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키리아가 전담한 환자 목록에 ‘석상’이 추가되었다.
‘뭐, 정확히는 아직 살아 있는 석상이지만.’
키리아는 곱게 눕혀져 있는 황태자의 석상을 내려다봤다.
최고급 침대 위에, 얻어맞을까봐 얼굴을 두 팔로 막고 있는 듯한 포즈의 황태자.
덕분에 훤히 드러난 가슴이 보였다.
확실히 심장 부근만 돌이 되지 않았다.
함께 황태자를 구경, 아니, 살펴보던 제논이 말했다.
“그 마족이 일부러 살려두었던 모양이군요.”
“왤까요?”
“감히 마족이 제국의 황태자를 해한다고! 절대 있을 수 없다! 마족이라도 황태자를 해하는 것에는 겁을 먹은 것이다!”
황제가 분개하며 끼어들었다.
씩씩대는 황제를 눈짓하며 제논이 간단히 대답했다.
“만일을 위한 보험이었을 것 같군요. 황제의 성격을 잘 알았을 테니.”
“아….”
키리아도 황제를 힐끗 보고 납득했다.
황제는 석상이 된 황태자를 직접 본 후 줄곧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지금은 겨우 그쳐서 눈시울만 시뻘건 상태다.
황제는 태연해 보이는 키리아와 제논을 노려보다 겨우 숨을 골랐다.
“그래서, 키리아. 대답해보라. 그대가 황태자를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는가?”
“음…. 솔직히….”
키리아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그에 황제의 표정은 몇십 배 더 어두워졌다.
황제의 반응을 확인한 키리아는 방금 것은 장난이었다는 듯 방긋 웃었다.
“그럼요. 아직 살아계시잖아요. 할 수 있어요.”
“허어…!”
황제는 감히 자신을 갖고 논 키리아에게 화를 낼 뻔했지만, 한편으로 그녀의 대답에 안도했다.
그는 애써 분노를 가라앉혔다.
기사단장의 말대로 메두사 병의 전문가는 키리아뿐이다. 황태자를 살릴 유일한 인물의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
지금만큼은 황제인 자신이 약자였다.
“원하는 것이 있겠지. 말해보라.”
“뭐든지 다 들어주실 건가요?”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원하는 바를 알겠군. 좋아. 알겠네.”
“네? 정말요?”
“그래. 내 아들과의 혼인을 허락하겠네.”
컥. 키리아는 목 막힌 소리를 내고 말았다.
“지금의 그대라면 황태자비가 된다고 해도 반대할 이가 없겠지. 내 아들이 좀 아깝긴 하지만….”
“…….”
황제가 말을 이어갈수록 제논의 눈이 번뜩이며 갈고리 같은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키리아는 얼른 제논의 손목을 붙잡고 어색하게 웃었다.
“하, 하하…. 아뇨, 제가 원하는 건 그보다는 더 소박한 거예요.”
“그런가?”
다소 밝아진 황제의 표정.
하지만 그의 얼굴은 이어진 키리아의 말에 무참히 구겨졌다.
“란페르세 공작가와 마법으로 맺은 충성 계약. 제가 원하는 건 그거예요.”
“…키리아.”
제논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란 그에게 키리아가 싱긋 웃었다.
“공작님은 정말 나 없으면 안 되겠다. 그죠?”
그러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
쿵.
제 가슴께 옷깃을 꽉 붙잡는 제논. 얼굴까지 발그레 붉어졌다.
그 모습이 꼴 보기 싫었던 황제가 에잇, 성질을 내며 말했다.
“그래, 그 충성 계약의 파기를 원하는 것이군? 좋아. 당장 파기해주지.”
황제가 손을 펴자 그 위로 오래된 양피지가 나타났다.
오래전 란페르세 공작가와 선대 황제가 맺은 충성 계약서였다.
공작가를 더 이상 호구 같은 지갑으로 이용해먹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 그동안 많이 빼먹었다.
이미 소유권이 황실에 귀속된 것들은 공작가가 다시 가져갈 명분도 없었다.
그러니 황제로선 계약 파기가 아쉽긴 해도 전혀 손해는 아니었다.
그가 막 양피지를 힘껏 찢어버리려 했을 때였다.
“잠깐만요. 전 파기하자고는 안 했는데요?”
“음?”
“아깝잖아요. 계약서 내용이 너무 마음에 드는데.”
키리아가 깃펜을 들었다.
“그러니까 수정해요.”
“수정…?”
키리아가 방긋 웃었다.
“황실과 공작가의 위치를 바꿔요.”
계약서 상의 갑과 을의 위치를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뭐, 뭣…!”
“가능하죠? 셜론 님.”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셜론이 곧 히죽히죽 웃음을 머금었다.
본인이 키리아의 양아치 짓에 당할 때는 억울했는데, 황제가 당하는 걸 보니까 꿀맛이었다.
“물론이오. 계약의 주체인 황제의 승인만 있다면 수정하는 건 어렵지 않소. 내가 도와주지.”
“하, 하, 하지만 이 계약은…! 이걸 그렇게 수정하면 황실의, 아니 제국의 재산이 공작가의 것이나 다름없게 되는뎁!”
황제는 당황한 나머지 혀를 깨물었다. 하지만 신경 쓸 틈도 없이 절박하게 제논을 쳐다봤다.
“공작. 정녕 공작이 원하는 바가 이런 것인가?”
제논의 충심을 일깨우는 준엄한 어조.
이에 제논이 똑같이 준엄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공자악!”
“걱정 마십시오. 황실에 무언가를 요청하는 건 저 개인이 아니라 공작가와 공작령 전체를 위할 때뿐일 테니까요. 지금 계약도 그렇지 않습니까?”
다만 이런 명분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긴 하지만 말이다.
“으으으!”
황제는 부들부들 떨며 키리아와 제논을 대역죄인 보듯 노려봤다.
선대 황제들이 대대로 유지해 온 광영이 내 대에서 이렇게 무너지다니!
그는 입술을 콱 깨물었지만….
“…….”
석상이 된 황태자를 보자 분노에 찼던 표정이 허탈하게 풀렸다.
한참 침묵 끝에 그가 펜을 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새롭게 바뀐 충성 계약서가 제논의 손에 쥐어졌다.
º º º
제국의 모든 신문사가 바쁘게 헤드라인을 찍어냈다.
[석상에서 구사일생, 돌아온 황태자!]
[제국의 은인이 다시 한번 기적을 일으키다… 진짜 황태자 전하가 돌아오다]
[‘검은 3일’의 영웅 키리아 클로버필드가 1급 대훈장을 받다]
[남부에 진출하는 메데이아의 또 다른 가게. 치맥 열풍 오나?]
[돌아온 인마전쟁의 영웅을 맞이하는 사람들, “마물병은 타락이 아닌 영웅의 흉터”]
키리아는 집사가 가져온 신문들의 1면을 모두 훑어보고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검은 3일’과 훈장 수여식 이후 며칠이 더 지났는데도, 신문에서 보듯이 키리아와 제논을 향한 열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이쯤 되면 지겨워할 만도 한데. 안 그래요?”
“아가씨께서 시기적절하게 사업을 계속 일으키신 덕분에 기삿거리가 계속 생기기 때문이기도 하지요.”
집사가 흐뭇하게 대답했다.
그의 말대로 키리아는 물이 들어올 때 힘껏 노를 저었다.
가게의 할인 이벤트도 공격적으로 했고, 황실치료사로서 메두사 병이 아직 낫지 않은 환자들을 공개적으로 방문했다.
메데이아로서 구박받던 시절을 다룬 자서전과 함께, 독초의 실용적인 사용법을 다룬 책을 동시 출간하기도 했다.
게다가 키리아 혼자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앞장서서 키리아에 대한 칭송을 퍼뜨리면서, 평민과 귀족 모두에게 키리아는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조앤의 소설 <마법학교의 아리키>가 남부에서 전격 출간되어 초판에 증쇄까지 완판을 찍는 기염을 토했다.
이 책 덕분에 키리아에게 큰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키리아에게 스며들며 팬클럽까지 생겼다.
집사가 선물 목록을 내밀었다.
“팬클럽 회원들의 조공 목록입니다.”
공작성 마물들의 조공을 남부에선 이들이 대신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아가씨를 뵙길 청하는 사람들이 연일 늘고 있습니다. 대기자 목록은 이걸 참고해 주십시오.”
“고마워요. 근데 오늘은 손님을 못 받을 것 같아. 가볼 데가 있어서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이미 약속된 일정이 있었기에, 키리아는 우아한 드레스 숄을 세련되게 설치고 저택의 현관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그녀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던 많은 팬들과 신문기자들이 보였다.
“꺅! 키리아 님!”
“레이디 키리아! 북부에서 유행하는 치맥의 남부 진출에 대해서 한 말씀….”
“란페르세 공작님과는 어떤 관계이신가요?”
“공작님이 데릴사위라는 말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현관에서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일직선으로 향하는 키리아에게 밀려드는 사람들.
키리아의 주위를 기사들이 보호하며 치대는 사람들을 밀어냈다.
“네, 감사합니다. 네네.”
키리아는 팬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돌려주며 서둘러 마차 가까이 왔다.
안에서 문이 열리며 흰 제복과 망토를 갖춰 입은 훤칠한 남성이 내렸다.
제논이었다.
“꺄아악! 공작님! 잘생겼어요!”
“공작님! 클로버필드 백작가와의 향후 관계에 대해서 한말씀 해주시죠!”
제논에게 밀려드는 사람들을 이번에도 막아서는 기사들.
두 팔과 얼굴 한쪽이 검은 마물의 모습임에도 제논의 흰 제복은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그의 빛나는 외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제논 본인의 당당한 태도 덕분이기도 했다.
“아름답군요, 키리아.”
“공작님도요.”
제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키리아가 마차에 올랐다.
제논이 맞은편에 앉자 기사가 문을 닫았고, 마차가 출발했다.
그제야 키리아는 조용함을 느끼고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바깥이 난리네요, 정말. 한밤중에도 시끄러울 때가 많다니까요.”
“그대는 제국에서 가장 빛나는 유명인사가 되었으니까요. …가장 인기 있는 신붓감이 되기도 했고.”
웃고 있는 제논의 눈가가 미묘하게 꿈틀거렸다.
하지만 키리아는 딴생각을 하느라 눈치 채지 못했다.
‘공작님의 팔은 그대로야….’
모든 일이 잘 풀리고 있었지만, 제논의 마물병만은 전보다 악화된 상태였다.
마왕의 힘이 강해진 덕분에 공작성 마물들을 다시 돌려보낼 수 있어서 편했습니다…, 라고 공작님은 말했지만.
‘마물병이 이대로 남아 있으면 폭탄을 안고 있는 거나 다름없어.’
어떻게든 완전히 치료를 해야 했다.
‘그리고 좀 불안하단 말이지.’
마계의 문은 임시 봉인된 채 신전 가까운 곳에 남아 있었다.
제논과 마검, 그리고 마계의 문은 비틀린 봉인 마법진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
지금은 괜찮다지만 언젠가 이 연결 때문에 예상치 못한 큰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마검을 그 마족이 가져가버려서 일이 복잡해졌으니…. 다른 방법을 알아봐야 하는데.’
생각을 정리한 키리아는 문득 제논을 바라봤다.
그는 시선을 내린 채 혼자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잘 들어보니….
“맹…, 취소, …세 철회, 이게 아닌가. 왕의 이름으로…. 파기! …젠장.”
“…뭐 하세요?”
“맹…, 으윽.”
대답하려던 제논이 무언가에 목이라도 막힌 듯 침음했기에 키리아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마차는 목적지인 신전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