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무장한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며 키리아 일행과 간격을 좁혔다.
그러자 제논이 키리아를 보호하기 위해 나섰다.
제논에게서 느껴지는 고요한 투기에 기사들이 움찔했다.
기사들이 움츠러든 찰나의 순간,
팍!
제논이 쏜살같은 손속으로 가장 가까이에 있던 기사의 팔을 쳐올렸다.
검이 기사의 손에서 튕겨져 나오며 공중으로 튀었다. 동시에 제논이 마검을 가볍게 그었다.
챙그랑!
두 동강 난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무서울 정도로 예리하게 잘렸다.
제논은 마검을 천천히 내리며 기사들을 겨냥했다.
그 자세만으로도 근위 기사들은 공작과의 수준 차이를 감지할 수 있었다. 절로 분위기가 위축됐다.
이를 느낀 황제가 이를 갈았다.
“뭐 하는 것인가! 당장 공작을―”
“실력 있는 인재들을 한꺼번에 잃으시려는 겁니까? 저라면 그러지 않겠습니다.”
“뭐야…?”
자존심을 자극당한 황제의 눈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논은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건 제가 마왕을 처치할 때 사용했던 검입니다. 진짜 성검이 아닌, 정교한 모조품이죠. 그 탓에 이렇게 마기에 물들고 말았습니다.”
“헛소리를 하는군, 공작. 당장 그 검 내려놓게. 내가 충성심을 증명하라고 해야만 말을 듣겠는가?”
충성을 강제하는 마법 계약으로 협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논은 고개를 저었다.
“황실에 대한 충성이지 폐하 개인을 향한 충성 계약이 아니라는 건 아시지 않습니까. 제 사사로운 행동까지 제약하실 순 없습니다.”
선대 란페르세 공작이 선대 황제와 불공정한 계약을 맺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뭐든 다 들어주는 노예 계약은 아니었다. 최소한의 권리는 지켰다는 말이다.
그래서 란페르세 공작가가 충성 계약을 빌미로 황가에 무너지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올 수 있는 것이었다.
“전 폐하를 해할 마음이 없습니다. 단지 요청드리는 겁니다. 이 검을 제게 넘기십시오.”
“헛소리!”
고집스런 황제의 외침에 제논의 미간이 지그시 구겨졌다.
“이 검에… 무엇이 담겨있는 줄 알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
그 말에 키리아가 의아하게 제논을 쳐다봤다.
‘마검이라고 했는데… 뭐가 또 있는 건가?’
키리아는 황제의 표정도 살펴봤지만 그는 별로 동요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제논의 말을 헛소리로 치부하고 있었다.
“물론 마왕의 사악한 마기가 잔뜩 담겨 있겠지. 그러니 짐이 보관하고 있는 것이고. 지금 공작의 행동은 지극히 위험하단 말이네!”
“위험한 행동은 폐하께서 하고 계세요!”
참다못한 키리아가 외쳤다.
갑자기 끼어든 키리아를 향해 황제가 눈을 부라렸으나 키리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금 제국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세요? 북부에 있는 메두사 꽃이 곳곳에 싹을 틔웠어요.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 협력해야 한다고요!”
“시끄럽다! 북부에서 이름 조금 떨쳤다고 감히 짐 앞에서까지 설치다니 우습구나! 뭣들 하느냐. 어서 저 둘을 구속해!”
황제는 고집불통이었다.
근위 기사들이 표정을 가다듬고 제논과 키리아를 향해 천천히 다가갈 때였다.
“그녀의 말이 맞아요.”
뒤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저벅저벅, 발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알렌스가 제논과 기사들 사이에 섰다.
그가 황제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젠 협력해봤자 늦었지만요.”
“알렌스? 네가 어떻게 여기에?”
황태자의 뜻밖의 등장에 황제는 당혹스러운 듯했다. 그러며 제논을 원망스럽게 노려봤다.
‘아들한텐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나 보지?’
키리아는 가소로워하며 생각했다.
그런데 협력해봤자 늦었다니 무슨 뜻이지?
알렌스가 생긋 웃더니 모두를 향해 선심 쓰듯 말했다.
“키리아 양의 말은 사실입니다. 사람을 돌로 만드는 마계의 꽃이 제도에도 뿌리를 내렸어요. 그리고 제가 방금 개화시켰고요. 아, 정말 장관이더군요.”
“…….”
“개량한 꽃들을 피우니 근처에 있던 본래의 레그누베르까지 영향을 받아 일제히 피어나는데…. 축제에 온 줄 알았어요.”
휴. 그는 과장된 한숨을 쉬었다.
“내가 원할 때 개화하는 꽃… 시간을 많이 들인 보람이 있었어요.”
“대체 무슨 소리냐, 알렌스? 마계의 꽃이 왜 여기에 있다는 거냐?”
“그야 여기까지 번지도록 제가 매년 바람을 일으켰으니까요.”
알렌스가 가볍게 말아쥔 손을 입가에 대며 후후 웃었다.
“그게 무슨? 네가 마법을?”
황제가 어리둥절하게 반문했을 때, 제논은 무언가를 깨닫고 눈을 부릅떴다.
“바람…!”
제논은 마물병의 영향으로 바람을 어느 정도 부릴 수 있었다. 그건 마왕이 마족으로서 가진 능력이었다.
그런데 마법사도 아닌 황태자가 광범위한 바람을 부렸다면?
제논이 알렌스에게 검끝을 향했다.
“마족이었군.”
“딩동댕.”
제논이 반응하기도 전에 알렌스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는 여태까지 비실거리던 모습과는 다르게 눈 깜짝할 사이에 제논의 손목을 내려쳤다.
“큭!”
제논이 놓친 검을 알렌스가 순식간에 낚아챘다.
“그냥 마족이 아니라 정확히는,”
핑그르르, 손안에서 마검을 유려하게 돌린 알렌스가 천천히 검은 검신을 살폈다.
그러며 만족스럽게 눈을 접어 웃었다.
“마계의 공작입니다. 마계의 왕이 제 형님이시죠.”
스스스, 알렌스의 몸에서 막이 걷히듯 기존의 모습이 사라졌다. 동시에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푸른 피부와 붉은 눈동자, 달빛처럼 빛나는 긴 은발.
그가 황제를 향해 곡예사처럼 과장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마계의 공작, 플루토라고 합니다.”
“마, 마족이라고? 여태까지 나와 함께 있던 내 아들이…?!”
황제의 부릅뜬 눈을 보며 플루토가 유쾌하게 웃었다.
“감사했습니다, 인간의 황제. 가짜 성검 덕분에 제 형님이 소멸되지 않고 이렇게 검에 봉인된 채 살아남았으니까요.”
“뭣…!?”
“그리고 키리아 당신에게도 감사를 표해야겠군요.”
플루토가 키리아를 돌아보았다.
제논이 그녀를 제 뒤로 감쌌지만 플루토는 개의치 않고 해맑게 웃었다.
“당신 덕분에 란페르세 공작이 마물로 변하지 않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공작이 마룡으로 변하면 정말 낭패거든요.”
“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키리아는 존대를 집어치우고 소리쳤다.
“이런 소리예요.”
플루토가 키리아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검은 제논에게 가로막혔다.
챙! 단단한 마물의 손톱이 검을 붙잡았다.
바로 그게 플루토가 원하는 바였다.
“……!”
다음 순간, 마검이 마물의 손톱을 깨끗하게 잘라버리고는 그대로 안쪽으로 찔러들어갔다.
푹, 끔찍한 소리와 함께 제논의 가슴에 검이 박혔다.
마검의 기운이 제논에게 게걸스럽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플루토가 기쁨에 찬 목소리를 높였다.
“제 형님이 쓸 몸인데, 마룡 따위로 망가져서는 곤란하죠! 아하핫!”
입에서 검은 피를 토한 제논이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안 돼…!”
경악한 키리아가 그를 부축하려 들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컥… 커억.”
울컥울컥 피를 토하는 제논의 피부가 점점 푸르게 변해갔다.
푸른달이 뜰 때 변하던 안정적인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몸의 깊은 안쪽에서부터, 제논이 다른 무언가로 뒤바뀌고 있었다.
“공작님!”
“나의 폐하께서 부활하는 모습을 얌전히 지켜보세요. 그간의 정을 봐서 당신은 죽이지 않을… 지금 뭐 하는 겁니까!”
만족스러워하던 플루토가 소리쳤다.
키리아가 신목의 가지를 꿰뚫린 제논의 가슴에 가까이 가져다 댄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돌이킬 수 없을 거야. 뭐라도 해야 해!’
제논이 신성력을 주입 받으면 굉장히 고통스러워한다는 걸 알지만, 지금으로선 이 방법밖에 없었다.
눈부신 신성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으아아악!”
제논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다. 동시에 검에 찔린 몸에서 수증기 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크으윽!”
강력한 신성력을 온몸에 맞은 플루토 역시 치명상을 입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입가에서 피를 흘리면서도 눈을 번뜩였다. 키리아를 향해 손을 휙 저었다.
“어딜 감히!”
“꺅!”
플루토가 일으킨 바람에 키리아는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바닥을 구른 키리아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플루토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신목의 가지는 제논에게 찰싹 달라붙어 한계까지 신성력을 내뿜었다. 제논의 비명은 커져만 갔다.
‘이러다 잘못되는 거 아냐?!’
하지만 곧 효과가 나타났다.
마검이 제논의 몸에서 밀려나오더니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푸르게 변해가던 제논의 피부는 천천히 제 빛깔을 되찾았다.
“공작님!”
다행이라고 생각한 찰나.
“크…으윽….”
마물의 팔이 기이하게 꿈틀거리며 비틀리기 시작했다.
웬만한 마물은 태워버릴 정도로 강력한 신성력을 한꺼번에 받은 탓이었다.
검은 비늘이 제논의 어깨와 가슴, 그리고 온몸을 순식간에 뒤덮었다. 그러더니 형체마저 변하기 시작했다.
우드득, 우득―
“……!”
점점 커지는 제논의 몸집을 따라 키리아의 고개도 함께 올라갔다.
낭패스런 얼굴로 플루토가 이를 악물었다.
“제기랄! 마지막에 와서 실패라니…!”
크오오오오―
마룡이 거칠게 포효했다.
보물고가 비좁을 정도의 몸집.
파괴의 충동만이 남은 짐승의 울부짖음에, 황제와 근위 기사들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고 뒤로 물러났다.
그들을 내려다본 마룡이 거대한 꼬리를 느릿하게 들었다.
아니, 눈으로 보기에만 느릿했을 뿐이다.
“먀먓!”
플루토가 나타난 이후 가방 안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던 알비가 튀어나와 키리아를 힘껏 잡아당겼다.
그 직후,
콰아앙!
육중한 꼬리가 단단한 돌바닥을 산산조각으로 갈라내며 쪼갰다.
“허, 허억.”
살벌한 광경에 키리아는 절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괴, 괴물이다!”
“폐하! 어서 피하십시오!”
“으아악!”
황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얼른 자리를 피했고, 플루토 역시 쳇, 혀를 차며 마검을 갖고 텔레포트로 사라졌다.
남은 근위 기사들이 지원을 요청하며 마룡을 상대했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콰르르륵!
마룡이 뿜어낸 검은 화염이 기사들을 휩쓸자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눈앞의 적을 없앤 마룡의 커다란 적색 눈이 희번뜩 옆으로 돌아갔다.
“……!”
마룡과 눈이 마주친 키리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고, 공작님….”
불러봤지만 전혀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먀마악!”
마룡의 콧구멍만 한 알비가 짤막한 두 팔을 양옆으로 펼치며 키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알비…!”
감격과 걱정으로 키리아가 외쳤다.
그러다 발견했다.
‘응?’
키리아는 눈을 비비고 다시 알비를 봤다.
‘지금… 알비의 날개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