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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화 (118/141)

118화

「마계의 문을 찾았어요.」

대신녀의 전언을 듣고, 제논은 중앙 신전으로 찾아가려던 일정을 바로 앞당겼다.

그래서 키리아는 지금 그와 함께 야산에 있었다.

롤스의 비밀 연구실이 있던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거기에 공간을 찢어낸 흔적 같은 길쭉한 틈새가 허공에 떠 있었다.

주변으로 열 명이 넘는 신관들이 둘러싸 신성력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대신녀가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키리아와 제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얼마 전에 느닷없이 이곳에 나타났어요. 다행히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두는 데 성공했죠.”

“하필 이곳에 나타난 이유가 있을까요?”

키리아가 물었다.

“연구실에서 하던 일들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마기 때문인 것 같군요.”

“마기….”

키리아는 이마를 찡그렸다.

여태까지는 신목들이 마계의 문을 잡고 있었다.

‘그러다 후작의 마물을 부르는 아티팩트 때문에 마계의 문이 이동했던 거였고.’

이번엔 연구소가 폭파되면서 마기가 방출된 탓에 이쪽으로 이동한 모양이었다.

마기가 원인이라면 공작성 근처에도 나타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아마도 공작성 마물들은… 마기를 함부로 뽐낼 수 없으니까 그런 것 같아.’

전에는 제논이 통제하고, 지금은 마물들 스스로 ‘명예롭게’ 행동하려 드니까 말이다.

참 다행이었다.

옆에서 제논이 말했다.

“…롤스 전 추기경이 살아있었다면 보다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요.”

“…면목없어요.”

대신녀가 고개를 푹 숙이자 제논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본래는 롤스를 신문하기 위한 방문이었다. 하지만 설마 도착 전날, 롤스가 시체로 발견될 줄이야.

“정보로 감형받으려 할 것 같아서, 어림도 없단 생각에 받아야 할 죗값부터 몰아붙였더니…. 그래도 죽지 않을 만큼만 했는데.”

“…….”

대신녀님, 의외로 인정사정 없으시네.

“그래도 건진 건 있어요. 루크가 가져온 정보가 있거든요.”

키리아가 말하며 허락을 구하듯 제논을 올려다봤다. 제논이 끄덕였다.

두 사람을 본 대신녀가 걸음을 옮겼다.

“그럼,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지요.”

º º º

“마왕의 꽃이라…. 야산의 연구실에 있던 꽃들이 마왕의 꽃이었다는 거군요.”

“뭔가 아시는 정보가 있습니까?”

대신녀의 표정이 무거워졌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어요. 마왕은 자신의 피로 꽃을 피울 수 있다고. 바로 그게 마왕의 꽃이죠.”

“마왕의 피에서 말입니까.”

“네. 마왕이 만드는 그 꽃은 반대로 마왕에게 생명력을 준다고도 해요. 그래서 마왕의 생명을 상징하죠.”

“자, 잠깐만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키리아가 끼어들었다.

“지금 마왕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그건….”

“마왕은 죽었잖아요? 공작님이 마왕을 성검으로 소멸시켜서 전쟁이 끝난 거라고 알고 있는데요. 안 그래요, 공작님?”

“아는 그대로입니다.”

제논도 고개를 끄덕였다.

“성검은 내 봉인마법진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한층 증폭된 힘으로 마왕을 소멸시킬 수 있었죠. 그 성검을 교단에서 보관하고 있을 텐데요.”

제논의 대답에 고개를 연신 끄덕이던 키리아는 멈칫했다.

꽃님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마계의 문의 봉인은 어쩌면 처음부터 불완전했을지도 모른다는 말.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공작님의 몸에 있는 봉인마법진도 불완전한 거고… 그럼 이어져 있다는 성검도…?’

대신녀를 바라보는 키리아의 표정에 불안함이 차올랐다.

그녀의 얼굴에 대신녀는 나지막한 한숨을 쉬었다.

“…….”

한참을 망설이던 그녀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언젠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죄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제논을 바라봤다.

“제논. 그대와 마법으로 이어져 있는 성검은… 진짜 성검이 아닙니다.”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담담했던 제논의 표정이 조금씩 구겨졌다.

“진짜가 아니라니요?”

“가짜예요. 성검은커녕, 평범한 검이죠. …성검을 완벽하게 모방한 평범한 검.”

“……!”

키리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봉인이라든지 성검이라든지, 그런 걸 잘 몰라도 이게 엄청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성검을 써야 할 자리에 아무 능력도 없는 검을 썼다는 얘기다.

“그래서 꽃님이가 그렇게 말했던 거네요! 봉인이 불완전하다고!”

키리아는 외치며 제논을 휙 돌아봤다.

하지만 제논은 묵묵했다. 그저 뚫어져라 대신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래서 키리아는 제논 대신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하셨어요…?”

“…처음엔 몰랐어요. 봉인마법을 새기는 의식 직전에 성검을 확인했을 땐 분명히 진짜 성검이었어요.”

대신녀가 입을 열었다.

당시 인마전쟁은 제국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마왕과, 끊임없이 마계에서 넘어오는 마물들 때문에 전세가 점점 기울어지고 있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마계의 문을 봉인해야만 했다.

마계의 문과 가까이 있을 마왕을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제논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논의 몸에 마계의 문을 봉인할 봉인마법진을 새기게 됐다. 힘을 더욱 증폭시키기 위해 성검과 연결했다.

제논이 고통 속에서 정신을 잃은 사이, 대신녀는 무사히 의식을 마쳤다.

그런데 마법이 제대로 새겨졌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이상을 알아차렸다.

「성검이…?!」

성검의 검신에는 신성마법으로 인한 고대의 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고대의 문자 곳곳이 불완전했다. 마법이 완전히 새겨지지 않은 것이다.

신성마법이 발현될 때 나타나는 고대 문자는 고위 신관들조차 능통한 이가 드물었다.

이는 누구보다 노숙한 대신녀이기에 알아차릴 수 있는 문제였다.

이때 의식을 지켜보던 황제가 말했다.

「함구하시오.」

「서, 설마, 폐하께서 검을 바꿔치신 겁니까!?」

대신녀는 경악하여 황제에게 따졌다. 이 사실을 공작에게 반드시 알려야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이미 새겨진 봉인마법진이니 공작 대신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할 거요. 대체할 사람이 있소?」

「폐하!」

「설령 봉인마법을 해제하고 다시 의식을 치른다 해도, 그땐 이미 우리 모두가 망자가 된 뒤겠지.」

「……!」

「진실의 대가로 제국의 모든 백성을 희생시킬 셈이오? 그러면 그대의 마음이 편하겠소?」

여기까지 이야기한 대신녀의 얼굴에 깊은 시름이 내려앉았다.

“저는 그 어느 때보다 달갑지 않은 고민을 했지만… 이런 건 중요하지 않겠죠. 어쨌든 저는 함구하길 선택했으니까요.”

“맙소사, 대신녀님….”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키리아는 이마를 짚었다.

“교단이 황제에게 휘둘렸던 것도 그럼….”

전쟁 후 독립적인 세력이던 교단은 황제의 명령을 무시하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

그 이유가 지금 밝혀진 셈이었다.

황제가 수작을 부렸더라도, 봉인마법과 성검, 이 모든 건 교단에서 준비하고 집행했으니까.

진실을 밝히면 교단의 존망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래도… 적어도 공작님한테는 말씀을 하셨어야죠!”

키리아가 책망하며 외쳤다.

제논이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기분이었다.

자진해서 희생한 줄 알았는데, 뒤에서 이런 수작이 있었다니.

게다가 대신녀는 제논을 아끼지 않았던가. 베일로 가린 얼굴을 보여줄 정도로.

그 애정을 믿기에 제논도 대신녀를 원망하지 않았던 것이리라.

하지만 배신당하고 말았다.

“사, 사실을 털어놓으려고 했어요. 하지만 그러기도 전에….”

“…가짜 대신녀로 바꿔치기 당하셨던 거군요.”

“네….”

키리아에게 답한 후, 대신녀는 제논에게 고개를 푹 숙였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합니다.”

“…….”

키리아는 걱정스럽게 제논을 바라봤다.

제논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어딘가 망연한 듯했다.

가만히 대신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제논이 버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짜 성검은 어디에 있습니까?”

“황제가… 가져갔습니다.”

“그렇군요.”

중얼거린 제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공작님!”

놀란 키리아는 제논 대신 대신녀에게 꾸벅 인사하고는 그를 뒤따라갔다.

대신녀는 참담하게 눈을 감았다.

º º º

“…공작님.”

키리아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제논을 불렀다.

공작성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이었다.

제논은 키리아의 부름에도 답하지 않았다. 그저 허망한 눈빛으로 제 두 손을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꼴이 마치 버림받은 강아지 같았다.

그래서 키리아는 자리를 옮겨 제논의 옆에 앉았다.

제논의 푸른 머리칼을 위로하듯 쓰다듬자, 제논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기댔다.

“비난이나 배신은 더 이상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제논의 피곤한 한숨.

“…난 내 생각보다 더 대신녀를 믿고 싶었나 봅니다.”

“…….”

“…키리아.”

“네.”

“그대는 나한테 숨기는 일… 없죠?”

움찔.

제논은 계속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에, 키리아는 자신의 찔린 표정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그… 그럼요.”

있어도 지금 말할 분위기는 아니지.

키리아는 당황스런 눈을 데굴 굴렸다.

내가 메데이아라는 비밀은 방금 대신녀님의 비밀에 비하면 별것도 아니지. 그렇지 않아?

‘딱히 공작님이 상처받을 짓을 한 것도 아니고.’

다만 전에도 지금도 걱정되는 점은….

‘혹시라도 내가 공작님을 농락했다고 받아들일까봐.’

안 그래도 마물병 때문에 주위에서 수많은 배신을 당한 공작님이 아닌가.

그를 속여온 시간이 긴 만큼, 아무리 사소한 비밀이라도 제논에겐 실망으로 남을 수 있었다.

제논에겐 메데이아에게만 털어놓은 사적인 사정과 감정이 있었다. 그걸 키리아는 모르는 체하고 답장까지 했다. 때론 이용했고.

키리아는 울면서 메데이아 아니라고, 믿어달라고 잡아떼던 일까지 주마등처럼 스쳤다.

아무리 악의가 없었더라도 믿음을 이용해 속여온 건 자명한 사실.

‘…돌아가는대로 당장 베른울프 백작님을 살펴보러 가야겠어.’

키리아는 차라리 아예 숨기거나 빨리 털어놓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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