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폐하! 빈민가를 중심으로 사람들에게 석화가 번지고 있습니다!”
“그것보다 마기가 큰일입니다. 치명적인 농도의 마기가 계속 번지고 있습니다!”
헐레벌떡 들이닥친 보고에 황제는 인상을 구기며 소리쳤다.
“그러면 빈민가를 봉쇄하면 될 게 아닌가!”
그러나 신하들이 명을 받들기도 전에 또 다른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일일이 허가를 받고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중대한 사안이라는 뜻이었다.
“폐하, 에메랄드 가든과 중앙 광장 등에서도 마기와 석화 증상이 불길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황궁도 위험합니다! 어서 자리를 피하심이…!”
“폐하! 석화에 걸린 사람들이 마물로 변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폐하!”
“폐하!”
으으으!
황제는 혈압이 올라 시뻘게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그대들은 내가 하명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르는가? 빈민가를 봉쇄하든 기사들을 파견하든 응당한 조치를 하라!”
“…예!”
보고를 올리던 신하들은 물러갔지만, 문 뒤로 더 많은 이들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들일 때까지 아무도 들이지 말라!”
마침내 혼자 남게 된 황제는 깊은 탄식을 뱉었다.
“공작이 마물병에 굴복해 마물로 변하길 바랐긴 했지만, 하필 이런 식이라니… 끝까지 도움이 안 되는 놈.”
마룡에, 이상한 꽃에, 마기에 석화, 그리고 이젠 마물화까지….
사태가 위중했고 황제인 그가 직접 나서야 했다.
그럼에도 황제는 쉽게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알렌스 황태자 때문이었다.
“알렌스…. 진짜 너는 어디 있는 것이냐.”
그동안 마족 놈을 아들로 알고 애지중지 아꼈던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하지만 그보다 진짜 알렌스에 대한 걱정으로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살아 있긴 한 것인가?
아니면 마족 놈의 손에 일찍이 죽은 것인가?
생사 여부라도 알면 좋을 텐데 알 방도조차 없었다.
“아아…. 아비인 내가 널 알아보지 못하다니….”
두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싼 그는 어깨를 푹 수그렸다.
누구든, 그 누구든 아들을 제게 돌려준다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º º º
클로버필드 백작저의 정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문을 지키는 백작저의 기사들이 밀려오는 사람들을 신속히 통제 중이었다.
“차례를 지켜 들어오십시오!”
“아이와 노인 먼저 들이겠습니다!”
이 모습을 마이언 클로버필드가 발코니를 통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보좌관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보고를 올렸다.
“저택 내에서 발견된 메두사 꽃은 전부 불태웠습니다. 지속적으로 탐색하겠습니다.”
“좋아. 객실은 넉넉한가?”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만, 이대로 사람이 계속 밀려든다면 곧 포화될 겁니다.”
“약품은?”
“충분합니다. 키리아 아가씨께서 대비해두신 덕분입니다.”
“알겠네.”
보좌관은 고개를 숙인 뒤 바쁘게 사라졌다.
저택 안에 마계의 꽃이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된 건, 황궁에서 키리아가 퇴근한 후였다.
리안이 연무장 한쪽에 핀 꽃을 알려주자, 안색이 안 좋아진 키리아가 서둘러 이것저것 지시를 한 것이다.
그리고 밤이 되자 자신의 가방과 생명석 아티팩트를 지니고 다시 황궁으로 향했다.
‘혹시 몰라서 약품들을 제 방과 창고에 가득 쌓아뒀어요. 필요하면 쓰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말이다.
키리아 덕분에 마이언과 리안, 그리고 저택의 사용인들은 전부 생명석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런 사태를 예상했던 것인가….”
“아버지.”
리안이 마이언의 옷깃을 불안한 듯 잡아당겼다.
마이언은 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을 거다. 너와 같은 병에 걸린 사람들이니, 다른 귀족들보다 우리가 더 잘 돌봐줄 수 있을 거다.”
“네.”
저택으로 피신해오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평민이었다.
그중 석화에 걸린 사람의 비중이 점점 늘고 있었다.
메두사 꽃이니, 마기니 아수라장이긴 해도 병은 치료하면 그만이다.
마이언이 이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꺄아악!”
환자들 사이에서 결국 온몸이 석상으로 변해버린 이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자는 잠시 후 움직이더니 흉측하게 부풀기 시작했다.
이윽고 석상은 비대한 상체를 가진 괴물의 모습이 되었다. 가고일이었다.
“캬아아악!”
사람들이 혼비백산 흩어지고, 기사들이 서둘러 검을 들었다.
“으아악! 이 사람도 변하고 있어!”
“살려줘!”
곳곳에서 석상으로 변한 사람들이 다시 괴물로 변하고 있었다.
“이런…!”
마이언이 난간을 콱 쥐었다.
온몸이 단단한 돌로 이루어진 그 괴물은 웬만한 기사의 검에는 흠집도 나지 않았다.
가고일 하나에 기사 서넛이 달려들어도 진땀을 뺐다.
그 사이 가고일은 점점 늘어났고, 사상자가 속출했다.
이대로는 더는 사람들을 안에 들일 수 없었다. 이미 안에 있는 환자들까지 언제 변할지 몰랐으니까.
마이언은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당장 저택의 문을 걸어 잠그고 아무도 들이지 말아라!”
그러자 기사들이 즉시 태도를 바꿔 사람들을 밖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애원했다.
“살려주세요, 백작님!”
“바깥에 있으면 숨이 막혀요!”
“괴물이 되기 싫어요!”
차마 그들을 쳐다볼 수가 없던 마이언이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삐이이익―
마치 매의 울음 같은 소리가 길게 울려퍼졌다.
마이언은 물론, 아수라장 속에 있던 사람들 모두 갑작스러운 소리에 하늘을 쳐다봤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배, 백룡이다!”
만월에 가까운 달을 배경으로 그 몸체가 더욱 하얗게 빛나는 백룡이 백작저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다.
그 성스러운 모습은 사람들을 구원하러 강림한 신수처럼 보였다.
높이 떠 있던 백룡이 아래로 빠르게 하강했고, 위에서 누군가가 훌쩍 뛰어내렸다.
저택 곳곳을 환하게 비추고 있는 불빛 덕분에 마이언은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키리아!?”
키리아는 제논에게 안겨 착지한 후 매섭게 소리쳤다.
“가고일들을 먼저 처리해야 해요!”
“물론입니다!”
키리아를 내려놓은 제논이 튕기듯 지면을 박찼다.
그는 기사들이 쩔쩔매던 가고일을 단숨에 커다란 마물의 손으로 으스러뜨렸다.
제논의 경우와 달리, 이미 온몸이 석화가 된 후 마물로 변한 이들은 구할 방도가 없어 없애야만 했다.
그러는 사이, 백룡에 타고 있던 또 다른 이들이 속속 키리아의 옆으로 뛰어내렸다.
마탑주 셜론과 황실 의료원의 치료사들이었다.
치료사들은 모두 야근 중이었기에 한 명도 빠짐없이 빨리 데려올 수 있었다.
“셜론 님, 이곳은 저와 공작님이 맡을 테니 셜론 님은 대신녀님과 함께 바깥을 맡아주세요.”
“알겠네.”
셜론은 마법으로 마탑의 마법사들을 호출했고, 곧 수많은 마법사들이 백작저의 정원에 나타났다.
그들은 가고일을 부수며 저택 밖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나갔다.
“환자들은 모두 이쪽으로 오세요!”
정원 한쪽의 임시 치료소로 성큼성큼 향하는 그녀의 뒤를, 수십 명의 황실 치료사들이 따랐다.
그들에게서 비장한 군기마저 느껴졌다.
“치료사 여러분. 어느 때보다 힘든 야근이 되겠지만 함께 고생해주세요. 일이 끝나면 한 달 유급휴가 쏠게요!”
자신에게 그런 권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지르고 봤다.
“우어어어! 알겠습니다!”
“저택의 하인들은 신속히 의료용품을 이쪽으로 나르세요! 그리고 환자 여러분,”
키리아가 피신해 온 초췌한 사람들을 돌아보며 씩 미소 지었다.
“지금부터 여러분은 저희가 책임집니다.”
“…와아아아!”
사람들은 안도의 눈물을 흘리며, 가고일이 출현했을 때보다 안정된 모습으로 키리아 주변으로 모였다.
키리아와 황실 치료사들은 매우 숙련된 전문인력이었다.
특히 메두사 병에 익숙한 키리아의 주도 아래, 일 초의 시간 낭비도 없이 신속히 환자들을 구분했다.
“…휴우.”
빠르게 진정되어가는 사태에 마이언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가 흐뭇하게 웃었다.
“내 딸이지만 정말 날 닮았어.”
“……?”
리안이 마이언을 올려다봤다.
“이럴 게 아니라 나도 내려가서 도와야겠군.”
“앗, 저도 같이 가요, 아버지!”
한편, 가고일을 모두 해치운 제논은 몸에 묻은 돌먼지를 털며 키리아에게 다가왔다.
사람들은 양팔은 물론 얼굴 일부까지 마물의 비늘로 덮인 그의 모습에 흠칫하며 거리를 벌렸다.
제논은 그것을 알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키리아.”
“공작님! 다친 곳은요?”
“없습니다. 하지만….”
제논이 먼 곳을 쳐다보았다.
키리아도 그를 따라 시선을 향하니, 저 멀리 불길하게 소용돌이치는 보랏빛 아공간이 보였다.
결국 마계의 문이 나타난 것이다.
“바깥으로 나가야 할 것 같군요.”
날아다니는 마물들이 마계의 문을 통해 쉴 새 없이 나오고 있는 모습이 육안으로도 보였다.
마탑의 마법사들과 신관들이 분투하고 있을 테지만 그들도 힘에 부칠 게 틀림없었다.
키리아는 제논의 마물의 손을 두 손으로 거리낌 없이 잡았다.
“…여기가 정리되면 저도 갈게요. 다치지 마세요.”
“…….”
“공작님?”
그녀에게 잡힌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제논이 몸을 숙였다.
온갖 약과 독초로 지저분한 키리아의 손등에 자신의 입술을 꾹 눌렀다 살며시 뗐다.
“절대 다치지 않겠습니다. 내 몸은 그대의 것이니.”
이 모습을 은근히 지켜보던 사람들과 기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째선지 키리아보다 그들의 뺨이 더 불그스름해졌다.
잠시 키리아를 눈에 담은 제논은 등을 돌려 백룡에 올라탔다.
그리고 빠르게 날아올라 저택에서 멀어졌다.
º º º
상공에서 아래를 내려다 본 제논은 예상대로의 상황에 미간을 좁혔다.
마법사들과 신관들이 분투하고 있지만, 그들은 끊임없이 나타나는 마물을 상대하고 사람들을 구하는 일만으로도 정신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마계의 문을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끝이 없을 것이다.
“내가 맡아야겠군.”
마계의 문을 없애려면 우선 강력한 마기를 처리해야 했다.
“제도에 퍼진 마기의 원인은 메두사 꽃…. 그것들을 단시간에 처리해야만 한다.”
수백, 수천의 꽃을 제거하는 일은 제논과 알비 둘만으로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수가 많다면 어떨까?
- 가울.
제논은 가울을 소환하기 위해 전음을 보냈다.
평소였다면 여기에 그쳤겠지만….
- …그리고 나를 왕으로 받드는 너희들 전부,
지금의 제논은 이전보다 마왕의 힘이 강력해진 상태였다.
즉, 자신의 권속을 소환하는 힘 또한 전에 비할 바 없이 강화됐다.
- 지금 나의 부름을 받고 오라.
그 순간, 북부의 마물 기사들이 왕의 명령을 받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