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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129/141)

129화

확실히 알비의 날개는 커지고 있었다.

마물 중 일부는 한 번에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단계를 거친다고 들었다.

그게 이렇게 딱 좋은 타이밍에 나타날 줄이야!

키리아가 흥분해서 외쳤다.

“알비, 너 성장하고 있어!”

알비는 드래곤과 유사한 마물이니, 성장한다면 마룡을 어느 정도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공작님을 되돌리려면 일단 마룡을 어떻게든 진정시켜야 해!’

부탁한다, 알비!

“먀먀?!”

알비가 고개를 돌려 커지고 있는 제 날개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빵긋 웃었다.

“우먀먀! 흥!”

의기양양하게 주먹을 쥐고 마룡과 싸울 준비를 하는 알비!

그때, 날개의 성장이 멈췄다.

“…응?”

“…먀?”

당황한 알비가 재촉하듯 날개를 퍼덕거려 봐도 잠잠했다.

키리아와 알비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리고 그런 둘을 지켜보던 마룡.

덜덜 떨던 하찮은 녀석들이 갑자기 방정을 떨기에 잠시 이목을 집중했을 뿐이었다.

이제 다시 하찮아지자, 마룡은 가차 없이 다시금 입안에 검은 화염을 끌어모았다.

“아, 안 돼…!”

키리아는 알비를 데리고 보물고의 출입문으로 달려왔다. 얼른 문을 당겨 열려고 했다.

그러나 열리지 않았다.

“…어!?”

덜컹덜컹!

밖에서 잠긴 것 같았다.

감당하기 힘든 마물이 나타나자 근위 기사들이 임시적으로 봉쇄한 모양이었다.

“으아악, 미친놈들아!”

등 뒤로 후끈한 열기가 끼쳤다.

키리아가 힉, 숨을 집어삼키며 뒤를 돌아본 순간, 화염을 머금은 마룡이 마침내 입을 쩍 벌렸다.

“……!”

키리아와 알비는 서로를 껴안은 채 닥쳐올 고통을 직감하며 눈을 꼭 감았다.

그 모습에, 순간적으로 마룡은 움찔했다.

화염을 머금은 입을 황급히 다물어 꿀꺽 삼켜버렸다.

그러자 곧바로 반동이 일었다.

철퍽!

“흡?!”

키리아는 온몸에 쏟아진 뜨겁고 끈적거리는 것에 눈을 번쩍 떴다.

난데없는 진득한 액체의 정체를 확인한 키리아는 기겁했다.

“으악! 피, 피잖아?!”

“켁, 케흑!”

마룡이 구토를 하듯 목을 꿀렁거리며 연신 각혈하고 있었다.

켁켁거릴 때마다 한눈에 봐도 탁한 피가 바닥으로 주르륵 쏟아졌다.

“내상을… 입은 건가?”

신목의 가지가 생명을 다할 정도로 쏟아졌던 신성력.

그것 때문에 마물화를 일으킨 데다 내상까지 입었으니 상태가 심각할 수밖에 없었다.

“콜록! 컥!”

마룡이 공격을 멈춘 것은 다행이었지만 이번엔 다른 의미로 키리아는 두려워졌다.

마룡이 온몸의 피를 다 쏟아내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저러다 죽는 거 아니야?’

“크르르…!”

기침이 멈추지 않자 고통스러운지, 마룡은 억지로 고개를 들며 앞으로 쿵쿵 달려왔다.

“꺅!”

“먀얏!”

키리아와 알비가 옆으로 몸을 날려 피하자마자 쾅! 굉음을 내며 보물고의 문이 통째로 부서졌다.

마룡은 보물고를 나가 날개를 들썩이며 질주했다.

키리아의 시야에서 마룡이 사라지자마자, 멀리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쾅, 콰앙! 심한 진동이 여기까지 전해졌다.

“아무래도 황궁을 부수고 있나 본데.”

“먀아.”

하. 난감한 한숨을 뱉으며 키리아는 벌떡 일어났다.

“황궁이 부서지는 건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이대로 두면 공작님이 위험해. 마룡의 힘이 다하면 분명 기사들이 죽일 거야.”

“먕.”

“쫓아가자, 알비. 피 냄새 맡을 수 있지?”

“먀….”

마룡을 또 만나야 한다는 소리에 몸을 부르르 떤 알비는 곧 코를 치켜들며 키리아를 안내했다.

º º º

키리아는 알비를 따라 풍비박산이 난 황궁을 내달렸다.

지나가는 곳마다 지붕이며 벽, 바닥이 부서져 있었는데 다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다행이었지만 동시에 나쁜 소식이었다.

“폭주한 게 틀림없어.”

알비와 나란히 달려가며 키리아가 중얼거렸다.

“먀?”

“아까는 기사들과 나를 정확하게 노렸잖아. 실제로 기사들이 죽기도 했고. 그런데 지금은 너무 마구잡이야.”

키리아는 부서진 바닥 틈새로 발이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며 계속 달렸다.

“눈앞에 뭐가 있든 상관없을 정도로 몸부림치면서 질주한 것 같아.”

“먀아….”

숨을 몰아쉬던 키리아는 발을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날아갔는지 핏자국이 끊겼고, 천장이 뻥 뚫려 있었다.

그래서 마룡을 찾는 기사들은 우왕좌왕했다. 아직 제대로 전열도 갖춰지지 않았고.

하지만 혈향이 더 짙어졌기 때문에 알비는 마룡의 행방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키리아는 마룡을 찾으려는 기사들의 시선을 피해, 알비와 함께 다른 길로 빠졌다.

마룡이 쓰러진 곳은 황궁 외곽 구석이었다.

키리아는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늦췄다.

부러진 거목 둥치에 피로 흠뻑 젖은 마룡이 몸을 웅크린 채 색색, 쇳소리 같은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숨이 매우 미약했다.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공작님.”

키리아는 작게 그를 부르며 천천히 다가갔다.

마룡이 붉은 눈을 떠 키리아를 바라봤다.

초점이 없는 흐릿한 눈에 약하게나마 빛이 돌아오면서 살기를 띠었다.

키리아는 항복의 제스처처럼 양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전 아무 해도 끼치지 않을 거예요. 아시죠?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잖아요.”

“크르….”

알비가 걱정스레 키리아와 마룡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며 언제라도 나설 수 있게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괜찮을 거야.”

알비에게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인 뒤 키리아는 한 걸음 한 걸음씩 마룡에게 다가갔다.

발밑으로 피에 젖은 풀이 밟혔다.

씩씩 거친 숨을 내쉬는 마룡은 키리아를 공격할 듯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나 이내 울컥 피를 토하며 목을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

키리아는 반쯤 감긴 마룡의 커다란 붉은 눈을 바라봤다.

적의와 파괴 충동, 그리고 이제는 두려움이 스미기 시작한 눈.

“…괜찮아요. 내가 도와줄게. 공작님 주치의가 여기 왔잖아요.”

마룡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앉은 키리아는 그의 비늘을 쓰다듬었다.

“…….”

마룡은 빤히 키리아를 바라만 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키리아는 가방을 열었다.

마룡을 본격적으로 쫓기 전에, 황실연구소에 들러 약재란 약재는 전부 쓸어 담아 왔다.

물론 황태자가 던져놓고 갔다는 내 독초 약품을 가장 먼저 챙기긴 했는데….

‘내상 치료만으론 안 돼. 동시에 공작님을 본래 모습으로 되돌려야 해.’

안 그러면 회복한 마룡이 날 죽일 테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키리아는 이윽고 가방에서 약을 꺼냈다.

“우선, 공작님께 드렸던 마물병 치료약.”

공작님을 되돌려야 하니 이게 기본이었다.

“생명석이 없는데… 마물병 치료약에 이미 생명석이 쓰였으니까 괜찮겠지?”

남은 건….

‘일각수를 치료했을 때를 떠올려 보자.’

그때는 최종적으로 신성력을 주입해 마기와 균형을 잡아주었다.

“그럼 이번엔 마기를 주입해야지.”

그런데 마기를 어디서 공급한담?

“알비는… 성장했으면 모를까, 지금은 너무 어려서 기운이 약하고.”

“먀?! 끄으응…!”

자존심이 상한 알비가 몸에 잔뜩 힘을 주며 억지로 성장하려고 시도했다.

꼭 큰일을 보는 듯한 알비를 내버려두고, 키리아는 초조하게 다른 방안을 계속 생각했다.

그러다 한쪽 수풀을 보고 깨달았다.

“아!”

메두사 꽃이 있었지!

서둘러 주변을 뒤지자 역시나 개량된 것과 오리지널의 메두사 꽃들이 곳곳에 보였다.

다행히 황궁에서 메두사 꽃을 발견한 후 생명석 아티팩트를 착용한 키리아였다.

아티팩트를 발동시킨 후, 키리아는 활짝 핀 메두사 꽃들을 전부 채취했다.

그것을 다른 재료와 적당히 손질하여 물약처럼 만들었다.

“…후.”

키리아는 긴장된 숨을 삼켰다.

자신의 방법이 통할지 안 통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건 인간에겐 극독이나 다름없었으니까.

만약 통하지 않는다면 제논은 정말 죽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도박이었다.

“자, 이걸 마셔봐요.”

“…….”

마룡은 반응이 없었다.

키리아는 마룡의 날카로운 송곳니 사이로 메두사꽃의 마기를 녹여낸 물약을 천천히 부었다.

아무 변화도 보이지 않는가 싶더니, 천천히 마룡의 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마룡은 제논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양팔과 얼굴 일부분까지 마룡의 검은 비늘로 덮여 버렸다.

“공작님…?”

제논은 의식을 잃은 듯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그래도 계속해서 치료약을 먹여야 했다.

이번엔 마물병 치료약을 꺼내 제논의 입에 흘려넣었지만, 커다랬던 마룡의 입과 달리 제논은 약을 삼키지 못했다.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먹일 수밖에.

키리아는 제 무릎에 제논의 머리를 조심히 올려놓고 약을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몸을 숙여 제논과 입을 맞췄다.

그의 턱을 살짝 잡아당기며 입을 벌렸다. 그 틈으로 머금고 있던 약을 깊숙이 흘려 넣었다.

꿀꺽.

제논의 목울대가 천천히 넘어가는 게 보였다.

‘다행이다.’

그런 식으로 키리아는 몇 번이나 제논에게 약을 먹여주었다.

한 모금 한 모금씩, 자신의 영혼을 나눠주는 마음으로.

이윽고 축축해진 입술을 떼었을 때.

키리아는 긴 속눈썹을 들고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제논과 눈이 마주쳤다.

시간이 멈춘 듯, 두 사람은 서로의 눈동자 속 자신을 들여다봤다.

키리아는 그의 붉은 눈동자 속에서 울 것 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다행이다.”

툭. 제논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기댔다.

제논도 눈을 감고 그녀에게 의지했다.

하지만 오래 쉴 틈은 없었다.

키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메두사 꽃들이 개화했어요. 지금쯤 바깥은 난리가 났을 거예요. 약도 전해줘야 하고, 마계의 문이 나타나기 전에 얼른 가봐야 해요.”

제도엔 키리아의 가족들이 있다. 결코 그들을 위험에 처하게 둘 수 없었다.

“공작님은 쉬시는 게 좋겠어요. 그런 몸 상태로는….”

“아니요. 나도 가겠습니다.”

제논이 일어났다가 비틀거렸다. 이내 키리아의 부축을 부드럽게 뿌리치고 중심을 잡았다.

그가 마물로 변한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더욱 마물에 가까워졌으니 마왕의 힘도 더 쓸 수 있을 것 같군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키리아는 안타까운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지만, 이내 하고픈 말을 삼켰다.

그리고 또렷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상태가 이상하면 바로 말씀해주셔야 해요? 제가 바로 독약을 만들어드릴 테니까.”

“독살하겠다는 뜻입니까?”

안색은 창백한 주제에 농담을 건네는 제논이 얄미워 키리아가 그를 흘겼다.

“그건 공작님께 달렸죠.”

이때였다.

“저쪽을 찾아봐라!”

멀리서 기사들의 외침이 들렸다. 다른 곳을 전부 뒤지고 여기까지 도달한 모양이었다.

그들이 제논을 발견한다면 순순히 놓아줄 리가 없었다.

물론 키리아까지 말이다.

“도망… 어?”

다급히 외치던 키리아가 무언가를 보고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바로 알비였다.

“먀아앗!”

성장을 위해 혼자 끙끙대고 있던 알비가 포효했다.

동시에, 알비의 내부에서 빛이 폭발하더니 알비의 몸이 쑥쑥 거대해졌다.

“아, 알비?”

“성장입니다…!”

키리아와 제논은 물론, 때마침 들어선 기사들도 뜻밖의 광경에 입을 벌렸다.

“시… 신수?”

누군가의 중얼거림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마물이라고 믿기 힘든, 성스러운 은백색을 지닌 우아한 백룡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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