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키리아는 마이언의 벗겨진 이마에 불끈 돋아나 있는 혈관을 유심히 관찰했다.
‘공작님이 내 사업을 도와주기 전에 만났다면 상을 엎었을지도 모르겠는데?’
키리아는 처량한 꼴의 제논을 새침히 바라봤다.
아까부터 제논이 힐끔거리며 도움을 청하고 있었다.
계속 무시하려 했는데,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모습에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흥. 하는 수 없지.
“아버… 아빠.”
“으, 음?”
키리아로부터 처음 듣는 친근한 호칭에 마이언은 순간 당황했다.
키리아가 마이언을 달래듯 웃으며 접시 위의 스테이크를 썰어 줬다.
“공작님도 아빠가 누군지 아셨다면 다른 대우를 했을 거예요. 제가 공작성에 있을 때 얼마나 잘해주셨는데요. 월급 통장 보셨잖아요. 별 시시콜콜한 명목으로 입금된 보너스, 휴가비, 상여금 등등.”
“맞아요, 아빠.”
누나가 애쓰는 걸 본 리안도 쪼르르 다가왔다.
리안은 누나의 반대편으로 와서 마이언의 팔뚝을 애교스럽게 잡았다.
“저한테까지 인정받고 싶어서 여기까지 오셨잖아요. 그리고 불량배들한테서 절 얼마나 멋지게 구해주셨는데요! 되게 강했어요.”
“맞아요, 아빠.”
“정말요, 아빠.”
야옹야옹. 두 검은 고양이가 마이언의 양옆에 붙어 저 인간 한 번만 봐주라고 졸라대는 모양새였다.
마이언은 당혹스러워하면서도 솔직하게 콧구멍을 벌름거렸다.
“크, 크흠! 뭐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지….”
말하던 그는 이쪽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제논과 눈이 마주치자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공사는 구분해야지! 공작님과 긴밀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너희는 들어가거라!”
“네에.”
리안과 함께 하는 수 없이 물러나며, 키리아는 제논을 향해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난 할 만큼 했어요?’
어쩐지 제논의 눈빛이 서러워 보였지만 무시했다.
키리아는 식당을 나가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내가 부업으로 주치의도 하겠다는 게 이렇게 심각할 일인가…?’
키리아는 몰랐지만, 마이언과 제논에게 이 신경전은 중요했다.
이건 다름 아닌, 사위가 되고 싶은 자와 장인어른이 되기 싫은 자의 기 싸움이었으니까.
º º º
흡연실로 자리를 옮긴 마이언과 제논은 술 두 병을 비웠다.
얼굴이 불그스름 달아오른 마이언이 양해를 구한 후 시가를 태웠다.
한참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말했다.
“제 여식… 키리아는 좋고 싫음을 잘 숨기지 못하는 아이입니다. 아까도 얼굴에 드러나더군요.”
“…….”
“심지어 리안까지 각하에게 마음을 연 모양입니다. 참, 손도 빠르십니다.”
“의도한 일은 아닙니다. 그저….”
검술로 거래를 했을 뿐….
“…마음이 잘 맞았을 뿐입니다.”
“흥.”
마이언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짧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한참 후에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전 제 자식들을 잘 훈육하고자 합니다만, 늘 정신을 차려보면 고집을 꺾는 건 대부분 제 쪽이더군요. 이번에도 그렇겠죠.”
“많이 사랑할수록 많이 지게 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런 말은 됐어요. 저도 이미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것 한 가지만큼은 꼭 대답해주시길 바랍니다. 솔직하게요.”
“말씀하십시오.”
“키리아를 마음에 두고… 사랑하고 계십니까?”
“……!”
제논은 곤란한 낯빛이 됐다.
그에 마이언은 더욱 고집스런 얼굴로 대답을 종용했다.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
마물병은 치료됐지만 이상하게도 왕의 맹세는 여전히 남아 있는 제논이었다.
그래서 섣불리 답을 할 수 없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말이 또 엉뚱하게 바뀌어 나간다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꽃말을 이용해 마음을 전하는 것도, 왕의 맹세에 걸렸다는 사실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고백하는 것도 전부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대답할 수 없습니다.”
잔머리를 모르는 제논은 정면돌파를 택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지금은 대답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달그락.
얼음만 남은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제논이 내리깔았던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웃음기 없는 황금빛 눈동자로 마이언을 직시했다.
“다만 한 가지는 약속드리겠습니다.”
제논이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 팔이 내게 붙어있는 한 온 힘을 다해 은혜를 갚을 겁니다. 내 몸과 마음, 어떤 것도 이보다 우선할 순 없습니다.”
“…….”
마이언은 제논의 멀쩡한 오른팔을 바라봤다.
일전에 연회에서 보았을 때는 영락없는 마물의 팔이었는데, 지금은 확실히 치료가 된 모습이었다.
거친 비늘도, 갈고리 같은 손톱도 없었다.
더는 키리아에게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내내 노기를 띠고 있던 마이언의 음성이 다소 누그러졌다.
“듣기 좋은 말은 동전의 양면입니다. 저 같은 상인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죠. 하지만….”
마이언은 티끌 하나 없는 금색의 눈을 응시했다.
오랫동안 상인 노릇을 했기에 알 수 있었다.
저 눈은 요령도 거짓도 모르는 바보 같은 사람의 것이라고.
흥. 마이언이 가볍게 웃었다.
제논을 대면한 후 처음 보이는 웃음이었다.
“이거 하나는 알겠군요. 각하는 제 딸아이가 티끌 하나라도 다치게 두진 않을 거란 걸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제논의 입가에도 살며시 미소가 떠올랐다.
“결코 그녀가 다치게 하는 일은….”
그때였다.
“윽!”
쨍그랑!
제논의 오른손에서 술잔이 떨어졌다.
부르르, 멋대로 경련하는 팔을 제논이 힘주어 붙잡았다.
그래도 경련은 멈추지 않더니, 멋대로 팔이 변형되기 시작했다.
우드득, 우득.
뾰족한 비늘이 돋아나며 검은 손톱에 날카롭게 뻗어 나왔다.
팔의 모양새가 사람의 범주를 벗어났다.
“흑, 하아….”
믿기 어려워하는 얼굴로 제논은 제 오른팔을 바라봤다.
마물의 팔로 돌아오고 말았다.
“…맙소사.”
경악한 마이언의 중얼거림에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섬뜩하게 붉어진 제논의 눈동자.
마이언의 손에서 시가가 툭 떨어졌다.
º º º
제논은 클로버필드 백작저에서 소박맞듯 쫓겨났다.
마이언은 키리아를 위험하게 둘 수 없다며 제논과 절대 만나지 못하게 했다.
이 탓에 키리아는 답답했다.
“왜 재발했는지 진단을 해야 한다니까요?”
“그런 건 신관들에게 맡겨라! 네 영역이 아니야!”
“거참 좋은 생각이네요!”
그래서 키리아는 제도에 있는 신전에서 제논과 몰래 만나기로 했다.
제논의 검술 수업을 받고 싶어하는 리안의 협력 덕분에 키리아는 몰래 나올 수 있었다.
북부에 있는 대신녀도 이 소식을 신관들로부터 전해 듣고 급히 마법으로 이동해 왔다.
그리하여.
키리아와 제논, 대신녀, 그리고 키리아가 챙겨 온 신목의 가지가 모였다.
“상황은 전해 들으신 그대로예요.”
원형의 탁상 앞에 앉은 키리아가 말했다.
“공작님의 마물병이 재발했어요. 최대한 소문이 퍼지는 걸 막아보려 했지만….”
<구건 힘들게찌…. 우리 아이 평파니 또 내리막길을 걷고 있게꾸나.>
“맞아….”
신목의 가지를 통해 꽃님이도 마물병 재발 대책 회의에 참여하고 있었다.
“내 이론대로라면 약은 이상이 없을 텐데…. 뭐가 부족했던 걸까?”
“문제는 키리아 양의 약이 아닐 거예요.”
대신녀가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제논 경. 경의 몸에 새겨져 있는 신성 봉인마법진을 보여줄 수 있나요?”
“…그러죠.”
제논이 케이프와 상의를 벗어 앞섶을 드러냈다.
그러자 근육이 꽉 짜인 보기 좋은 상체에 복잡하게 새겨진 마법진이 드러났다.
“응…? 모양이 이상한데요?”
바라보던 키리아는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제논의 앞으로 다가와, 그의 가슴을 손끝으로 짚고 훑으며 새겨진 마법진을 가까이서 들여다봤다.
“…….”
제논의 입술이 달싹 열렸다가 다물렸다. 그의 얼굴 전체에 엷은 홍조가 올랐다.
“…흠흠!”
<에헴에헴!>
두 어르신이 엄한 헛기침으로 젊은이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으악, 저, 저도 모르게!”
키리아가 화들짝 손을 뗐다.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며 키리아가 애써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공작님. 이 마법진 원래 이렇게 일그러진 모양새였어요?”
“아니오. 이렇진 않았는데….”
마법진을 구성하는 복잡한 원과 글자들이 일부 찌그러져 있었다. 꼭 훼손된 것처럼.
대신녀는 예상이 맞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병이 재발한 이유를 알 것 같군요. 봉인마법진 때문이에요.”
“네? 이건 마계의 문을 봉인하기 위한 것 아닌가요? 이게 왜 마물병을 재발시킨 원인이 돼요?”
“‘봉인’의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에요.”
대신녀가 모두에게 설명했다.
“일전에… 설명드린 적이 있죠. 제논 경에게 새긴 봉인마법은, 가짜 성검으로 인해 불완전해진 것이라고요.”
“네.”
잠시 제논을 미안하게 바라보던 그녀가 말을 이었다.
“불완전한 봉인마법진의 부작용이라고 추측되는군요. 이 마법이… 경에게 있는 마물병까지 붙잡아두고 있는 것으로 보여요.”
“붙잡아두고 있다고요…? 그럼 다시 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뜻이에요?”
“…네.”
대신녀가 침통하게 답했다.
<퓨우. 그렇다묜 방법은 한 가지뿐이겠꾸나.>
꽃님이가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마법진을 없애버리는 고야. 물건처럼 고쳐 쓸 순 업스니 마리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마계의 문의 봉인이 잘못될 수도….”
대신녀가 우려를 표했지만, 키리아가 단호히 그녀의 말을 잘랐다.
“그건 따로 생각해야 할 문제죠. 마계의 문 때문에 또 공작님이 희생할 수는 없어요. 주치의로서 결사 반댑니다.”
애초에 책임소재는 이런 일을 벌이고 숨긴 황제와 대신녀에게 있었다.
“…맞는 말이에요. 마계의 문은 따로 고민해야 할 문제겠죠.”
대신녀는 면목 없이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결심한 듯 확고히 말했다.
“좋아요. 우선 봉인마법진을 없애야 합니다. 그러려면 필요한 물건이 있어요.”
“내가 사용했던 가짜 성검 말이군요. 그게 마법진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제논이 대답했다.
“맞아요. 그 검이 있어야 마법진을 없앨 수 있어요. 우선 연결을 끊어야 하니까요.”
“가짜 성검이라….”
키리아가 중얼거렸다.
“황제가 가져갔다고 했죠?”
“네. 어딘가에 숨겨 놓았겠죠. 진짜 성검이 아니니 분명 마왕의 마기에 영향을 받았을 거예요. 마검으로 변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 검이라면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들키면 황제 본인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전부 밝혀지게 될 테니까.
“몰래 가져와야 하겠죠…? 근데 단서가 전혀 없으니 어떻게 한담….”
황궁은 보통 넓은 게 아니었다. 말이 황궁이지, 황궁의 영역 안에는 궁만 여러 채였다.
궁마다 숨겨진 방이나 보물고는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잠시 생각하던 제논이 말했다.
“일단은 내가 직접 황제를 만나보겠습니다.”
“네? 순순히 주려 할까요?”
안 줄 거 같은데?
제논 역시 키리아의 회의적인 반응에 동감하는 듯했다.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도 황제는 제국을 지키려는 마음만은 강한 인물입니다.”
“본인의 안위와 권력을 지키려는 게 아니라요?”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그 점을 이용해볼 수 있겠죠.”
제국을 위협하는 마계의 문과, 황제가 숨기고 있는 비밀.
“우리가 쥔 두 가지 사실로 황제를 흔들어보려 합니다. …후.”
벌써부터 만나기 싫다는 듯 제논이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명색이 제국의 지도자라면 적어도 고민해볼 테죠.”
º º º
황제는 제국의 지도자가 아니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