
그때마다 키리아의 몸이 강으로 빠지거나 유령들에게 잡힐 듯 좌우로 휘청였다.
우어어어―
키리아가 발을 디딘 곳마다 유령들이 그녀를 잡기 위해 손을 뻗으며 몸 전체로 달려들었다.
마치 키리아 뒤로 하얀 진흙 파도가 들이치는 것 같았다.
‘이게 웬 팔자에도 없는 액션이야!’
서럽게 생각하면서도 키리아는 꽁지에 불붙은 병아리마냥 꺅 꺅 소리를 질러대며 잘도 뛰었다.
강 건너편에 착지했을 때는 본인도 믿지 못할 정도였다.
주먹 쥔 두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으아악, 해냈다! 인간승리야!”
엉덩이 무거워 보이는 약제사가 보인 뜻밖의 신들린 몸놀림에 마왕도 어이가 없었다.
“…저거 미친 인간 아냐? 잡아!”
그가 뒤늦게 명령하자 강의 유령들이 일제히 속도를 높여 키리아를 쫓았다.
기뻐하던 키리아도 정신을 차리고 금이 간 나무를 향해 뛰어갔다.
그러니까, 저승의 문을 여는 방법은―
‘나무에 힘껏 부딪치세요.’
이거 확실한 거 맞지?
아니면 나 완전 망하는 거라고!
보기에도 단단한 나무에 가까워질수록 키리아는 고통이 느껴질까 봐 겁이 났다.
하지만 이판사판, 눈을 꽉 감고 힘차게 달렸다.
“에이잇!”
나무와 키리아의 이마가 닿은 순간.
화악!
키리아의 몸은 고목과 부딪히는 대신 서늘한 지하의 공기를 갈랐다.
“엇. 으차차.”
힘차게 뛰던 발을 몇 걸음 더 가서야 멈춘 키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아무것도 없던 머리 위로 햇살이 비치는 문이 보였다. 거기까지 가려면 미끄러워 보이는 가파른 흙길을 올라가야 했다.
“거기 서!”
뒤로 마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헉, 아직도 쫓아와?’
키리아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볼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플루토의 경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절대 뒤를 돌아봐선 안 돼요.」
꿀꺽.
키리아는 마른침을 삼키고 오르막길을 기듯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몸을 숙이고 두 손으로 앞을 짚어야 했다. 허리를 폈다간 그대로 미끄러져서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고, 어느새 쫓아온 유령들의 목소리는 아주 가까워졌다.
우어어어―
그때였다.
유령들의 의미 없는 아우성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것은.
[키리아…?]
“……!?”
앞으로 전진하던 키리아의 동작이 우뚝 멈췄다.
제논의 목소리였다.
[이게 어떻게 된…. 키리아. 괜찮은 겁니까?]
떨리는 그의 목소리는 너무나 당혹에 차 있었다. 동시에 키리아를 향한 염려가 느껴졌다.
“고, 공작님?”
키리아는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공작님이 왜 여기 계세요?”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대를 구하러 온 겁니다. 그대가 며칠째 가사상태에서 깨어나지 않아서… 마탑주와 대신녀의 도움을 받아 영혼만 이곳으로 왔습니다.]
“가사상태요? 공작님의 영혼만 왔다고요?”
어라…?
가짜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그럴 듯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이런 상황이군요. 쫓기고 있는 겁니까?]
“네, 네에.”
[일단 나와 함께 가죠. 마탑주가 알려준 방법이 있습니다. 지금 그쪽으로 나가면 내가 그대의 영혼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건….”
하긴 플루토는 도망을 치는 방법을 알려준 것뿐이지, 무사히 몸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제논이 다시 말했다.
[내가 유령들을 막겠습니다. 그대를 확실하게 지킬 테니까 날 믿고, 어서. 이쪽으로 오십시오.]
“…알겠어요.”
[그래요. 내가 받쳐줄 테니까 안심하고….]
“당신이 가짜라는 걸 알겠어.”
키리아는 손안의 흙을 움켜잡았다.
“진짜 공작님이라면 날 안전하게 먼저 보냈을 거야. 위험을 무릅쓰고 이쪽으로 오라는 말이 아니라!”
[키리아, 나를 못 믿는 겁니까?]
“공작님을 믿으니까 하는 말이야! 비록 공작님은 나한테 정식으로 고백도! 프로포즈도 안 했지만! 결국 내가 먼저 고백했지만!”
말하다 보니 빡치는 기분이 들었다.
분노가 그라데이션으로 올라왔다.
“사실 먼저 고백 듣고 싶었는데! 분위기에 휩쓸리는 건 좋지만 정작 알맹이를 못 듣는 건 싫단 말이야. 먼저 알아주면 안 되는 거야? 결국 내가 일일이 말해야 하는 거냐고?”
키리아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흙을 한 움큼 집어 등 뒤의 유령들에게 뿌렸다.
“이제 나 좋다고 하는 사람이 줄을 섰는데 왜 정작 중요한 사람이 아무 말도 없는 거야. 행동도 좋지만 말로도 좀 했으면 좋겠어! 안 그럼 차버릴 거야!”
“…내가 미안합니다.”
“당연히 미안해야! …지?”
이번 목소리는 뒤가 아니라 앞에서 들렸다.
키리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환하게 쏟아지는 빛을 등지고, 제논이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로 키리아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