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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화 (121/141)

121화

편지 쓰기가 이렇게 어려운 거였나?

키리아가 바람과 함께 사라진 뒤, 제논은 로하넨의 조언을 받아들여 쫓아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하지만 편지 정도는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키리아도 당장은 그쪽을 더 선호할 것 같았고.

이렇게 간단한 해결 방법을 떠올린 제논이었지만 막상 하려니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메데이아’는 제논을 가장 처음 구원해준 사람이었다. 또한 그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메데이아의 정체가 키리아라고 하니….

‘난 어떤 위치에서 편지를 보내야 하지?’

팬으로서? 아니면 공작으로서?

팬으로서는 키리아가 어디에 있든지 응원하겠다 하고 싶었고, 공작으로서는 지금 당장 돌아오라고 하고 싶었다.

이런 고민을 하던 제논은 마침내 키리아에게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키리아도 그 편을 더 원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신중하게 편지를 보낸 게 며칠 전.

톡톡.

마침내 전서구가 답장을 갖고 왔다.

초조하게 시계만 보고 있던 제논은 전서구가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손가락을 가볍게 휘저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 그렇지.”

그의 오른팔은 더 이상 마물의 팔이 아니었다.

눈동자도 황금색으로 되돌아왔다.

지니고 있던 마계의 힘을 잃은 것이다.

제논은 성큼 걸어가 손으로 유리창을 열었다. 그러며 전서구를 아주 다정스레 반겨주었다.

“어서 와라. 고생 많았다.”

“…삐이.”

전서구가 떨떠름하게 제논을 힐끗 쳐다봤다.

“어서 편지를 놓고 쉬어.”

“삐이.”

제논의 팔에 앉은 전서구가 목을 꿀렁거리며 편지를 뱉으려 했다.

하지만 편지가 안에서 구겨졌는지 속도가 더뎠다.

초조하게 기다리던 제논이 전서구의 목을 손날로 가볍게 쳤다.

“꽥!”

퐁! 편지가 목구멍에서 튀어나왔고, 제논이 편지를 낚아채며 전서구를 자연스레 팽개쳤다.

바닥으로 가련하게 떨어진 전서구는 부리를 부들대며 제논을 노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논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느끼며 황급히 봉투를 뜯었다.

그가 편지 첫 문단을 읽어내렸을 때.

제논의 홍조 띤 뺨이 싸늘하게 식었다.

“…이건 뭐지?”

“뭔데요, 왕?”

제논의 집무실에서 밍기적거리고 있던 가울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두 남자는 함께 편지를 내려다봤다.

편지에는 굉장히 성숙하고 귀족적인 필기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제 누이에게 가장 많은 도움과 구원을 받은 사람을 꼽아보라면 단연 공작님일 것입니다.

누이는 제도에 돌아와서도 공작님의 건강을 밤낮으로 걱정했습니다. 그런데 공작님은 서신 한 통 없이 어째서 누이의 애를 태우셨습니까?

죄송하지만 제 누이에게 더는 연락하지 말아주십시오.

아무리 공작님이라 하더라도 기사도가 부족하신 분은 제 누이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귀족 특유의 인사를 제외하면 이런 내용이었다.

편지를 다 읽은 가울은 길길이 날뛰었다.

“뭐야? 이런 미친! 왕, 이 자식 대체 누굽니까?”

“…키리아의 동생, 리안 클로버필드 경이다.”

키리아의 정체와 신분이 밝혀진 후 제논은 사랑의 라이벌인 ‘리안 경’이 키리아의 친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키리아가 리안의 메두사병을 치료하고자 북부에 왔던 거라는 사실도 말이다.

하지만 제논은 한 가지를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골치 아프다는 듯 제 미간을 눌렀다.

“리안 경은 기사도에 충실한 남자군. 하긴, 누이 덕분에 다시 기사로서 검을 잡을 수 있게 됐을 테니 이토록 감싸는 것도 이해는 가.”

리안을 어린아이가 아닌 성인으로 알고 있었다. 그것도 정식 기사로 말이다.

“때려눕혀 버리죠, 왕.”

“넌 나가라.”

“네….”

가울이 시무룩하게 나간 뒤 제논은 리안에게 답장을 했다.

왜 서신이 늦었고, 자신이 얼마나 키리아에게 고마워하고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를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키리아 양 역시 저와 만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엔 더욱 간결한 답장이 돌아왔다. 어쩐지 어투가 뾰족했다.

[자만하시지 마십시오. 누이에게 고마움과 그리움을 품고 있는 사람은 공작님만이 아니니까요. 정말이지, 기사도 정신과는 거리가 머십니다.]

“…….”

제논은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아니오. 확신하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기사로서의 명예를 전부 걸어도 좋습니다. 키리아 양은 저를 보고 싶어하고, 저는 그 배 이상으로 그녀가 보고 싶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공작님의 기사로서의 명예는 제 성에 차지 않습니다만?]

[제가 무엇을 해야 리안 경의 성에 차겠습니까? 알려주십시오.]

[누님을 연모하십니까? 얼마나, 어떻게요?]

[내 목숨보다도 더.]

솔직하게 답을 쓰던 제논은 주춤했다.

편지지 위의 글자가 제멋대로 바뀌고 있었다.

[내 목숨보다는 아닙니다.]

“……!”

왕의 맹세가 사라지지 않았어?

제논은 자신의 멀쩡한 오른손을 살폈다. 분명 마물의 흔적은 사라졌는데….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제논은 정신을 차리고 답장을 마저 썼다.

대답을 피하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당당히 나갔다.

[제 감정은 다른 누군가에게 시험받아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멋진 말로 포장하며 대답을 피하시는군요? 꽤 자신감이 없어 보이십니다.]

바로 간파당했다.

[그냥 누이를 가만히 두십시오. 누이 곁에는 제가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키리아 양이 없으면 숨이 막힙니다. 그녀가 옆에 있어야 해요.]

[유감입니다. 내 누이는 날이 갈수록 숨을 잘 쉬고 있거든요. 이제야 누이 본인의 삶에 집중하고 계십니다. 그러니 내버려 두세요.]

[적어도 내가 직접 키리아 양과 대화하겠습니다. 편지를 가로막지 말고 전해주십시오.]

[아니요.]

힘주어 쓴 글씨.

[연모하느냐는 질문조차 피하는 분에게 제 누님의 곁을 허락할 순 없습니다.]

[그건 사정이….]

[어떤 사정이든 상관없습니다. 제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는 공작님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뭐 이런 자식이….”

제논의 입에서 거친 말이 튀어나왔다.

열 살 어린애도 아니고, 다 큰 성인이 이런 집착이라니?

이만하면 제논도 많이 참았다. 그는 답장을 짧게 휘갈겼다.

[눈에 흙을 넣어 드리면 허락하시겠군요?]

[하하. 해 보시든지요? 지키지도 못할 말은 하시는 게 아닙니다. 이것 역시 기사도에 어긋나니까요.]

“…….”

그는 벌떡 일어나 하인들에게 지시했다.

“제도로 갈 채비를 해라.”

그리고 제논은 정원 화단에서 흙도 따로 챙겼다.

“주군? 흙은 왜 담으십니까?”

“…대결할 때 필요하다.”

“네?”

스스로도 유치하게 느껴져서 로하넨에게 자세히 대답하진 않았지만, 흙 주머니는 끝까지 품에 챙기는 제논이었다.

º º º

귀족들의 주거지역과 가장 가까운 에메랄드 가든.

이곳은 쇼핑과 패션, 문화예술 공연 등이 밀집해 있는 지역이었다.

귀족들을 대상으로 가게를 열기에 이보다 적합한 곳은 없었다.

“전 평민들을 타겟으로 했었는데, 브라이슨 상단이 순식간에 압도하는 바람에 밀려났어요. 그러니 이번엔 귀족층을 노리는 게 맞지요.”

릴리가 말하며 가게 맞은편을 바라봤다.

“그런데 또 이런 일이….”

키리아도 팔짱을 끼고 맞은편 가게를 바라봤다.

독초 의약품 브랜드인 메데이아 본점은 오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브라이슨 상단의 의약품 가게, 아니, 의약품 백화점이 들어섰다.

키리아도 제법 가게를 크게 냈지만 백화점 정도는 아니었다.

이곳에서 백화점은 부유한 이들의 전유물이라, 백화점이 대중적인 브랜드가 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저건 손해를 보더라도 이쪽을 완전히 눌러버리려는 거잖아.”

키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옆에서 로버트도 동의했다.

“맞습니다. 우리가 세인트 워런트를 받았다는 걸 홍보해도 효과가 기대 이하예요. 저쪽도 세인트 워런트와 황실의 로얄 워런트를 여러 번 받은 적 있는 상단이라.”

“알아요. 게다가 릴리에게 했던 뒷공작도 하고 있겠죠?”

“네. 독초를 잘못 쓴 사례를 옆집 이야기처럼 퍼뜨린다거나…. 교단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이쪽에 타격을 주는 방법이죠.”

“역시.”

한 번 퍼진 소문은 고정관념으로 자리잡기 쉽기 때문에, 웬만해선 만회하기가 힘들었다.

키리아는 파리가 날릴 것 같은 매장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소문을 덮을 만큼 임팩트를 주지 않는 이상은….”

그때였다.

온갖 금과 보석으로 장식한 호화로운 사두마차가 이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마차는 정확히 키리아의 브랜드 매장 앞에 멈췄다.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 상인들, 그리고 백화점 앞에 모여 있던 귀족들까지 모두 마차에 시선이 집중됐다.

호화로움도 압도적이지만, 무엇보다 마차 문에 황가의 상징인 사자가 큼지막하게 찍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황궁에서 왜…?”

키리아가 당황해서 서 있을 때 시종이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우아한 정장을 갖춰 입은 알렌스가 내렸다.

두 손으로 잡아도 벅찰 정도로 커다란 장미 꽃다발을 든 채로 말이다.

“키리아 양.”

알렌스가 붉은 장미 꽃다발을 키리아에게 안겼다.

키리아는 얼결에 장미를 품에 안았다. 그리고 아차 하는 사이에 손등에 알렌스의 키스를 받았다.

알렌스가 빙그레 웃었다.

“그대가 오지 않으니 제가 직접 왔습니다. 부디 절 받아주시지 않겠어요?”

“예… 예? 아니, 전하.”

푸우, 입가에 붙은 장미 꽃잎을 떼 내며 키리아가 대답했다.

“주치의 건은 이미 거절했잖아요.”

“매정하시군요.”

알렌스가 처연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며 키리아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봤다. 여전히 키리아의 한 손을 살며시 쥔 채였다.

“제겐 그대가 필요합니다. 그대 외에는 아무도 안 돼요.”

속삭임 같은 저음이, 숨을 죽이고 이쪽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들에게 선명히 들렸다.

“난 이미 그대의 환자입니다. 내 병을 고칠 수 있는 건 오직 그대뿐.”

“세상에!”

“어머나!”

사람들은 흥분해서 소리를 한껏 죽인 비명을 질렀다.

밖으로 나서는 일 없이 조용하던 황태자께서 이렇게 화끈한 고백이라니!

인기 오페라 뺨치는 고백 장면이 실시간으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뜻하지 않게 주연 배우가 된 키리아는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랑의 환자가 아니라 콜록콜록 환자라는 뜻인데요.’

키리아는 기가 막힌 얼굴로 빙글빙글 웃는 알렌스를 바라봤다.

알렌스가 이번엔 키리아에게만 들리게 말하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좀 도움이 됐을까요? 키리아 양.”

슥삭슥삭!

어디선가 기자들의 맹렬한 필기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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