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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화 (119/141)

119화

베른울프 백작의 메두사병 증세는 확연히 나아졌다.

“이것 보십시오, 주군! 약제사님!”

그는 산적 같은 생김새에 걸맞지 않게 멀쩡해진 두 다리로 폴짝폴짝 뛰어보이기까지 했다.

“부작용이나, 다른 이상 증세는요?”

“없습니다!”

그래서 키리아는 자신의 방에 곧바로 틀어박혔다.

절대, 그 누구도 방해하지 말라는 엄명을 조앤에게 내린 후였다.

덕분에 며칠 후, 리안에게 보낼 메두사병 치료약과 제논에게 줄 마물병 치료약이 완성됐다.

“포장도 다 끝났고.”

리안에게 줄 약은 아버지에게 전달을 부탁해야겠다.

“그리고 이 약은 내가 직접 갖다줘야지.”

키리아는 리본으로 예쁘게 포장한 마물병 치료약을 두 손에 들었다.

“히힛.”

그동안 고생한 결과물이 이 약에 집약되어 있었다.

“엄청 기뻐하겠지? 아, 맞다.”

방을 나가려던 키리아는 얼른 편지지 한 장을 꺼내 펜을 들었다.

“메데이아라는 사실을 숨겼던 이유를 좀 차근차근 써 봐야지….”

말로 해도 되지만 글로 쓰는 편이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 고민하던 키리아가 막 첫 문장을 쓰려던 때였다.

“아가씨. 클로버필드 백작님께서….”

“나중에.”

“하지만 지금… 꺅!”

성큼 다가오는 커다란 덩치에 조앤이 옆으로 밀려났다.

“……!”

지금은 아무런 변장도 하지 않은 상태인데!

키리아는 허둥지둥 편지지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화가 나 마이언을 꾸짖었다.

“백작님! 이렇게 무례하게 나오시다니요! 당장 돌아가세요!”

“그래, 돌아가자.”

“뭐라고요…?”

황당한 키리아가 편지지를 내리며 슬쩍 쳐다보자, 한 손에 아리키의 삽화를 수색영장처럼 내밀고 있는 마이언이 보였다.

형사처럼 눈을 부라리면서 말이다.

“돌아가자고 했다. 키리아 클로버필드.”

“오… 오랜만이네요…?”

키리아는 애써 웃어봤지만 마이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짐 싸라.”

마이언이 단호하게 명령했다.

“지금, 당장!”

‘젠장…!’

º º º

업무 처리 후 성을 찾아온 손님들의 접견까지 마친 제논은 새벽이 가까워서야 쉴 수 있었다.

침실로 돌아와 보니, 협탁에 웬 리본으로 포장된 작은 병이 있었다.

병을 들어 살펴본 제논이 미소를 그렸다.

리본 끝에 동글동글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키리아 특제 마물병 치료약]

[비매품]

이어 그는 병 옆에 있는 편지 봉투를 집어들었다.

리본조차 귀여운데 편지까지 쓰다니. 정말 귀여웠다.

기대감으로 기분 좋게 웃고 있던 제논은 봉투를 무심코 뒤집어보고 표정이 싹 굳었다.

사무적인 흰 봉투에는 강렬한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사직서]

“……?!”

제논의 붉은 눈이 흔들렸다.

뭐지? 설마 새로운 유형의 깜짝 선물인가? 제도엔 이런 이벤트가 유행하나?

현실부정을 하며 봉투 안의 편지를 펼친 제논은 다급히 읽어내려갔다.

편지는 급하게 쓴 모양새로 휘갈겨져 있었다.

[공작님, 갑작스럽지만 급히 집으로 돌아가게 됐어요. 다행히 공작님께 드릴 약은 완성이 됐으니 그 부분은 안심하세요. 전 주치의로서 의무를 완수했어요.

병이 낫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쉽네요….

공작가와 협업하기로 한 사업은 그대로 유효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치킨, 맥주, 마기해독수, 그리고 마기 정화 아티팩트 말예요.

다만 독초 연고의 권리는 제가 가져가요. 원래 제 것이기도 하고, 이건 릴리와 얽힌 것이니까요.]

“…….”

급해 보이는 와중에 정리할 건 딱딱 정리하는 키리아였다.

제논은 섭섭했다.

이런 충격적인 사직서를 던져놓고서 내가 고작 그런 걸 신경 쓸 거라고 생각한 건가.

정작 중요한 사직의 이유가 빠져 있는데 말이다.

분노인지 실망인지 모를 감정으로 제논의 눈빛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그가, 편지에 덧붙인 마지막 문구에서 경악해 굳어버렸다.

[추신: 공작님. 사실 저 메데이아 제자 아니에요. 제가 메데이아입니다. 속여서 죄송했어요. 결코 나쁜 의도가 아니라… 아무튼 정말, 정말로 죄송합니다!]

부르르.

편지를 쥔 손을 가늘게 떨던 제논이 결국 참지 못하고 나지막이 외쳤다.

“추신으로 말할 게 아니잖아!”

제논이 이를 악물었다.

“키리아…!”

제논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기고는 당장 키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방은 비어 있었다.

키리아의 연구 물품은 물론, 자신이 선물한 드레스, 장신구 등을 그대로 둔 채 사람만 없었다.

제논은 조앤과 로하넨을 불러 닦달했다.

“키리아는 어디 있지?”

“아, 아가씨는 낮에 떠나셨어요. 마이언 클로버필드 백작님이 오셔서 함께….”

“클로버필드 백작과?”

제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자가 억지로 데려간 건가?”

“아, 아니요!”

조앤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분은― 클로버필드 백작님은 아가씨의 아버지였어요!”

“…뭐?”

“…예?”

제논은 물론 갑작스런 상황에 황망해하던 로하넨도 놀라 되물었다.

“저, 저도 어쩌다가 옆에서 듣게 된 거라 자세히는 몰라요. 하지만 아가씨는 아버지이신 백작님께 그동안 행방을 숨겨오셨나 봐요. 백작님께서 화가 나셔서 아가씨를 데려가셨어요. 아가씨도… 스스로 따라가셨고요.”

“…….”

“고, 공작님? 괜찮으세요?”

“…아니. 안 괜찮아.”

키리아가 메데이아라는 사실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다.

키리아가 눈물을 보이며 메데이아가 아니라고 했을 때도, 완전히 믿지 않았다.

키리아가 터놓은 속내는 분명 안타까웠지만 그게 메데이아가 아니라는 논리적 증명은 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극구 부인하니 믿기로 했던 것이다.

이미 제논에겐 키리아가 메데이아와 동일인물이냐 아니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클로버필드 백작이… 키리아의 아버지라고.’

그럼 키리아를 보던 애정 어린 눈빛은 주책맞은 흑심이 아니라… 부성애였나.

난 그것도 모르고 백작을 파렴치한 보듯이 쳐다봤고?

그것도 모르고, 연을 끊을 기세로 제안서를 철회했고?

연회 이후 제논은 클로버필드 백작과 얼굴을 맞대지도 않았다.

백작 역시, 제논에게 접견 요청을 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고백을 만회하기 위해 가족에게 잘 보여야 한다는 내 계획이….’

비틀….

“꺅, 공작님!”

“주군!”

순간 비틀거렸던 제논은 벽을 짚고 바로 섰다.

그의 목소리가 아주 낮았다.

“…당장 키리아를 쫓아가야겠다.”

휙! 몸을 돌리는 제논의 팔을 로하넨이 황급히 붙잡았다. 얼른 앞을 가로막고 섰다.

“자, 잠시만요, 주군! 대충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쫓아가시는 건 아주 안 좋은 생각입니다.”

“왜지?”

“백작은 공작성을 진저리치듯 떠났는데, 바로 쫓아가시면 얼마나 더 진저리를 치겠습니까?”

“백작이 아니라 키리아를 쫓아가는 거다.”

“어쨌든 같은 결과입니다.”

“그렇다고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

“일단은 시간을 좀 두시는 게 어떨까요?”

로하넨이 간절하게 말했다.

“당장 가봐야 좋은 소리 못 들으실 겁니다. 시간을 두고, 선물을 제대로 준비해서 정식으로 방문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공작의 정식 방문 요청을 그쪽에서도 명분 없이 거절하긴 힘들 테니까요.”

“…답답하군.”

제논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이 모습을 안절부절못하며 바라보던 조앤이, 위로한답시고 제논을 응원했다.

“공작님. 기운 내세요! 꼭 사위가 될 수 있으실 거예요!”

“…….”

제논은 더 우울해졌다.

º º º

“누나!”

“리안!”

침대에 있던 리안이 키리아가 가까이 다가오자마자 답싹 안겼다.

키리아는 오랜만에 보는 동생의 곱슬머리에 볼을 부볐다.

공작성에서 거의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올 때는 우울했지만, 리안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돌아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이 이 정도로 악화됐을 줄은 몰랐어.”

리안의 석화가 키리아의 생각보다 심각했으니까.

정말 조금만 더 늦었다면 석화가 심장을 뒤덮었을 게 분명했다.

“리안, 이거 마셔. 약이야.”

“약…?”

“응.”

키리아가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만들어왔어.”

그동안 임시방편으로 약을 주면서 미안해하던 미소와는 확연히 다른 환한 웃음.

누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던 리안의 눈이 이내 촉촉이 젖어들기 시작했다.

리안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리안은 약을 마신 후 잠이 들었다.

키리아는 잠든 리안의 머리를 쓸어주며 동생의 몸을 계속 살폈다.

가슴을 뒤덮고 있던 석화가 조금씩 아래로 후퇴하는 모습이 보였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치료되고 있었다.

“휴….”

지켜보던 마이언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가 키리아의 어깨를 두드렸다.

“…고맙다, 키리아. 고생했다.”

마이언의 목소리가 물기에 젖어 있어서, 키리아도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두 사람은 리안이 편히 자도록 방을 나왔다.

제 방으로 돌아가려던 키리아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마이언의 모습에 걸음을 멈췄다.

“왜 그러세요?”

“큼… 그게… 다짜고짜 데려와서 미안하다.”

“이제 와서요?”

키리아는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리안의 상태를 보고 난 뒤라 비웃음은 아니었다.

“됐어요. 만약 제가 늑장 부렸다면 리안에겐 더 안 좋은 일이 생겼을 테니까요. 그보다 이거.”

“음?”

키리아는 줄곧 챙기고 있던 것을 가방에서 꺼내 마이언에게 내밀었다.

“통장?”

“열어보세요.”

통장을 열어 본 마이언은 순간 눈을 홉떴다.

통장에는 키리아가 그동안 북부에서 벌어들인 사업의 계약금과 수익이 찍혀 있었다.

뿐만아니라 조앤으로부터 받는 인세 통장, 마물들의 조공을 돈으로 환산한 조공 통장도 있다.

그리고 주치의로서 일하고 받은 급여 통장까지.

총 4개의 통장에 찍힌 금액을 합하면….

“정말 벌었구나. 425,784,532 골드.”

“…그걸 전부 기억하고 계세요?”

“허어….”

마이언은 감탄을 흘리며 통장을 계속 번갈아 쳐다봤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키리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왜, 왜 그러세요?”

“이 정도의 능력을 숨기느라 그동안 얼마나 답답했느냐.”

“네…?”

“이젠 숨기지 않아도 돼. 네가 공작성에서 독초 약제사로 일해 온 것도 다 아니까. 그리고… 리안을 치료해준 보상도 하고 싶구나.”

“대체 무슨 말씀이세요?”

마이언이 키리아의 양어깨를 턱 붙잡았다. 그리고 비장하게 말했다.

“키리아. 사업을 하자꾸나.”

“…엥?”

“내가, 클로버필드 상단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마. 북부만이 아니라 남부에도 네 명성이 퍼지고 있으니 틀림없이 성공할 거다!”

“갑자기 사업이요? 지금 제 결혼 문제에 대해 얘기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결혼! 지금의 너에게 결혼은 중요하지 않다!”

마이언의 두 눈에서 활화산이 분출하고 있었다. 화르륵!

“네 이름으로 브랜드를 만들자. 세 살 코흘리개도 알 정도로 유명한 브랜드로 키우는 거다!”

마이언이 부르짖었다.

“내가 꽃길을 깔 테니 넌 그냥 따라만 오면 된다! 이 아비만 믿어라!”

“뭐라고요? 우리 아버지 맞아? 당신 마족이지!?”

경악한 키리아가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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