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마탑의 마법사들과 교단의 신관들은 정신이 없었다.
지상에서는 마기가 도무지 옅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석화에 걸린 사람들은 늘어났으며, 그중 가고일로 변하는 이도 속출했다.
뿐만 아니라 마계의 문에서 포악한 마물들까지 계속 나타났다.
마물을 상대하기에도 급급한 상황.
이렇다 보니 평민은 물론이고 귀족들 역시 결코 안전하지 못했다.
“꺄악! 누가 좀 도와주세요!”
한 귀족 여인이 소리를 질렀다.
“어, 어머니!”
어린아이가 땅바닥에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덜덜 떨고 있었다.
아이와 귀족 여인을 가로막고 있는 건 가고일이었다.
아이는 가고일을 피해 건물의 좁은 틈새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갔다.
그러자 가고일은 벽을 부숴가며 아이를 끄집어내려고 난동을 부렸다.
“아아!”
보다 못한 귀족 여인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달려가려 했다.
그녀를 곁에 있던 시녀가 붙잡았다.
“안 됩니다, 마님! 가시면 큰일 나세요…!”
“내 아이가 저기 있는데 어떻게 안 갈 수가 있어!”
결국 가고일이 아이의 팔을 붙잡았다. 아이는 가고일에게 무자비하게 붙들려 함께 공중으로 떠올랐다.
“으아악! 어머니! 살려주세요!”
“안 돼! 누가 도와줘요! 제발, 아, 신이시여!”
여인이 흐느끼며 울부짖었다. 그녀를 붙들고 있는 시녀도 눈물을 참지 못했다.
그때였다.
“크퓽!”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촐싹대는 소리가 나더니 어디선가 날아온 작은 포탄이 가고일의 뒤통수에 명중했다.
딱!
“케륵!”
“켁!”
포탄 역할을 한 임프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두개골을 아끼지 않은 공격 덕분에 가고일도 붙잡고 있던 아이를 놓쳤다.
아이는 높은 공중에서 추락했다.
“으아아!”
이번엔 커다란 새가 아이를 향해 쏜살같이 날아들었다.
그러더니 크고 부드러운 깃털로 아이를 감싸 사뿐히 착지했다.
“피루루.”
아이를 내밀며 생긋 웃는 하피.
귀족 여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마, 마물…?”
“마님, 저길 보세요!”
시녀가 가고일을 가리켰다.
임프들이 가고일의 얼굴에 들러붙어 시야를 가렸고, 포이즌 리저드가 입에서 내뿜은 독액으로 가고일의 몸체를 부식시켰다.
그러면 다른 포이즌 리저드가 부식된 부분을 강하게 찍어 돌을 쪼개버렸다.
이런 합동 공격으로 위협적이던 가고일이 금방 무력화됐다.
마물답지 않은 전략적인 움직임.
누가 지시라도 한 걸까?
마물들은 놀라움에 할 말을 잃은 인간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코를 킁킁거렸다.
“여기 메두사꽃 찾았음!”
“나도 찾았음!”
그러면 포이즌 리저드가 서둘러 와서 독액으로 메두사 꽃을 녹여버렸다.
“여기 끝!”
“다음 장소로 이동!”
할 일을 마친 그들은 나타났던 것처럼 우르르 사라져버렸다.
귀족 여인은 멍하니 시녀에게 물었다.
“저 마물들은 대체 뭐지? 왜 우릴 구해준 거야?”
“저, 저도 잘은 모르지만… 저 마물들은 은색 갑주를 착용하고 있었어요. 제가 알기로 그런 차림을 한 마물은 북부 공작의 휘하 마물밖에 없습니다.”
“마물이 공작의 명령으로 우릴 돕는다는 건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
이때 커다란 그림자가 그들의 위로 드리워졌다.
고개를 든 귀족 여인과 시녀는 깜짝 놀랐다.
어둠 속에서도 하얗게 빛이 나는 백룡과, 백룡을 탄 기이한 팔을 가진 남자.
란페르세 공작이었다.
아이를 안은 채 제논을 올려다보고 있던 여인과 제논의 눈이 한순간 마주쳤다.
제논의 시선은 그녀를 무심히 지나쳐 앞을 향했다.
백룡이 바람을 일으키며 멀어져갔다.
먼저 정신을 차린 시녀가 귀족 여인을 일깨웠다.
“마님,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신전으로 가요. 어서요.”
“…돌아왔어.”
“네?”
귀족 여인의 눈빛에 감격과 존경이 차올랐다.
“인마전쟁의 영웅이 돌아왔어!”
º º º
제논이 마물들을 이끌고 참전하면서 전세가 확연히 뒤바뀌기 시작했다.
공작성의 마물들은 그 수가 굉장히 많았고 개체 하나하나가 강했다.
그도 그럴 게, 공작성 일대의 힘깨나 쓴다는 마물들이 모두 대세를 따라 공작성의 기사가 되려고 모였었으니까.
그중에서도 쓸 만한 머리와 개념을 가진 놈들이 교육을 받아 기사가 된 것이었다.
서열 1위인 키리아를 따라 제논을 왕으로 인정한 건 물론이고,
“인간들은 우리 왕의 부하!”
“왕의 부하가 많아야 왕도 강해진다! 그러니까 지킨다!”
이런 논리로 인간을 돕는 것에 적극적이었다.
이들 덕분에 메두사꽃의 수가 빠르게 줄어들었다.
“마기가 조금씩 옅어지는 것이 느껴지는군요.”
“석화에 걸리는 환자들도 줄겠죠…. 정말 다행입니다.”
마법사와 신관들이 겨우 한숨을 돌렸다.
셜론과 대신녀는 의논 뒤 휘하의 인력을 일부 나누었다.
“마기가 계속 약해지면 마계의 문이 또 다른 곳으로 이동될 것이다. 지금부터 마법사와 신관의 협동으로 마계의 문을 임시봉쇄하고 이동을 붙잡아둔다.”
“네!”
명령을 받은 마법사와 신관들이 신속하게 이동했다.
이때 한 신관이 대신녀에게 물었다.
“대신녀님, 환자들은 어떻게 할까요? 석화가 상당히 진전된 환자들에겐 신성력이 잘 듣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신녀는 망설임 없이 지시를 내렸다.
고개를 끄덕인 신관은 환자들에게로 돌아왔다.
신관을 기다리는 환자들은 모두 몸의 절반 가까이 석화가 진행된, 상태가 위중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절박하게 신관을 바라봤다.
“신관님, 저희 치료될 수 있는 겁니까?”
“마물로 변하기 싫어요…!”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
신관이 남은 희망은 하나뿐이라는 듯 비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클로버필드 백작저에 있는 키리아 치료사를 찾아가시는 겁니다.”
“키리아….”
그 이름이라면 들어본 적이 있었다.
‘메데이아’라는 가게를 낸 유명한 독초 약제사가 아닌가.
“여러분의 병을 치료할 사람은 이제 그분밖에 없어요.”
“……!”
“저희가 호송하겠습니다. 석화가 심각한 환자들은 어서 마차에 오르십시오!”
“…저, 저 먼저요!”
“저도 가겠습니다!”
환자들이 앞다투어 클로버필드 백작저로 가는 마차에 올라탔다.
달리는 마차 위에 있는 환자들은 평민과 귀족이 섞여 있었다.
사태가 급하다보니 구분할 여유가 없었고, 환자들 역시 불평할 생각을 못했다.
다만 그들은 한 가지만을 공통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키리아 클로버필드, 키리아 클로버필드….”
모두의 뇌리에 한 사람의 이름이 간절하고도 선명하게 각인되고 있었다.
그리고 사태가 진정되는 사흘 뒤.
제도 사람들 중 황제의 이름은 몰라도 키리아 클로버필드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º º º
“마계의 문은 임시로 봉인된 상태이지만…, 제 힘으로도 오래 버틸 수는 없어요. 서둘러 새로운 봉인 마법을 걸어야 하는데, 이에 소모되는 마정석이 막대할 것으로 보입니다. 저희 신관들은 이번 사태 때문에 모두 지쳐서….”
그러니 마정석 전부 지원해주시길.
대신녀의 말이었다.
“우리 마탑 또한 마찬가집니다. 마나가 소진되고도 힘쓰느라 마정석 재고가 많이 줄어서요. 바로 제국을 돕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니 당장 보상하고 마정석도 내놔.
마탑주 셜론의 말이었다.
마지막으로 키리아가 말했다.
“사태를 진압한 공신들에게 당연히 훈장을 수여하시겠죠? 공작님은 물론 저의, 아니, 공작님의 마물 기사단도 잊으셔선 안 돼요.”
이들의 말을 듣고 있는 황제는 불편하게 입술을 씰룩거렸다.
마계의 꽃이 개화하면서 일어난 ‘검은 3일’사건 이후, 교단과 마탑은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고 나섰다.
보상을 받아야 마땅한 것은 키리아와 제논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제도는 아직도 마물들에게 시달리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다른 의미로 사태가 종결됐을 수도 있었다.
황제 역시 이 점을 모르지 않았다.
“물론 보상을 하겠소. 하지만 마탑과 교단에 마땅한 보상과 보답을 하기에는 황실의 재정이 부족할 터이니….”
그러며 무표정한 얼굴의 제논을 불렀다.
“란페르세 공작. 그대가 도움을 줄 수 있겠지?”
“…….”
“제국과 황실을 위한 일이네. 그대가 발 벗고 도와줄 거라 믿네만.”
제논이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 계약을 들먹일 줄 알았다.
황실과 제국을 위한다는 명분이 서면 제논도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거부한다면 어떤 대가를 치를지 몰랐다. 신목이 한때 모습을 감췄던 것처럼 말이다.
“신목의 맹세 때문에 놀브 후작의 많은 재산이 그대의 것이 되었다지? 또, 키리아 양과의 사업으로 번 수익도 상당하고…. 생명석은 마정석으로도 쓸 수 있는 모양이던데.”
“잠깐만요, 폐하….”
대신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나섰다.
셜론도 못마땅하게 입을 열어 한 마디 하려고 했다.
‘응?’
그런데 그때, 그는 황제를 한심하게 보면서도 입술에 미소를 띠고 있는 키리아를 발견했다.
‘으응?’
이제 보니 제논도 그다지 곤란한 기색이 아니었다. 황제를 보는 표정이 어울리지 않게 짓궂어 보였다.
셜론의 의문은 곧 풀렸다.
키리아가 황제의 앞에서 건방지게 팔꿈치를 탁상에 대고, 손으로 턱을 괴었다.
“폐하? 그 발언, 후회 없으시겠어요?”
“키리아 양…! 지금 짐 앞에서 무슨 방만한 언행인가!”
“일단 소식 먼저 듣고 꾸짖으시죠.”
키리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폐하. 회의 중 죄송합니다. 긴급히 보고드릴 사안이 있습니다.”
들어온 이는 황궁 기사단장이었다.
“말하라.”
“황태자 전하의 석상이 발견되었습니다.”
“뭣…!?”
덜컹!
의자가 뒤로 넘어갈 정도로 황제가 벌떡 일어났다.
“화, 황태자가 발견되었다고? 그런데 석상이라니? 이미 석상이 되었단 말이냐?”
“…예.”
“아아…!”
황제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렸다.
기사단장이 재빨리 덧붙였다.
“하지만 가슴 일부분만은 석화가 되지 않았습니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곳입니다.”
황제는 절망과 희망이 뒤엉킨 얼굴로 기사단장을 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결론을 말해라 결론을! 알렌스는 대체 죽었단 말이냐 살았단 말이냐?”
“그건….”
줄곧 침중해 있던 기사단장은 표정을 단단히 굳히며, 다른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석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분에게 달려있을 듯합니다.”
바로 키리아였다.
예상했던 바라는 듯 키리아가 여유만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메두사꽃을 수색하던 마물들이 황태자를 찾았다고 알려줬었지롱.’
황제를 약 올리듯 씩 웃었다.
“그럼 폐하. 조금 전 보상 이야기를 다시 진행해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