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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127/141)

127화

오늘도 키리아는 황실 의료원에 얼굴만 적당히 내비친 뒤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어차피 황실 의료원 치료사들은 자기 연구만으로도 바빠서 다른 사람이 뭘 하고 다니는지 알 바가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키리아는 방해 없이 황궁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오늘은 어딜 가볼까.”

키리아는 제논에게 전달받은 황궁의 도면을 펼쳤다.

이미 몇 개의 구역에는 엑스 표가 그려져 있었다. 전부 지난 며칠간 키리아와 제논이 허탕친 곳이었다.

키리아는 황궁과 가까운 동쪽 별궁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좋아. 오늘은 여기다.”

조수와 함께 말이다.

“이제 나와도 돼, 알비.”

키리아가 메고 있던 가방을 열자 안에서 알비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먀!”

“오늘도 잘 부탁해. 마기나 마기 비슷한 게 느껴지면 바로 안내해줘.”

“먀먀.”

나만 믿으라는 듯 알비가 솜방망이 같은 제 주먹으로 가슴을 통통 두드렸다.

대신녀가 말하길, 가짜 성검은 마왕의 영향으로 마검이 됐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 가만히 두어도 마기를 풀풀 풍길 것이다.

하지만 보나 마나 봉인되어 있겠지.

이 탓에 알비가 마기를 못 맡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키리아는 다른 탐지기(?)도 사용 중이었다.

“자, 꽃님이도 부탁해.”

<내가 찾아내면 치킨 주는 고야. 약소기야!>

“그럼 그럼.”

동쪽 별궁으로 온 키리아는 신목의 가지를 수맥 탐지기처럼 쥐고 좌우로 움직였다.

놀브 후작의 아티팩트를 감지해냈던 것처럼 말이다.

얼마나 걸었을까.

키리아는 지쳐서 중얼거렸다.

“오늘도 허탕인가….”

“먀먀….”

마찬가지로 시무룩하던 알비가 문득 코를 들더니 한쪽으로 포르르 날아갔다.

“알비? 어디 가?”

주변을 살피며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키리아가 알비의 뒤를 따라갔다.

도착한 곳은 별궁의 구석진 정원이었다.

“여긴 왜?”

“먀먀.”

알비가 바닥에 있는 꽃봉오리를 가리켰다. 키리아의 눈에 익숙한 모양새였다.

개량 메두사꽃의 꽃봉오리였다.

“이게 왜 여기!?”

키리아는 정원을 휘 둘러봤다.

그러자 정원 곳곳에 숨어 있던 크고 작은 개량 메두사꽃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꽃들은 북부에만 있는 거 아니었나? 왜 남부에….”

한기를 싣고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자, 키리아는 북쪽을 바라봤다.

“…바람이 퍼뜨린 거였구나. 젠장.”

키리아가 납치당했던 연구소가 폭발했던 시기로 맞춰 보면, 개량 메두사꽃이 완성된 건 최근이다.

이 점만 놓고 보면 개량 메두사꽃이 퍼지기 시작한 초기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바람이 실어 온 것이 개량 메두사꽃 뿐일까?

“북풍 자체는 인마전쟁 후부터 이맘때쯤 꾸준히 있었는데….”

개량되지 않은 본래의 메두사꽃 또한 퍼졌을 것이다.

만약 그것들까지 자극받아 한꺼번에 개화한다면….

‘지독한 마기가 발산될 거야. 마계의 문까지 단숨에 불러들일 정도로!’

키리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을 때였다.

내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알비와 꽃님이가 동시에 한쪽 방향을 주목했다.

“우먀먀?”

<궁 안쪽에두 꽃이 피어 있나?>

“응? 이 궁은 다 뒤져본 거 아니야?”

<마자. 구런데 여기 있으니 궁 안쪽에서도 꽃과 비슷한 기우니 느껴져.>

“먀먀먀.”

알비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바깥이면 모를까, 궁 안에서는 잡초가 자라지 못할 터였다.

잡초가 자랄 틈새가 생기면 사용인들이 가만둘 리 없으니까.

그러니 메두사 꽃과 비슷한 기운이 궁 내부에서 느껴진다는 건….

‘사용인들이 드나들지 않는 외진 곳이거나 숨겨진 장소라는 뜻이겠지?’

느낌이 왔다.

“밤에 공작님하고 다시 와야겠어.”

연구소 때처럼 메두사 꽃이 잔뜩 있다면 위험할 테니까 말이다.

“먀먀.”

키리아는 알비와 신목의 가지를 가방에 넣고 자리를 떠났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누군가가 나무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여러 쌍의 눈을 지닌 마계 참새였다.

참새의 눈으로 본 키리아의 모습은….

“흠.”

본궁에 있던 알렌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역시, 그게 목적이었군. 잘됐어.”

알렌스가 중얼거리며 은밀히 웃었다.

“드디어 계획을 실행할 때가 왔네.”

º º º

늦은 밤, 키리아는 연구실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핑계로 경비병을 통과했다. 제논도 함께였지만 의심은 받지 않았다.

“제가 공작님의 주치의였다는 걸 다들 알아서 그런가 봐요.”

“여전히 내 주치의가 맞습니다만.”

잊지 말라는 듯 제논이 힘주어 대답했다.

하지만 키리아는 새침했다.

“글쎄요? 전 아버지가 허락하시지 않으면 공작님 주치의 못 하는데요.”

“윽….”

‘사실 아버지 허락이 없어도 하려면 할 수 있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거든요?’

키리아는 속으로 혀를 내밀었다.

“내가 더 노력할 겁니다….”

시무룩 대답하는 제논의 모습이 묘하게 귀여워 보였다.

이래서 좋아하는 사람을 괴롭히고 싶어진단 말이 나오나 봐.

“네, 노력하세요.”

키리아는 살짝 까치발을 들어 제논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에 움찔한 제논의 눈빛에 엷은 홍조가 올랐다.

떨어지는 그녀의 손목을 제논이 감싸 붙잡았다.

“…조금만 더. 만져줘요.”

하지만 지금의 키리아는 단호했다.

“싫은데요.”

“…….”

“다음은 저쪽 복도로 꺾어요.”

키리아는 신목의 가지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휙 걸음을 옮겼다.

조금 불만 어린 표정의 제논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인적이 드문 곳으로 들어갈수록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게 조심했다.

그렇게 얼마쯤 들어가자 나타난 건 별궁 지하에 있는 보물고였다.

<여기서 기우니 느껴져.>

“먀먀.”

제논이 보물고의 잠금장치를 유심히 살폈다.

“마법으로 잠겨 있습니다. 상당히 강력하게 느껴지는군요. 고위 마법사가 아니면 풀지 못할 겁니다.”

“정말요? 여기까지 왔는데…. 셜론 님을 불러서 다시 와야 해요?”

키리아가 그런 걱정을 했을 때였다.

제논이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할 수 있습니다. 나만 믿으십시오.”

모처럼 능력을 보여줄 수 있어 기쁘고 뿌듯한 얼굴.

키리아는 그의 소년 같은 얼굴에 주먹을 꽉 쥐었다.

‘젠장… 귀여워!’

벽을 치고 싶은데, 그러면 내 주먹이 아프니까 제논의 어깨를 팡팡 때렸다.

“……?”

의아해하던 제논은 왜 그러냐 묻는 대신 키리아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러곤 자물쇠를 푸는 일에 집중했다.

“마물병이 재발해서 좋은 점도 있군요.”

제논이 마물의 팔로 자물쇠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마기로 인해 자물쇠가 천천히 풀리며 마침내 달칵, 해제됐다.

제논은 자물쇠를 내려놓고 커다란 문을 한 손으로 열었다.

오래되어 보이는 문은 비교적 소음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키리아가 안으로 들어서자 보물고 안에 자동으로 불이 밝혀졌다.

“우와.”

키리아가 감탄을 터뜨렸다.

번쩍거리는 금은보화가 바닥에 쌓여 있을 거라고 상상했지만, 내부는 오히려 박물관에 가까웠다.

온갖 진귀해 보이는 보석, 서적, 무기 등이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케이스 안에 진열되어 있었다.

느긋하게 구경하고 싶었지만 키리아는 참았다.

“어떤 거야?”

<저거!>

꽃님이가 가리키는 대로 안으로 쭉 들어가자, 사각형의 케이스에 보관된 검 한 자루가 보였다.

“진짜… 검이 까맣게 물들었네요.”

성검과 바꿔치기 됐을 만큼 외양만큼은 성스러웠으나, 검신이 검은 안개라도 낀 것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마왕의 마기에 오염되어서 그런 건가요?”

“꺼내 보면 정확히 알 것 같습니다.”

“좋아요. 그럼….”

키리아는 조심스럽게 마검을 보호하고 있는 장치들을 살폈다.

다른 보물들과 달리, 유독 그것만 얇은 은빛 사슬이 주변을 삼중으로 두르고 있었다.

다가가던 제논이 따끔한 것에 쏘인 듯 인상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났다.

“강력한 신성 결계입니다. 마기를 거부하고 있어요.”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마기도 없고 마법사도 아닌 키리아는 신성 결계 너머로 쉽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케이스에 손이 닿기 직전 꽃님이가 제지했다.

<그거 건드리묜 경보가 울릴 거야.>

“앗. 그럼 어떡하지?”

<다행히 신성 결계는 사슬에만 걸려 있어. 그러니 저 사슬만 거두면 우리 아이가 알아서 할 거야.>

“알았어.”

<내가 히믈 빌려주께. 내가 이쓰니 신성 마법은 널 적으로 인식하지 않을 고야.>

키리아의 손이 꽃님이의 신성력으로 빛났다. 덕분에 은빛 사슬을 전부 걷어냈다.

남은 과정은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순조로웠다.

마침내 제논이 가짜 성검, 아니 마검을 손에 쥐었다.

일렁이는 안개 같은 마기가 제논의 손을 타고 내려왔다.

미간을 찡그린 채, 마검과 감응하듯 가만히 집중하던 제논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이 검….”

그때였다.

십수 명의 발걸음 소리와 금속성이 들렸다.

키리아와 제논은 휙 뒤를 돌아봤다.

무장한 기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이는 다름 아닌 황제였다.

“신성 결계가 어째서 해제된 것인가 했는데… 쥐새끼들의 짓이었군.”

해제되면 바로 알 수 있도록 조치해놓았던 모양이다.

<…에헤헤. 내가 놓쳤던 모양이네.>

꽃님이가 계면쩍게 웃었다.

황제가 분노 서린 얼굴로 이죽였다.

“짐이 분명 타협안을 제시한 일인데 이렇게 야비한 짓을 하다니. 실망이야.”

그러며 기사들에게 고함쳤다.

“당장 저것들을 잡아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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