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깜박깜박.
키리아는 크게 뜬 눈을 연신 깜박거렸다.
눈앞의 풍경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여기 어디지?”
연보랏빛 낮은 풀들로 가득한 땅. 곳곳을 유유히 떠도는 정체 모를 작은 불빛들 덕분에 주위는 어둡지 않았다.
처음 보는 신비로운 장소인데, 바로 앞에 다리가 놓인 강이 있어 더욱 분위기가 묘했다.
강폭은 넓지 않고 물살도 잔잔해 보였지만, 수면 아래가 보이지 않았다.
“꽤 깊은가 보네…. 조심해야겠어.”
강을 들여다보는데 무언가 이상한 얼룩이 두둥실 떠올랐다.
“어?”
왠지 얼룩들이 눈코입을 갖춘 것 같은….
“히익!”
사람 얼굴?!
키리아는 후다닥 뒤로 물러났다. 다행히 유령 같은 형체는 금방 사라져버렸다.
“대체 뭐야, 여긴?”
그러고 보니 강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들이 모두 보랏빛 반점이 있는 검은 꽃이다.
날 쓰러뜨린 수상쩍은 꽃!
하지만 이번에는 몸에 아무 이상도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그러고 보니 나, 온실에서 쓰러졌는데…. 여기도 신전의 다른 공간인가? 공작님―!”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를 제논을 소리 높여 불러봤다.
키리아는 잠시 귀를 기울였다.
“…혹시 이거 꿈인가? 근데 왜 이렇게 생생해?”
슬슬 오싹해지려는 때.
다리 건너편에 누군가가 나타났다.
“어!”
키리아가 빤히 바라보자, 그 아담한 인영은 키리아를 향해 오도도 뛰어왔다.
까만 머리카락에 새빨간 눈을 지닌 대여섯 살 남짓의 소년이었다.
“이제 왔군! 늦었잖아!”
“엥? 너 나 알아?”
“당연히 알지, 인간.”
소년이 당황한 키리아의 소매를 잡아끌기 시작했다.
“한참 기다렸다고. 빨리 가자.”
“어딜?”
“저기.”
소년이 가리킨 곳은 강 맞은편에 있는 작은 오두막집이었다.
소년이 조급하게 재촉했다.
“빨리 오란 말이다. 정말 인간은 느리네. 내 동생이 엄청 아파한다고.”
“동생이…? 많이 아파?”
“죽을지도 몰라.”
그 말에 꼬마의 채근에도 꿈쩍 않고 있던 키리아가 걸음을 옮겼다.
꼬마보다 어린 애가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약제사로서 가만히 있을 순 없었으니까.
여기 혼자 있어봐야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알았어. 어서 가자.”
키리아는 다리 앞에서 멈칫했지만 곧 꼬마의 재촉에 따라 강을 건넜다.
꼬마가 먼저 오두막집의 문을 벌컥 열었다.
“데려왔어!”
꼬마는 침대 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 누군가를 향해 다다닷 뛰어갔다.
키리아도 뒤따라 침대 위 꼬마의 동생을 바라봤는데….
“어, 어어? 당신!”
경악한 키리아가 부들부들 손가락질을 했다.
“오.”
침대에 앉아 있는 꼬마의 동생이 싱긋 웃었다.
은발에 붉은 눈.
꼬마의 동생이라기엔 너무 어엿한 청년의 모습인 이 남자는―
“오랜만이네요?”
황태자로 변장해 있었던 마족, 플루토였다.
플루토가 손까지 흔들며 가볍게 인사하자 키리아는 열이 받았다.
성큼성큼!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멱살을 틀어잡았다.
“그쪽이 날 납치한 거야? 공작님을 죽을 뻔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이런 짓까지 해?”
“…지금 마계 대공인 내 멱살을 잡은 겁니까?”
“이 상황에 내 사정보다 그쪽 멱살의 안위를 존중할까 그럼?”
지금도 공작님이 검에 깊이 꿰뚫린 장면과, 그 후 죽을 뻔한 일을 생각하면 눈앞이 빨개졌다.
게다가 날 해치려면 진즉 했겠지, 번거롭게 납치를 했겠어?
키리아는 플루토의 멱살을 짤짤짤 흔들어댔다.
“당장 날 돌려보내줘. 돌려보내라고오!”
“으으윽, 그만 좀 흔들, 우욱.”
플루토는 마치 종이인형처럼 팔랑팔랑 키리아의 손아귀에서 흔들렸다. 그러더니 울컥 각혈을 했다.
“콜록콜록!”
“뭐 하는 거야!”
꼬마가 키리아를 팍 밀치고 플루토에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아우야, 괜찮아? 저 인간 소멸시킬까?”
“아뇨, 그건 안 되죠…. 시킬 일이 있잖아요.”
“아 그렇지.”
“…….”
너무 태연한 꼬마의 말에 키리아는 순간 등골이 쭈뼛했다.
저 허약 마족의 멱살은 또 잡을 수 있지만, 이 꼬마 녀석은 주의해야 할 것 같았다.
키리아는 화를 누르고 침착하게 물었다.
“…시킬 일이 뭔지 짐작이 가네. 나더러 그쪽을 치료하라는 말이겠지?”
플루토는 입가의 피를 닦고 창백한 안색으로 대답했다.
“맞아요. 안 그래도 약해진 상태에서 신목의 신성력을 정통으로 맞은 탓에 정말 위험해졌거든요.”
“거절할게.”
키리아는 딱 잘랐다.
“내가 그쪽을 도와줄 이유를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거든.”
마음 같아선 여기서 말을 끝내고 싶었지만, 키리아에겐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쪽이 가져간 마검을 돌려주고 날 무사히 돌려보내준다고 약속하면 조금은 도와줄 수 있어.”
공작님의 완전한 치료를 위해선 마검이 필요했으니까.
플루토가 재밌다는 듯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마검이라면 바로 앞에 있잖아요.”
“뭐? 없잖아?”
“몰라요? 마검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
그러고 보니….
‘저 마족, 마왕과 형제라고 하지 않았었나?’
키리아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의 놀란 눈이 반항적인 꼬마의 눈빛과 마주쳤다.
꼬마가 사나운 눈초리를 게슴츠레 떴다.
“인간 주제에 마계의 왕을 내려다보다니, 사형당하고 싶은가 보군.”
“이곳은 마계의 경계와 가까운 저승이에요. 덕분에, 폐하는 답답한 검에서 모습을 변화하실 수 있게 됐죠.”
“그렇…, 잠깐, 뭐라고? 방금 저승이라고 했어?!”
“그래, 맞다.”
꼬마 마왕이 의기양양하게 제 팔짱을 꼈다.
“이제 알아차린 거냐? 역시 인간은 둔해. 여긴 저승이야. 넌 영혼이고.”
“여, 영혼이라니? 나 이렇게 현실감 엄청나게 잘 살아있는데!”
“아니. 넌 죽어있어. 망각의 꽃으로 데려온 거니까 확실하단 말이다.”
“……!”
키리아는 그만 딱 굳어버리고 말았다.
저승이라니? 내가 영혼이라니!
그 생고생을 해가며 내 꽃길 내가 다 깔아놨더니 뭐라고? 내가 없으면 리안은!
공작님은!?
키리아의 반응이 흡족했는지 마왕이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니까 더 험한 꼴 당하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내 말을 들어. 당장 내 동생을 치료하도록 해.”
“…….”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키리아가 시선을 들어 마왕을 노려봤다.
“내가 미쳤어?”
“뭐?”
“이미 죽었는데 내가 왜 너희 요구를 들어주겠어? 안 해. 죽어도, 아니, 죽었으니까 절대로 안 해!”
“이게…!”
으득, 이를 악문 마왕의 몸에서 사나운 마기가 치솟았다.
어린아이로 몸을 구현하는 게 한계일 정도로 약해진 마왕이지만, 평범한 키리아의 숨통을 조이기에는 충분했다.
“꺄악! 컥.”
마기를 맞은 키리아는 비명을 질렀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 털썩 무릎을 꿇었다.
마왕이 그런 키리아를 내려다보며 오만하게 웃었다.
“네 주제를 잘 파악했어야지. 더 아프고 싶지 않다면…. 응?”
말하던 마왕이 멈칫했다.
키리아의 몸이 선명해졌다 흐릿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어…? 왜 소멸 반응이…?”
“폐하!”
플루토의 질책 섞인 부름에 꼬마 마왕이 얼른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아, 아냐! 소멸시킬 만한 힘이 아니었단 말이다! 그냥 겁주려고 아주 쪼끔 힘을 방출했던 거다!”
그런데도 키리아는 소멸 직전의 영혼처럼 흐릿흐릿했다.
마왕은 여러 인간을 상대해봤다.
하지만 그 인간들은 전부 전쟁에서 부딪힌, 오러를 쓰거나 마법을 쾅쾅 부리거나 신성력을 번쩍거리는, 소위 한 가닥 하는 놈들이었다.
키리아처럼 극도로 평범한 인간은 처음이었기에, ‘힘을 살짝 보여 준다’가 너무 과했단 걸 뒤늦게 알았다.
“콜록, 콜록… 으으.”
키리아는 기침을 했다.
‘아, 아파….’
하지만 다행히 상태가 빠르게 회복되는 게 느껴졌다. 큰 충격을 받아 일시적으로 몸이 흐릿해진 모양이었다.
‘좀만 누워있자….’
털썩.
기운이 없어서 바닥에 쓰러지다시피 누웠는데.
“아, 안 돼! 인간!”
꼬마 마왕이 거의 울부짖으며 키리아의 옆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키리아의 몸을 두 손으로 흔들어댔다.
“인간, 죽지 마라! 내 동생을 구할 사람은 너밖에 없단 말이다! 제발 죽지 마아아!”
아, 시끄러….
키리아는 다급한 얼굴의 마왕을 게슴츠레 보다가 눈을 딱 감아버렸다.
깨꼬닥.
보란 듯이 고개도 털썩 떨궈줬다.
“인가아아안! 내가 미안하다아아!”
마왕이 결국 뿌엥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아주 쌤통이었다.
º º º
키리아는 플루토의 맞은편 침대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누워 있었다.
그런 키리아의 옆에는 마왕이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키리아의 팔을 통통 두드려 안마하면서.
“영혼 상태가 좀 어때? 소멸하진 않을 거 같지?”
“으음…. 잘 모르겠지만 이번엔 이쪽 팔이 아픈데….”
“이쪽? 알았다.”
통통.
“아! 너무 아프잖아!”
“이, 이 정도도 아프다고? 으으, 정말 인간은 성가셔!”
“아, 네가 소리쳐서 귀가 아파. 어지러워….”
“이이익…! 알았어…, 알았다고….”
소곤거리면서 마왕은 안마하는 손에 조심스럽게 힘을 뺐다.
마족이, 그것도 마왕이 한낱 인간의 시중을 들다니 자존심이 매우 상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여기엔 마땅히 대신 시킬 만한 놈도 없었고, 이 인간은 반드시 살려둬야 했으니까 말이다.
“…….”
플루토가 기가 막힌 얼굴로 키리아를 쳐다보고 있었다.
키리아는 뚱한 얼굴로 혀만 삐죽 내밀어 보였다.
메롱이다, 이 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