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웅성웅성.
독초 의약품 전문 브랜드 ‘메데이아’ 매장 안이 북새통을 이뤘다.
황태자가 고백한 인물이 누구인지, 그래서 어떻게 되어가는 건지, 사랑이 이루어질 것인지 아닌지가 지금 사교계 초미의 관심사였다.
매장을 채운 손님들 모두 사랑의 현장을 실시간으로 직관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손에 집히는 대로 구매하면서 매장 2층 테라스를 힐끔거렸다.
그곳 테이블에 화제의 두 사람이 앉아 있었으니까.
알렌스가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제 고백에 질색하더니… 이렇게 구경당하기 좋은 곳에 앉으셨군요.”
“누가 퍼먹여 주는 건 거절하지 않는 성격이라서요.”
키리아도 웃으며 찻잔을 들었다.
일층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엔 애정 전선이 아주 화목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시다면 더 먹여드릴까요?”
“네?”
알렌스가 테이블 위에 놓은 키리아의 손등을 제 손으로 살며시 덮었다.
그러자 아래층에서 ‘오오오―’하는 감탄이 흘렀다.
“아뇨. 제가 알아서 퍼먹을게요.”
키리아는 난감한 얼굴로 손을 뺐다.
그러자 아래층에서 ‘어어어―’하는 탄식이 흘렀다.
물론 그중에는 안도의 한숨을 흘리는 영애들도 많았다.
하여간 어느 세계든지 사람들은 스캔들을 참 좋아해.
생각하며 키리아는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전하. 무작정 오신 건 아닐 테죠? 제게 진짜 하실 말씀이 뭔가요?”
“전 당신을 곁에 두고 싶어요. 주치의가 부담스럽다면, 황실 의료원으로 오세요.”
제안을 거절한 이유를 물을 줄 알았는데, 다시 붙잡으러 왔다고?
예상치 못한 알렌스의 제안에 키리아는 입을 뻐끔거렸다.
“어… 제 실력이 뛰어난 건 맞지만, 황궁에도 저만큼 뛰어난 사람이 많을 텐데요?”
“하지만 독초를 그대만큼 잘 다루는 사람은 없어요.”
“독초 때문에 저를 스카웃하시겠다고요?”
“아시다시피, 제 몸은 일반적인 치료로는 전혀 차도가 없어서.”
알렌스가 처연하게 웃었다.
“그래서 독초라면 어떨까 생각하게 된 거죠. 실제로 그대가 메두사병이라는 희귀병을 독초로 치료하기도 했고요.”
“그건 그렇지만….”
다른 방법이 안 되니 독초라도 써보자는 절박함을 알기에 키리아는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하지만 약해진 마음보다 더 강한 건 이왕 퍼먹은 거 더 퍼먹어보자는 잔머리였다.
‘그렇지만 대놓고 요구하면 이쪽이 너무 밑바닥을 보이는 거잖아?’
키리아는 한 손으로 제 뺨을 감싸며 곤란한 척 말했다.
“하지만 전 지금 일도 중요하고… 무엇보다 제가 황실 의료원에 들어가는 걸 폐하께서 허락하시지 않을 것 같은데요.”
지금은 사표를 내고 나왔다지만, 황제가 보기엔 키리아는 공작의 사람일 터였다.
키리아도 황제의 편이 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고.
“걱정마세요. 의료원은 제 산하에 있는 기관이니까. 폐하라도 제 인사 결정에 관여하실 수는 없습니다.”
“어머, 그건 몰랐네요. 그렇지만… 휴. 보셨다시피 제가 자리를 비우기 곤란한 상황이라서요.”
키리아는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웃었다.
“사업은 초반의 기틀이 중요하잖아요. 지금은 매우 중요한 시기라 자리를 비우기가 곤란해요. 저분들도 전하께서 떠나시면 함께 떠나실 분들이고….”
그러며 동정심을 유발하듯 씁쓸해하는 키리아.
그녀의 모습에 알렌스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이것 봐라?
알렌스의 입가에 한순간 진한 호선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하긴, 그대는 한창 사업에 집중하고 싶겠죠. 미안합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제게 효과가 있을 것 같은 약초라도 알려주시겠습니까?”
“약초요?”
아깐 독초를 시도해 본다지 않았나?
“네. 맞은편의 브라이슨에서 찾아보려고 합니다.”
“…….”
알렌스가 능청스럽게 씩 웃었다.
“독초를 능숙하게 사용하실 유일한 분의 도움이 없다니, 약초라도 써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콜록콜록.”
“…어머, 그럼요.”
키리아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당연히 알려드려야죠. 특히 스투피 이파리는 꼭 챙기셔야 해요.”
“그건 처음 듣는데요. 왜죠?”
“뭐든 과하면 독이 된다고, 그동안 실효도 없는 약초를 오래 복용하셨다면 알게 모르게 독소로 변해 쌓여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러다가 불시에― 빵!”
키리아는 무언가가 터지는 모양새로 양 주먹을 활짝 펼쳤다. 그러며 히죽 웃었다.
“…하고 전하의 몸에서 폭탄처럼 터지겠죠. 그럴 때 스투피 이파리가 고통을 없애줄 거랍니다?”
죽을 때 고통 없이 가게 해준다는 뜻이었다.
“…재밌는… 농담이군요.”
“어머. 농담 아닌데요.”
알렌스의 눈꼬리가 씰룩였다.
키리아의 입꼬리도 씰룩였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생각했다.
‘얘 좀 짜증나네….’
“…흠흠.”
알렌스가 먼저 표정을 가다듬고 다시 화사하게 웃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그대는 여기서 할 일을 하세요. 주치의도 황실 의료원의 치료사도 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대신 제가 올게요.”
“네에? 진심이세요?”
진즉에 이렇게 나올 것이지.
키리아는 속으로 좋아서 웃으며 겉으로는 미안한 척을 했다.
“전하께서 그런 수고를 하시다니요.”
“치료사가 움직일 수 없다면 환자가 움직여야죠. 제가 이곳에 드나들면….”
그는 아래층의 수많은 사람들을 힐끗 눈짓하고는 생긋 웃었다.
“그대도 떠먹을 게 많을 것 같고요. 이미 충분히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무슨 소리세요. 제 마음은 온통 전하에 대한 걱정뿐인데요. 진짜.”
키리아는 가슴에 손을 얹으며 말했다.
그런 그녀를 알렌스가 다소 가증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이 여자, 공작이 옆에 있을 때는 순수하게 행동하더니.’
지금은 견적 파악이 끝났다는 듯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지 않고 깐죽거렸다.
그런 생각을 하자 알렌스는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새어나왔다.
“뭐, 속이 뻔히 보이는 아첨꾼보단 재밌네.”
“네?”
뜬금없는 그의 말에 키라아가 눈을 깜박였다.
무시하면서 일어난 알렌스는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며 접객 중인 릴리에게 말했다.
“독초 연고 100박스를 황궁으로 보내주시길.”
“허억! 네, 네! 감사합니다!”
알렌스가 쿨하게 돌아가자, 남겨진 귀족들은 서로 멍해진 시선을 교환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태자가 독초 연고를 대량주문하다니?
“이 제품들이 그렇게 좋은가?”
“나도 조금 사볼까….”
이날 키리아의 매장 재고가 전부 동이 났다.
º º º
마차에 오른 알렌스는 엇건 다리에 팔꿈치를 괴고 심드렁하게 창밖을 바라봤다.
키리아를 황궁으로 데려온다는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자신이 직접 찾아간다는 결론도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건강을 조금이라도 회복하면 되니까.
창밖으로 건물 사이사이 좁은 샛길과,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 보였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장소 곳곳에서 작게 봉오리를 내민 꽃들도 보았다.
알렌스는 검붉은색의 봉오리를 보며 진하게 미소를 지었다.
º º º
메두사병이 완치된 리안은 그동안 배우지 못했던 검술에 빠졌다.
그래서 수업이 끝난 후에도 스스로 남아 연습을 하곤 했는데 오늘은 달랐다.
“도련님, 어디 가십니까?”
리안이 급히 연무장을 떠나려 하자 선생이 물었다.
“약속이 있어서요.”
리안은 어물쩍 대답하고 얼른 제 방으로 돌아와 수수한 외출복을 입었다. 그리고 집을 나섰다.
란페르세 공작과의 약속이 있었으니까.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공작님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처음엔 고작 그런 도발에 남부까지 오겠다니 놀랐다. 전쟁 영웅도 사람이구나 싶었다.
‘역시 누나가 아까워.’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하지만 아버지도 아니고 내 인정을 받으려고 이렇게까지 하다니. 누나를 정말 좋아하나? 근데 왜 좋아한다고 인정을 안 하지?’
이런 궁금증도 들었다.
그래서 어떤 인물인지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자 했다.
리안은 제도 사람들이 약속 장소로 자주 애용하는 사자의 광장으로 나갔다.
먼저 몰래 살펴보고 싶었기 때문에 모자를 푹 눌러썼다.
‘푸른 케이프를 걸친 사람… 푸른 케이프를 걸친 사람….’
오가는 행인을 눈으로 훑으며 찾다가….
툭!
“아야!”
옆으로 사람이 지나가는 것을 미처 못 보고 부딪혀 넘어지고 말았다.
“아이 씨, 뭐야?”
흉갑을 갖춰 입은 사내가 넘어진 리안을 보며 인상을 팍 찡그렸다.
“죄, 죄송합니다.”
리안은 사내의 흉갑 한쪽에 새겨진 문장을 보고 황급히 시선을 피하며 사과했다.
병상에 있을 때 리안은 기사는 물론 검을 쓰는 여러 직업에 대한 서적과 정보를 접했다.
‘저 사람들, 기사 같아 보이지만 갑옷의 문장을 보니 용병단이야.’
그것도 용병단 중에서도 웬만한 기사만큼 무력이 강하고 질도 좋지 않은 이들이었다.
귀족이라면 모를까, 리안은 지금 수수한 옷을 입고 있어서 평민처럼 보였다. 해코지를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나 다를까.
용병은 리안과 부딪힐 때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가죽 장갑을 느릿하게 집어들었다.
“새로 산 비싼 장갑에 흙이 다 묻었잖아. 어떡할 거냐, 꼬마?”
용병은 자신이 정말 기사라도 되는 양 부드럽게 물었다. 하지만 이죽거림은 그대로 드러났다.
“죄송해요. 제가 물어드릴 테니까….”
“네가 백날 일해봐야 이거 한 짝이라도 살 수 있을 줄 알아?”
“그러지 말고 우리가 방법을 제시해 주자고. 우리 신발을 닦는 건 어때? 네 혀로.”
용병들은 낄낄 웃으며 한쪽 발로 리안의 무릎을 꾹꾹 눌렀다.
모욕을 당한 리안이 보랏빛 눈을 사납게 올려떴다.
그 눈빛이 용병들을 자극했다.
“이거 눈깔을 왜 그렇게 떠?”
“이래서 가진 게 없는 것들은 맞아야 주제 파악을 한다니까. 하, 진짜 신사답게 해주려 했더니.”
용병이 제 검을 허리춤에서 반쯤 뽑았을 때였다.
탁. 용병의 굵은 팔뚝을 가뿐하게 붙잡는 누군가의 손이 있었다.
“서신에서 강조하던 신사적인 모습이 고작 이런 건가?”
“…그쪽은 뭡니까? 얘랑 아는 사이에요?”
“본래는 대화부터 할 생각이었는데.”
제논이 조용히 말했다.
그의 케이프 목깃 안쪽에서 뿅, 하고 하얀 몸체를 가진 목이 긴 새끼 도마뱀이 나타났다.
도마뱀이 짤막한 손으로 용병들을 가리켰다.
“먀먀앗!(봐주지마!)”
“그래. 이 모습을 보니 대화보다 행동을 먼저 해야겠어.”
용병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으아악!”
“히익!?”
갑작스레 보인 제논의 행동에 용병들이 기겁했다.
“저, 저 자식이 갑자기 눈에 흙을 뿌려!?”
“미친 거 아냐?!”
그 모습을 리안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