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141)

120화

봄의 햇살에 어울리지 않는 찬바람이 불었다. 북풍이었다.

“전하. 바람이 차니 이만 들어가심이….”

“조금만 더 있고 싶군요. 혼자서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명령으로 알렌스는 신하들을 물렸다.

그는 정원에 서서 바람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기분이 상쾌했다.

북풍, 개량한 레그누베르, 신전에서 붙잡고 있는 마계의 문, 그리고….

알렌스는 티테이블에 놓여 있는 신문을 힐끗 보며 미소를 지었다.

1면 기사의 큼직한 헤드라인이 보였다.

[불명예는 과거 속으로, 란페르세 공작의 마물병이 치료되다!]

“준비는 다 갖춰졌군.”

한 가지만 더 손에 넣으면 된다.

마왕 폐하를 찌른 성검.

그러면 오랫동안 기다리던 날이 올 것이다.

성검이 보관된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손댈 수가 없으니 다른 수를 써야 했다.

그러려면….

“콜록콜록!”

생각을 이어가던 알렌스는 갑작스레 기침을 터뜨렸다.

등을 굽힐 정도로 거센 기침이었다. 피까지 토했다.

“젠장….”

인마전쟁 때 몸에 마기가 침투해 시한부나 다름없어진 황태자. 세간에선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였다.

황태자 알렌스로 변신하고 있는 마족 플루토.

그가 이토록 약해진 원인은 오러와 신성력 때문이었다.

바로 제논이 그에게 입힌 치명상이었다.

인간계에 계속 머무르며 변신 마법까지 지속 중인 탓에 상처가 전혀 낫질 않았다.

이대로는 계획이 성공해도 정작 자신이 죽을 수도 있었다.

“내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절대 안 되지.”

하. 타향살이 인생, 아니, 마생이 너무 피곤하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거친 기침 소리를 듣고, 근처에서 대기하던 신하들이 서둘러 달려왔다.

“황궁 주치의를 부를까요?”

“뭘 묻습니까. 당장 부르세요!”

호들갑을 떠는 이들을 알렌스가 손을 들어 저지했다.

“아니. 어차피 그 사람들의 진료는 소용이 없습니다.”

마족인 그에게 인간의 약은 듣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단 한 명, 마족에게도 듣는 약을 만드는 사람이 있었다.

알렌스가 눈꼬리를 접어 예쁘게 웃었다.

“내 병을 맡기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마침 제도에 왔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바로 연락을 해 보도록 하죠.”

º º º

“황태자 전하의 주치의가 되어달라고요?”

브랜드 런칭 준비로 바쁜 와중에, 황궁에서 손님이 왔다고 해서 다급히 맞이한 키리아였다.

그런데 황태자의 시종이 가져온 서신은 다름 아닌 주치의가 되어달라는 요청이었다.

키리아는 북부 중앙 신전에서 만났던 알렌스를 떠올렸다.

‘하긴, 각혈까지 한 데다 몸의 기운도 엉망이었지….’

하지만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당분간은 누군가의 주치의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예, 예에? 황태자 전하의 요청을 거절하시겠다는 겁니까? 황궁 주치의로서는 대단히 파격적인 대우까지 약속하셨는데요!”

황태자의 주치의가 된다는 건 차기 황제의 주치의라는 뜻이었다.

황궁 의료원에 들어간 치료사들이 바라보는 가장 높은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 귀한 자리였지만, 지금의 키리아에겐 전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거절할게요. 그럼 전 이만 바빠서.”

“후, 후회하실 겁니다!”

기가 막혀하는 황궁 시종을 등 떠밀 듯 돌려보내고, 키리아는 손님을 맞이하느라 내려놨던 서류를 집어들었다.

서류에는 브랜드 명인 ‘메데이아’의 디자인 시안이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이왕 들킨 김에 마이언에게 자신의 부캐도 공개한 덕분이었다.

“난 세 번째 시안이 마음에 드는데. 독초 특유의 분위기가 있으면서도 화사해서 대중적인 것 같아.”

그러며 키리아가 고개를 들었다.

“네 생각은 어때, 릴리?”

“전 선배님이 골라주시는 거면 뭐든 좋아요.”

여전히 아름다운 금발을 자랑하는 릴리가 방실방실 웃었다.

키리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지 말고 적극적으로 골라봐. 네가 전속 모델이잖아. 센스도 나보다 좋고.”

“저, 정말요?”

“응. 그러니 가장 먼저 너한테 연락했지.”

“기뻐요….”

방긋거리던 릴리의 표정이 다소 가라앉았다.

“전… 제가 너무 성과를 잘 못 내서 동정심에 도와주시는 줄 알았거든요.”

“…….”

릴리는 남부에서 키리아의 독초 연고 사업을 시작했었다.

처음에는 본인의 모델 홍보 효과와 키리아의 활약에 힘입은 유행 덕분에 그럭저럭 잘되었다.

하지만 유행을 이용하려는 건 릴리뿐만이 아니었다.

클로버필드 상단의 라이벌인 브라이슨 상단이 의약품 브랜드를 대대적으로 런칭한 것이다.

검증된 약초의 안전성을 홍보하며, 뒤에서는 독초 때문에 화를 당한 사례들을 끊임없이 흘렸다.

대기업의 횡보에 소상공인 릴리는 힘을 쓰지 못했다.

결국 릴리의 사업은 기울었다. 거의 망했다고 봐도 좋았다.

키리아가 세인트 워런트를 획득하기 직전의 일이었다.

사정을 알게 된 키리아는 즉시 릴리로부터 독초 연고의 권리를 다시 가져오는 한편 그녀를 전속 모델로 발탁했다.

“저… 이미 한 번 실패했는데, 제가 모델로 다시 나서면 역효과 나는 게 아닐까요?”

“그렇게 따지면 메데이아라는 브랜드명 자체가 이미 망했는데 뭐.”

키리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게다가 이번에는 이쪽도 대기업이잖아?”

클로버필드는 브라이슨 상단에게 만년 밀리는 2등 상단이지만 말이다.

“아버지도 적극 도와주실 거야.”

이 브랜드를 통해 1등으로 치고 올라갈 거라는 마이언의 야심이 있기 때문이다.

대수롭지 않아 하는 키리아의 태도에 릴리는 다소 안심한 듯 한결 가벼운 미소를 띠었다.

“…맞아요! 게다가 전문적으로 상품을 관리하고 홍보해주는 분도 계시고요.”

릴리의 해맑은 말에 막 두 사람에게 다가오고 있던 로버트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릴리가 말하는 전문인력이 바로 로버트였다.

리치골드 출판사의 잘나가는 잡지,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편집장.

이제는 ‘전’ 편집장이다.

왜냐면 클로버필드 백작의 압박으로 잘렸으니까.

북부에서 제도로 다시 키리아를 쫓아온 로버트는, 자신이 키리아의 정체를 안다며 은근히 협박을 했다.

그러자 열 받은 마이언이 출판사 사장을 압박했고, 사장은 로버트를 바로 잘랐다.

리치골드 출판사의 VIP 광고주가 바로 클로버필드 상단이었으니까.

넋 부랑자가 될 뻔한 그를 인심 쓰는 척 거두어들여 키리아를 위해 일하게 만든 것도 마이언이었다.

“휴. 전문적이라면 전문적이겠죠. 저보다 메데이아 님의 연구를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드물 테니까요. 경력이 있다 보니 여기저기 연줄도 있고 말이죠.”

“그 능력 200퍼센트 발휘하는 게 좋을 거예요.”

키리아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안 그럼 이전 직장 월급의 절반이 계속 유지될 테니까.”

“아, 압니다. 알고 있다고요.”

대신 성과에 따른 확실한 보상을 약속했기에 로버트는 의욕이 충만한 상태였다.

황급히 답한 그가 키리아에게 신문 한 부를 내밀었다.

“어쨌든 여기, 말씀하셨던 신문입니다.”

“아, 고마워요.”

신문을 받아든 키리아는 시간을 확인한 뒤 바로 걸음을 옮겼다. 리안을 진단할 시간이었다.

“그럼 나중에 매장에서 봐요.”

키리아의 뒤에서 릴리와 로버트가 고개를 숙였다.

“네, 사장님! 나중에 뵐게요.”

º º º

“역시 내 약이 잘 들었구나.”

제논의 마물병이 나았다는 기사를 읽은 키리아는 안심했다.

낫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는데 다행이었다.

“약을 먹었다면 내 편지도 봤을 텐데….”

근데 왜 아직까지 아무런 낌새가 없지?

화를 내거나 아니면 이유를 묻는 편지를 보내올 줄 알았는데 제논에게선 며칠째 감감무소식이었다.

진찰이 끝난 후 혼자 상체 스트레칭을 하고 있던 리안이 키리아에게 물었다.

“누나가 주치의 해줬다는 마물 공작 말이지?”

“응. 이제는 마물 공작이 아니지만.”

“누나가 정체를 밝히는 편지를 남겼는데 답장이 아직도 안 와?”

“응.”

대답한 키리아가 망설이는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먼저 편지를 해볼까…?”

“아니.”

리안이 정색했다.

“안 돼.”

“어, 어?”

“그 사람이 누나의 도움을 가장 많이 받았잖아. 당연히 먼저 편지를 해야지.”

어쩐지 화가 난 듯한 리안이 키리아에게서 신문을 빼앗아갔다.

“가장 큰 문제인 마물병도 누나가 해결해 준 거잖아? 누나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다 해도 그 사람은 오히려 감사해야 해. 그러니까 절대 먼저 편지하지 마.”

“네 말도 맞긴 한데 리안… 연락 뜸하다 아예 인연이 끊어지는 경우도 있잖아?”

“그럼 공작님은 은혜를 모르는 사람인 거지.”

벌침 쏘듯 따끔한 대답이었다.

리안은 키리아를 쏙 빼닮은 얼굴로, 마이언처럼 눈을 부리부리하게 떴다.

“난 은혜도 모르는 사람이 누나랑 어울리는 거 싫어. 누나가 아까워. 그럴 바엔 평생 나랑 살아.”

“남매는 결혼 못 한다니까?”

“상관없어. 난 누나가 날 위해 노력한 은혜를 꼭 갚을 거니까. 검술도 배우고 요리도 배워서 어떤 일이 생겨도 누나 고생 안 시킬 거야.”

“넌 정말.”

동생의 귀여운 말에 피식 웃은 키리아는 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이그,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씨이, 진짠데….”

“그래 그래.”

리안의 머리를 토닥인 키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장에 가봐야겠다. 아직 상품 정리가 안 끝났거든.”

“응. 일찍 들어와, 누나!”

키리아는 대답 대신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방을 나갔다.

남겨진 리안은 강아지처럼 웃고 있던 미소를 싹 지웠다.

“란페르세 공작….”

리안에게 그는 누나를 빼앗아가려는 악당처럼 느껴졌다.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아버지도 공작이 음흉하고 흑심 가득하고 치사하기까지 한 사람이라고 평하지 않았는가?

아무리 인마전쟁의 영웅이라지만, 그것과 누이의 문제는 별개다.

“나도 적지 않은 인생을 살았어. 영웅과 좋은 남자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건 알아.”

올해 11살이 된 리안은 확신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안 돼.”

리안이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였다.

톡톡.

밖에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리안에게도 익숙한 전서구.

숲지기, 란페르세 공작의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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