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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화 (135/141)

135화

마왕은 정말 열심히 키리아의 수발을 들었다.

중간 중간 ‘인간 따위를….’, ‘약해빠진 인간….’ 따위의 말을 투덜거렸지만 키리아의 기대 이상이었다.

그래서 키리아는 궁금해졌다.

“마왕이라도 동생을 정말 많이 아끼나보네.”

“뭐?”

“그렇잖아? 인간을 싫어하는 마족, 그것도 마왕이 동생의 치료를 위해 인간을 이렇게 돌본다는 게 말이야.”

이 말에 허탈한 얼굴로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플루토가 이쪽을 쳐다봤다.

내심 대답이 궁금한 눈치.

하지만 마왕은 키리아를 뚱하니 쳐다보며 대꾸했다.

“당연히 플루토는 살아야지. 그래야 녀석이 날 도울 수 있을 테고, 내 복수도 성공할 테니까.”

키리아는 슬쩍 플루토의 반응을 살폈지만 어느새 그는 모른 척 다시 눈을 감고 있었다.

마왕이 주먹을 불끈 쥐고 으르릉댔다.

“복수?”

“그래! 감히 나를 보잘것없는 검에 처박아놓은 그 인간 공작! 그 녀석만은 꼭 죽이겠어.”

“…혹시 란페르세 공작님 말하는 거야?”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군.”

허. 키리아의 얼굴이 새초롬해졌다.

그녀는 팔짱을 단단히 끼고 말했다.

“안마 그만 해도 돼.”

“왜? 하다가 멈추면 시원하지 않다. 5분 더 하는 게 좋을 텐데.”

“아니, 하지 마. 아무리 나한테 잘 대해줘도 공작님한테 복수하겠다는 계획에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을 거니까.”

마왕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공작과 너는 한 패지? 플루토에게 들어서 이미 알고 있다. 공작이 네 수하라고.”

“그래 맞…, 응?”

뭔가 순서가 바뀌었잖아?

“그런 수하라면 내가 얼마든지 만들어주겠다. 그뿐인가? 인간들이 쉽게 가지지 못하는 마계의 보물들까지 너에게 주지. 그러니 순순히 내 명령을 따라.”

“싫어.”

“내가 널 진짜 소멸시킨다고 해도?”

스산한 마왕의 물음에, 키리아는 움찔했지만 티내지 않고 되물었다.

“너도 동생을 꼭 구하고 싶잖아? 그 마음하고 같아.”

“동생이 아니라 수하일 뿐이다!”

마왕이 소리쳤지만 키리아는 처음 마왕을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날 향해 다급히 달려오면서 동생을 도와달라고 했었지.

그저 여기까지 데려오기 위한 연기로는 보이지 않았다. 마왕을 보니, 인간을 구슬리는 계략보단 힘으로 밀어붙이는 타입인 것 같으니까.

마왕은 키리아가 꿈쩍 않자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작은 손에 다시 한 번 키리아를 소멸시킬 만한 마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한 번 더 고통을 겪어봐야 생각을 바꿀 건가?”

“…….”

꿀꺽.

키리아는 마른침을 삼켰지만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마왕의 빨간 눈에 선명한 살기가 맺히기 시작하는 그때였다.

“폐하.”

말없이 있던 플루토가 점잖게 입을 열었다.

“인간에게 뭘 먹여야 하지 않을까요? 이곳의 음식을 섭취하면 영혼도 빨리 회복될 테죠.”

“말을 듣게 하려면 오히려 굶겨야 할 것 같은데.”

“인간의 영혼은 약하니까 폐하의 강한 힘에 언제 스러질지 모릅니다. 차라리 제게 맡기세요. 돌아오실 때까지 반드시 굴복시키겠습니다.”

“마음에 드는 대답이다.”

씩 웃은 마왕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빈 주전자와 양동이를 들었다.

“인간! 생각을 바꾸는 게 좋을 거다. 말을 듣지 않는 개는 살려둘 필요가 없으니까.”

“…….”

키리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나거나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마왕에게서 느껴지는 진심어린 살기에 몸이 굳어버린 탓이었다.

‘지, 진심으로 날 죽일 작정이구나!’

마왕은 키리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밖으로 나갔다.

“하….”

그가 사라지자 키리아는 저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을 뱉었다. 영혼 상태인데도 심장이 벌렁벌렁한 기분이었다.

º º º

오두막을 나온 마왕의 표정은 삐죽, 불만에 차 있었다.

“건방진 인간….”

투덜거리며 불을 피울 준비를 하던 마왕은 새삼스레 짜증이 났다.

저 인간이 말을 따를지 안 따를지 확실히 모르는 상태에서 은혜를 베풀자니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너도 동생을 꼭 구하고 싶잖아? 그 마음하고 같아.」

“…….”

플루토는 유능한 수하이지만, 녀석의 설득에도 인간은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다.

“성가신데.”

정말 소멸시켜야 하나?

그럼 또 누구를 데려와야 하지? 데려온다고 한들 플루토가 그때까지 멀쩡할까?

이런저런 걱정으로 머리가 아파올 때 쯤.

마왕은 오두막 바로 앞에 있는 저승의 강, 스틱스를 바라봤다.

스틱스 강물을 마신 자는 이승에서의 기억을 잊어버린다.

가만히 강을 쳐다보던 마왕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어차피 필요한 건 능력이니까… 인간의 기억 따위는 없어도 상관없잖아?”

º º º

“참, 당신도 나랑 있을 땐 약삭빠르더니 왜 이럴 땐 고집을 세우고 그래요?”

플루토가 쯧쯔 혀를 차며 웃었다.

“영혼째로 저승에 붙잡혀 있는데 비위 맞춘다고 뭐가 달라질까? 흥.”

“하지만 이대로 소멸하고 싶진 않잖아요?”

끙. 키리아는 입술을 오므렸다.

“…그건 그렇지만 공작님을 해치는 일에는 도움을 줄 수 없어. 이건 나를 위해서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기도 해.”

“그렇겠죠.”

짐작한다는 듯 플루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서 란페르세 공작을 죽이면 다시 전쟁이 일어날 테니까.”

그리고 그때야말로 제국은 정복당할지도 모른다.

제국엔 아직 제논에 견줄 만한 인재가 나타나지 않은 반면, 마계의 문에선 계속 마물이 쳐들어올 테니까.

“실은 나도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어…?”

키리아는 놀란 듯 플루토를 바라봤다.

“말했죠? 힘을 쓰느라 몸을 회복시키지 못했다고. 전 인간계에서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형, 아니, 폐하를 찾아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버텼는데….”

쓴웃음이 그의 얼굴에 걸려 있었다. 어쩐지 매우 피로한 모습이었다.

“정확히는 폐하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틴 겁니다.”

“…흥, 퍽이나.”

코웃음을 쳤지만 한편으로는 공감도 됐다.

왜냐면 나도 지금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걸.

“당신이 여기 있으면 폐하는 복수를 놓지 못할 테죠.”

플루토가 자리에서 일어나 키리아에게 다가왔다.

그런데 적당한 거리에서 멈추지 않고, 너무 가까운 거리까지 바짝 다가오고 있었다.

“어, 자, 잠깐….”

주춤, 벽 쪽으로 등을 붙인 키리아를 향해 플루토가 몸을 숙이며 벽에 손을 짚었다.

얼굴을 가까이 한 그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그러니 당신이 사라져주면 좋겠네요.”

“……!”

키리아의 얼굴이 굳어지려는 찰나 플루토가 생긋 웃었다.

“여길 탈출해서 말이죠.”

“…엥?”

“제가 도와드리죠. 폐하 몰래 저승을 빠져나가세요.”

“날 데려와 놓고 이젠 도망치게 도와준다고…?”

“그럴 수밖에요.”

플루토가 피곤한 얼굴을 했다.

“전 폐하의 명령을 따라야 하니까요. 하지만 전쟁도 피하고 싶어요.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려면 당신이 몰래 도망가는 수밖에 없죠.”

“하지만 넌 추기경을 이용하면서 메두사 꽃을 다뤘고, 마계의 문까지 제국에 불러들였잖아. 공작님을 마검으로 찔렀고.”

키리아가 의심스럽게 그를 추궁했다.

“그렇게 요란한 일들을 벌여놓고 날 놓아준다고?”

“난 인간들 사이에 뚝 떨어진 마족이었으니까요. 그게 내 최선이었습니다. 게다가, 목적만 이룬다면 일을 요란하게 벌이든 조용히 벌이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말하던 플루토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러다가 전쟁이 났다면 폐하께선 기뻐하셨겠지만요.”

“…….”

“어쨌든 제 목적은 어디까지나 폐하와 마계로 귀환하는 것이었어요. 몸도 아픈데다 황태자라는 지위까지 있는 제가 마계의 문을 찾아 여행할 순 없으니 당연히 소환해야 했고요. 이제 설명이 됐나요?”

“…혹시 놀브 후작이 마계의 문을 불러들인 사고를 일으킨 것도?”

“네. 제 실험이었어요.”

해맑게 대답하는 플루토를 보고 키리아는 기가 막혔다.

‘거기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다쳤는데!’

정말 자기 목적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았다.

“공작의 신체를 취하지 못한 건 아쉽네요. 오래 공들였는데.”

“…….”

키리아는 플루토를 쏘아봤다.

하나같이 괘씸한 말이긴 하지만 거짓 같진 않았다.

그렇다면 날 내보내준다는 말도 믿어봐야 할까.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만 물을게.”

“네.”

“내 치료가 필요하다면서, 날 보내도 괜찮은 거야?”

“그건 폐하의 복수를 위해 인간계에 계속 있어야 할 때 얘깁니다. 마계로 가서 몇 개월 요양하면 회복할 수 있어요.”

그렇구나.

“좋아. 어디 한번 도와줘 봐.”

“…어쩜 이리 얄밉지?”

“너는 이쁠까 그럼?”

“아, 됐어요. 빨리 가버리세요. 밖으로 나가면….”

플루토가 키리아의 귓가에 속닥였다.

밖에 있는 마왕을 의식해서인지 신중한 태도였다.

그가 일러주는 ‘저승을 나가는 방법’을 들을수록 키리아의 얼굴에 불신이 깃들었지만, 일단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플루토가 키리아의 귓가에서 떨어지며 말했다.

“그리고 한 가지 꼭 지켜야할 게 있어요.”

“지켜야할 것?”

“저승을 빠져나갈 때 절대로 뒤돌아보지 마세요.”

경고를 하는 플루토의 표정이 더없이 진지했다.

“정말로 저승의 주민이 되고 싶지 않다면.”

“…아, 알았어.”

살짝 겁을 먹은 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더니 마왕이 키리아를 불렀다.

“인간. 잠시 나와 봐.”

마왕의 붉은 눈이 짓궂고 잔인하게 빛났다.

“네가 도와줘야 할 일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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