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141)

124화

키리아는 철판을 깔고 알렌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전하. 독초 연고와 생명석 아티팩트는 이미 먼저 예약하신 분이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기다리세요. 그리고 공작님.”

이번엔 제논을 나무랐다.

“제 실력을 잊지 못해 찾아오신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요.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돼요. 제 약을 구하시려면 공작님이라도 순서를 지키셔야 해요!”

키리아는 팔짱을 꼈다. 황태자와 공작을 번갈아 보며 마지막으로 당부했다.

“제 약의 가치를 가장 먼저 알아봐주신 두 분께 정말 감사드려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예약 순서를 바꾸거나 예정일보다 더 빨리 제품을 받으실 수는 없어요. 계속 이러시면 죄송하지만 거래는 없던 걸로 하겠습니다. 나가주세요.”

“…….”

제논과 알렌스는 동그래진 눈을 끔뻑였다.

두 사람은 키리아의 의중을 확인하듯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알렌스가 재빠르게 먼저 장단을 맞췄다.

“미안합니다, 키리아 양. 전에 구매한 독초 연고가 제 기대 이상이지 뭡니까. 기사단은 물론이고 황궁의 사용인들까지 탐을 내더군요. 그래서 모두에게 주고 싶은 마음에 욕심을 부렸습니다.”

황태자가 어떠냐는 듯 약간 의기양양한 눈빛으로 제논을 쳐다봤다. 그러다 의아해했다.

예상외로 제논이 조용했던 것이다.

침묵이 점점 길어지자 초조해진 키리아는 눈짓으로 제논을 재촉했다.

‘사직서는 나중에 얘기하고 지금은 장단 좀 맞춰주세요! 제발!’

“…….”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제논은 키리아와 알렌스, 그리고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훑어봤다.

마치 상황과 분위기를 가늠해보는 것처럼.

그러더니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논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재촉할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키리아 양. 가게에 폐를 끼쳐 미안합니다.”

“아뇨… 뭐….”

키리아는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제논이 말문을 연 건 다행이지만 그의 반응은 너무 약했다.

이대로는 셀럽(?)들을 이용해 홍보하려는 키리아의 계획이 물거품이 될 것이다.

그런데 제논의 말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대는 날 이해해줘야 합니다.”

“네?”

“그대는 알고 있을 겁니다. 그대가 공작성과 북부에 얼마나 큰 도움을 줬는지. 지금도 북부에선 그대를 구원자라고 부릅니다. 그런 그대가 이곳에 가게를 차리다니… 질투가 났습니다.”

제논은 다소 화가 난 듯한 표정을 했다.

“왜 북부가 아니라 남부에 가게를 차린 겁니까?”

‘지, 진짜 화났나?’

하긴, 주치의가 말도 없이 일을 그만두고 사라졌으니 화날 만도 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키리아도 연기에 진심이 섞였다.

“그게… 말없이 나온 건 죄송해요. 하지만 돌아갈 순 없어요. 전 북부를 좋아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 집과 가족은 이곳에 있는 걸요.”

키리아의 목소리가 모두에게 똑똑히 들렸다.

“제 고향은 이곳이에요.”

“…….”

그녀의 말에, 삼각관계에 흥분하며 세 사람을 바쁘게 번갈아 보던 귀족들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됐다.

바로 키리아 한 사람에게.

제논이 씁쓸하게 웃었다.

“남부인들은 정말 행운이군요. 그대라는 인재가 있어서.”

“공작님….”

제논이 키리아의 손을 더없이 간절하게 붙잡았다.

“키리아. 난 그대를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북부의 모든 귀족과 백성들도 그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대는… 북부의 영원한 은인이니까요.”

남부 귀족들 사이에 소리 없이 동요가 번져나갔다.

그들은 키리아를 새삼스레 바라봤다.

‘북부인들의 은인이라고?’

‘그 은인이 우리 남부 귀족이라고?’

독초 약제사는 북부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 스스로 말하지 않았는가. 본인의 집은 이곳 남부, 제도라고.

남부 귀족의 일원이라고 말이다.

“…….”

그제서야 천천히, 그들의 마음속에서 만족감이 피어올랐다.

키리아가 자랑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 북부가 부흥하는 건 배 아프지만 그거 전부 우리 남부 귀족 덕분이잖아! 저 독초 약제사 영애 말이야!’

‘저 영애는 우리 쪽 사람이라고!’

키리아가 아무리 신문에 대서특필되며 활약해 봤자 이웃집의 배 아픈 일로 여기던 남부 귀족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들은 ‘느그 키리아’를 ‘우리 키리아’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키리아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메데이아 브랜드가 지지부진했던 가장 큰 이유.

그 문제 해결의 물꼬가 열렸다.

매장 한복판에 서 있던 릴리는 이런 변화를 누구보다 빠르게 감지했다.

그리고 확신했다.

‘이제 됐어!’

사교계의 분위기와 변화에 민감한 그녀이기에 알 수 있었다.

남부 귀족들이 비로소 키리아와 그녀의 브랜드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거야말로 진짜 순풍이었다.

여기에 제논이 쐐기를 박았다.

“키리아. 여기서 일이 잘 안 되면 언제든 북부로 오십시오. 그대의 약품을 알아보고 감당할 수 있는 귀족은 북부에 있으니까요.”

북부 공작이 그렇게 말하자 한 남부 귀부인이 릴리에게 거만하게 주문했다.

“여기 제품들 전부 빠짐없이, 열 박스씩 보내줘요.”

“저도요.”

“이쪽도.”

북부에 질 줄 알고?

호승심 어린 귀족들이 앞다퉈 주문을 해댔다.

황태자 스캔들 때처럼 깨작거리는 주문이 아니었다. 다들 통이 엄청나게 커졌다.

릴리와 로버트는 신이 났다.

“네! 알겠습니다, 부인!”

“꼼꼼히 포장해드리겠습니다!”

이 광경에 고무된 키리아는 고마움의 시선을 제논에게 향했다가 머뭇거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공작님. 제가 정체를 숨긴 건 죄송….”

“필요 없습니다.”

키리아는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제논은 화난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키리아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가져와 나직이 속삭였다.

“그저 이것만 기억하십시오. 방금 내가 한 말들은 거짓이 아니라는 것.”

“……!”

“그대가 어떤 이름을 몇 개나 갖고 있든 내게 그대는 여전히 한 사람이니까요. 키리아. 바로 내 주치의 말입니다.”

“…….”

제논을 바라보는 키리아의 시선이 묘해졌다.

“그대가 이곳에 돌아온 이유도 충분히 알았으니… 이젠 내가 그대와 함께 있을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귓가에서 입술을 떼어내며 제논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때까지 사직서는 수리하지 않을 겁니다. 이건 양보할 수 없어요.”

“그건 고용주로서?”

“네?”

키리아는 일말의 기대감을 갖고 제논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다른 건? 단지 그 말씀을 하려고 여기까지 절 찾아오신 거예요?”

“…그렇…습니다만?”

순간 키리아의 눈에 실망의 빛이 스쳤다.

제논도 그것을 캐치했다.

“키리아. 내가 무언가 실수라도….”

“아뇨, 아니에요. 그냥.”

머뭇거리던 키리아가 이윽고 제논을 똑바로 쳐다봤다.

“전 공작님 좋아한다고요.”

“……!”

제논의 얼굴이 붉어졌다. 붉다 못해 빨갰다.

하지만.

“…나도 그대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제논의 대답은 키리아를 혼란스럽게 했다.

대답이 왜 저 따위란 말인가?

‘터질 것 같이 빨개진 얼굴만 보면 날 완전 좋아하는 건데?’

막상 귀에 들린 건 거절할 때 나올 법한 대사라니.

내가 과민반응하는 건가? 너무 의미부여 하는 거야? 아니면….

공작님은 나만큼 좋아하지는 않는 건가…?

‘헐. 왠지 그럴 듯해.’

키스할 정도로는 좋아하는데 고백할 정도까진 아닌 거지.

‘뭐야. 열 받네?’

좋아하는 티는 먼저 내놓고 이러기 있냐? 근데 또 저 얼굴만 보면 나보다 백배는 더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아씨. 진짜 모르겠어. 뭐냐고요!’

키리아는 제논을 하찮고 옹졸한 눈빛으로 째려봤다.

그런 그녀를 보며 제논은 남몰래 답답한 입술을 깨물었고, 알렌스는 흐린 눈을 했다.

“여기 황태자도 있습니다, 두 분….”

º º º

사교계의 분위기가 바뀌자, 신문의 기사 내용도 달라졌다.

그동안은 스캔들에만 집중하던 기사들이 이제야 독초 약제사가 직접 세운 브랜드, 그리고 독초 약품에 대해 조명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키리아가 메데이아로 썼던 칼럼까지 재조명을 받았다.

이런 흐름을 가능하게 한 제논의 활약은 마이언의 귀에도 들어갔다.

곧 출간될 <메데이아가 독초를 쓰는 101가지 방법>의 원고를 보고 있는 마이언.

그의 콧구멍이 흐뭇함으로 벌름거렸다.

“크흠.”

원고를 덮은 그는 식탁 한쪽에 말없이 앉아 있는 손님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녁 식사 초대를 받은 제논이었다.

“…제 여식의 일을 도와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뿌듯한 기색을 숨기며 제논이 답했다.

그러자 마이언이 곧장 말했다.

“당연히라니요. 각하와 제 딸은 이제 아무런 사이도 아닌 남남인데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제 딸을 도와주셨으니 마땅히 감사해야지요.”

“…….”

제논이 시선을 숙였다.

속으로는 무진장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키리아의 곁에 있기 위해 마이언에게 허락을 구하고자 찾아온 제논이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난항이었다.

어째선지 아군인 줄 알았던 키리아는 도와주지도 않고 째려보고만 있고….

마이언의 와인잔이 비자 하인이 다가와 잔을 채우려 했다.

제논이 와인병을 얼른 빼앗았다.

“내가 하지. 백작, 제가 채워드리죠.”

“아니 각하께서 술을 따라주시다니요? 그리고 말도 놓으십시오. 저한테 잘못하신 것도 없으시잖습니까?”

따끔따끔. 마이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제논을 찔렀다.

제논은 바르르 떨리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마이언의 잔을 채워주었다.

“음… 백작. 그… 제가 제안서를 철회했던 일은… 미안합니다.”

“아니요, 아니요!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공작 각하께 백작인 제가 눈에 찰 리 있겠습니까? 하하하.”

“…….”

“다 이해합니다. 이해하고말고요. 각하의 격에 맞추려면 저와 제 여식까지 한참 모자라지요. 이거 참 면목 없습니다. 하하핫!”

마이언이 제논을 말로 후드려 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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