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키리아와 제논은 심각하게 알현실에 들어섰다가 열받은 얼굴로 나왔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인적 없는 복도 한구석에서 걸음을 멈춘 키리아가 씩씩거렸다.
그녀는 방금 있었던 황제와의 황당한 대화를 떠올렸다.
황제는 알현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서 키리아는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황제는 북부에서 신관들이 마계의 문을 붙잡고 있는 것, 그리고 그가 제논 몰래 저지른 일이 들켰다는 것 등 제논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이야기를 끝낸 제논이 마침내 요구했다.
「그러니 폐하께서 보관하고 계신 가짜 성검을 제게 주십시오.」
그러자 황제는 한쪽 팔걸이에 괴고 있던 팔꿈치를 떼어 몸을 바로 세웠다.
「좋아. 넘겨주겠네.」
「……!」
키리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황제는 태연자약하게 덧붙였다.
「공작, 그대가 가진 키리아 양과의 사업 파트너 권리를 내게 넘기고. 키리아 양, 그대가 가지고 있는 생명석의 소유권도 내게 넘긴다면 말일세.」
키리아는 입을 떡 벌린 채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이대로는 공작님이 위험합니다, 폐하! 공작님이 잘못되시면 마계의 문도 다시 열릴지도 몰라요!」
「그럴 수도 있지만, 안 그럴 수도 있지.」
「……?!」
황제가 씩 웃었다.
「봉인 마법진은 일부러 없애지 않는 이상은 계속 유효하다네. 설령 공작의 신변에 이상이 생겨도 말이지…. 몰랐는가?」
어떻게 그딴 말을!
다시 생각해도 정말 열받는 대꾸였다.
“아오, 개빡쳐! 심지어 공작님한테는 충성 계약까지 들먹이다니요!”
“나도 개빡칩니다. 황제는 여러모로 매번 예상을 뛰어넘는군요.”
황제는 제논과 키리아가 가진 걸 빼앗고 싶어서 안달 난 것 같았다.
제국을 위한 일이라고 엮을 수만 있다면 분명 그렇게 하겠지.
충성 계약은 황제 개인이 아닌 제국과 황실을 위한 일일 때 발동되니까 말이다.
“미안합니다, 키리아….”
“공작님이 왜 사과하세요? 고개 드세요!”
못마땅해하며 키리아가 고개를 숙인 제논의 어깨를 팡 때렸다.
“아.”하며 제논이 제 어깨를 문질렀다.
요즘 키리아가 전보다 사나워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그였다. 꼭 제멋대로 구는 아기 고양이 같달까?
“왜 혼자 슬그머니 웃고 계세요?”
“아, 아닙니다.”
“…뭐, 어쨌든.”
키리아의 보랏빛 눈매가 흉흉하게 빛났다.
“전 황제와는 콩 한 쪽도 저얼대 안 나눠 먹을 거예요. 이렇게 된 이상 우리끼리 성검을 찾아봐요.”
“그래야겠군요. 정확한 장소는 몰라도 황궁의 도면은 구할 수 있을 겁니다.”
한스를 비롯한 제논의 정보원과, 그들과 긴밀한 연이 있는 남부의 정보 길드까지 이용해서 말이다.
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당당히 황궁을 돌아다닐 자격을 가져보도록 할게요.”
“그런 방법이 있습니까?”
“네. 황제도 관여할 수 없는 방법이죠.”
키리아가 씩 웃었다.
바로 그날 저녁.
키리아는 황실 의료원의 수석치료사로 임명되었다.
º º º
“299… 300!”
목검을 아래로 긋자 땀방울도 함께 떨어졌다.
리안은 젖은 앞머리를 손등으로 훔치며 만족스런 숨을 뱉었다. 하지만 곧 시무룩한 표정이 됐다.
“공작 형한테 배우고 싶은데….”
지금의 검술 선생도 나쁘지 않지만 이미 그 너머의 경지를 봐버린 리안이었다. 아쉬운 게 당연했다.
“그래도 조금 참아야지. 누나가 공작 형을 데려올 거니까.”
우리 누나가 누군데.
메두사 병도 치료하고 북부도 구하고 이젠 남부 사교계 화제의 중심이 된 사람이다.
아무리 공작이라도 우리 누나한테 안 반하고 배길 수 있겠어?
“공작 형은 이미 우리 집 사람이야.”
마이언이 들으면 뒷목을 잡을 말을 중얼거린 리안이 화단 옆을 지날 때였다.
“어?”
화단에 처음 보는 꽃이 심겨 있었다.
다리가 불편할 때 갈 수 있던 곳은 저택의 정원과 화단 근처뿐이었던 리안이다.
못 보던 꽃이 있다는 것쯤은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이건 뭐지? 아직 피진 않았지만… 색이 기분 나쁜데….”
검붉은색의 꽃봉오리가 화사한 꽃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
건드리면 피어나려나…?
리안은 조심스럽게 꽃봉오리를 향해 손가락을 가까이했다.
그때, 뒤에서 하녀가 말을 걸었다.
“도련님, 뭐 하고 계세요?”
“앗.”
꽃봉오리로 뻗던 손을 거둔 리안이 뒤를 돌아봤다.
리안의 상태를 돌봐주는 전담 하녀였다. 손에는 그에게 건넬 수건과 물병을 들고 있었다.
리안이 일어나며 물었다.
“못 보던 꽃이 있어서. 혹시 네가 심었어?”
“아니요. 화단은 저희가 관리하는 게 아니라서요…. 어디 봐봐요.”
하녀는 리안이 가리키는 검붉은 꽃봉오리를 유심히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꽃은 가지런하게 심겨 있는데 얘 혼자 잡초처럼 튀네요. 아마 저절로 싹을 틔웠나 봐요.”
“저절로?”
“네.”
하녀가 생긋 웃었다.
“동물들이 씨앗을 옮기는 것처럼 꽃씨도 바람에 의해 아주 멀리까지 날아와 싹을 틔우거든요. 민들레 홀씨처럼요.”
때마침 서늘한 북풍이 불었다.
리안은 하녀의 말을 이해했다.
“그렇구나.”
“정원사에게 말해서 뽑으라고 할게요.”
“아니야. 독초 같은데 일단 그냥 둬. 함부로 만지지도 말고.”
리안은 ‘색이 너무 화려하거나 특이하면 만지지 마.’라고 누나가 당부했던 말을 떠올렸다.
혹시 누나가 원하는 독초일 수도 있으니 그냥 두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저 꽃 어제도 봤어요.”
“저택에 또 있어?”
“아뇨, 저택 밖에서요.”
하녀가 흥미로운 수다를 떨 듯 가볍게 말했다.
“요즘 바깥에서 자주 보이던데요? 저렇게 생긴 꽃이요. 북부에서 건너온 새로운 잡초일까요?”
º º º
리안이 새로 발견한 독초를 관찰하고 있을 무렵.
키리아는 출근을 하고 있었다.
에메랄드 가든에 있는 가게가 아니라, 황궁으로 말이다.
오늘부터 황실 의료원의 수석치료사가 되었으니까.
‘스카웃을 받아들이겠다고요?’
키리아가 대뜸 요청했을 때 황태자 알렌스는 이렇게 말했다.
‘왜 갑자기요?’
‘전하께서 스카웃하셨으면서 그걸 물어보시는 거예요?’
‘음― 그게.’
비음과 함께 의미심장하게 웃던 알렌스.
‘키리아 양이 굉장히 명확한 목적을 갖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죠.’
눈치가 백 단이었다.
다행히 알렌스는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다만 연극을 안 해도 된다니 다행이라며 당장 채용해 주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키리아는 기분이 괜찮았다.
“그런데…. 걱정이 된단 말이지.”
키리아는 무거운 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그쪽 사람들이 사사건건 내 꼬투리를 잡으려 들면 어쩌지? 내가 황궁을 뒤지고 다닌다는 소리가 황제 귀에 들어가면 곤란한데.”
황실 의료원의 이전 수장은 바로 놀브 후작이었다.
때로 직급은 실제 실력과 상관없이 상징성을 가진다.
수석 치료사답게 놀브 후작은 남부 의료인력의 핵심이자 황실 의료원의 자존심이었다.
그런 사람이 무명이었던 북부 공작의 주치의에게 창피를 당했다.
물론 지금이야 키리아도 유명인이라지만 의료원 사람들이 안 좋게 볼 이유는 충분했다.
게다가 황태자도 이렇게 덧붙였고.
「놀브 후작이 그렇게 된 뒤 황실 의료원의 상급 인력 중 적지 않은 수가 스스로 의료원을 나갔어요.」
「그, 그럼….」
「그래서 의료원은 거의 매일 야근 중입니다. 그 원흉인 당신이 텔레포트로 오게 되었으니, 뭐….」
여기서 텔레포트는 키리아의 용어로 ‘낙하산’이었다.
알렌스가 화사하게 웃었다.
「잘해보세요?」
황태자 새끼….
마침내 키리아는 황실 의료원의 제1연구실 문 앞에 당도했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최대한 무난하게 얼굴만 비추고 슬쩍 사라지자.’
후. 숨을 뱉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키리아를 기다리고 있는 치료사들이 보였다.
모두의 시선이 키리아에게 꽂혔다.
‘뭐, 뭐야. 부담스러워…!’
당황한 키리아였지만 곧 가슴을 당당하게 폈다.
앞으로의 계획에 방해가 될까 봐 두려운 거지, 이들이 날 안 좋아할까 봐 두려운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잘못한 것도 없지 않은가?
‘메데이아 모드다.’
냉정한 표정이 된 키리아는 앞으로 자신이 쓸 연구 책상 앞으로 왔다.
그리고 모두를 한 번 훑어본 후 입을 열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전 키리아 클로버필드라고 해요. 독초 연구자로서 메데이아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왔고요. 갑작스럽겠지만 충분히 실력으로 올라온 거니까, 불만은 인사 담당자인 황태자 전하께 올리시면 돼요. 어차피 전 자리를 자주 비울 거 같으니까 여러분과 얼굴 맞댈 시간도 없고.”
“…….”
대충 지내겠다는 뜻이 역력한 인사!
치료사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 궁금한 거 없으시죠? 이만 다들 하시던 일 하시고….”
그러며 구석구석 사람들을 살펴보던 키리아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놀랐다.
‘릴리가 왜 여기 있지?’
릴리가 치료사들 사이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두 손을 가슴 앞으로 꼬옥 모아 쥐고, 무언가를 참듯 입술을 꽉 오므리고 있던 릴리가 별안간 번쩍 손을 들었다.
“질문 있어요!”
“어… 네?”
“독초가 특정 대상에게 약초보다 더욱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발견하셨나요?”
당황스러웠지만 키리아는 일단 성실히 답해 주었다.
그러자마자 이번엔 다른 사람이 손을 번쩍 들었다.
“칼럼을 연재하실 때 반응이 무척 안 좋았는데, 언젠가 이렇게 뒤집어질 거라고 확신하신 겁니까?”
“그건….”
대답도 전에 또 다른 질문이 치고 들어왔다.
“가장 인기 좋고 실용성 있는 독초가 뭔가요?”
“뭐부터 연구해야 성공할까요?”
“독초 무역회사도 등장했던데 주식 살까요?”
“자, 잠깐!”
계속해서 질문이 쏟아졌다. 그럴수록 치료사들은 자기 질문이 묻힐까 봐 더욱 열성적으로 변해갔다.
나중에는 누구 하나 앉아 있지 않고 다들 일어서서 앞으로 나오려 들었다.
예상 밖의 열기에 키리아는 그들을 만류하듯 두 손을 내보였다.
“다들 왜 이렇게 적극적이에요? 전 놀브 후작님 자리에 들어온 건데요?”
“그러니까요!”
치료사들이 입을 모아 외쳤다.
“후작님도 분명 실력은 좋으시지만, 연구는 뒷전이셨거든요.”
“논문이랑 자료조사랑 실험 준비도 항상 우리한테 시키시고요!”
“항상 고가의 성의 표시를 하는 사람들만 편의를 봐주셨어요! 다른 사람들은 연구 심사도 통과시켜 주지 않더라니까요! 얼마나 눈꼴시던지!”
“그랬는데 메데이아 님 덕분에 물갈이가 됐잖아요!”
아. 그렇구나?
키리아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적폐 청산을 해서 기쁜 상태였고, 그래서 직접적 원인이 된 나를 반가워하는 거구나.
“오….”
얼떨떨하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래도 독초에 이 정도로 관심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요.”
“그건 제가 알아요!”
번쩍 손을 든 릴리가 발랄하게 덧붙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의료원에 주신 메데이아 약품들 덕분이에요. 아주 칭찬하셨거든요. 그래서 직접 쓰고 연구해보니 진짜 칭찬하실 만 했던 거죠! 반박 불가예요!”
“전하께서…?”
알렌스가 그 많은 약품을 어디에 던져놨나 했더니 바로 이곳이었다.
키리아는 놀리듯 싱글거리던 황태자를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이런 식으로 내가 뒤통수를 맞을 생각에 즐거워하던 것 같았다.
‘황태자도 참 이상해. 그런 게 남주라니….’
릴리한테 만나지 말라고 해야겠다.
“좋아요, 여러분. 그럼 여러분을 이끌게 된 수석치료사로서… 첫 번째 과제를 드릴게요.”
“네…!”
다들 두근두근 기뻐하며 뒷말을 기다렸다.
“오늘은 첫날이니까.”
키리아는 책상에 두 손을 짚고 진지하게 말했다.
“자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