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아!”
키리아의 몸이 옆으로 휘청였다.
다행히 제논이 키리아의 허리를 받치고 있던 덕분에 키리아는 다치지 않았다.
다만 허리가 뒤로 꺾인 채 제논과 거리가 가까워졌을 뿐이었다.
“…전에도 이랬었죠? 마차에서.”
눈을 동그랗게 떴던 키리아가 무안하게 웃었다.
“절 붙잡아주는 건 늘 공작님 몫이네요.”
“당연히 그건 내 몫이어야죠.”
제논이 키리아를 부드럽게 바로 세웠다.
그러며 그녀의 손을 더욱 단단히 잡았다.
“내 목줄을 쥔 사람도 그대이니까.”
“…….”
키리아의 홍조 오른 시선이 제논을 응시했다.
듣기 달콤한 말이었지만, 키리아는 지금 달콤함보다는 시원함을 원했다.
‘어쩌면 오늘… 분명히 말해주려나?’
가슴속에 은밀한 기대감이 차올랐다.
무의식적으로 뒤꿈치를 들고, 얼굴을 그에게 천천히 가까이했다.
그러자 제논의 얼굴도 가까워졌다.
조금씩, 서로의 의중을 확인하듯.
선명하게 들렸던 바이올린의 선율이 서서히 귓가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지금만큼은 주변의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
마치 살결을 포개듯.
첫눈처럼 조용히 입술이 맞닿았다.
키리아는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녹녹해진 자색안이 일말의 불안감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우리 지금, 또… 분위기에 휩쓸리는 거예요?”
“또…?”
의아한 듯한 제논의 반문.
그에 키리아가 보충설명을 하려던 때였다.
제논의 단단한 손이 키리아의 뺨과 목을 한번에 감싸고 붙잡아 당겼다.
“난 이미 오래전부터 휩쓸리고 있었는데.”
“……!”
침착함을 가장하고 있지만, 파고드는 입술에서 갈급함이 느껴졌다.
그의 호흡, 그리고 더 깊은 것까지 단숨에 깊이 파고들어 왔다.
키리아는 가냘픈 숨을 흘리며 제논의 목을 끌어안았다.
제논이 자신을 원하는 초조함이 날것처럼 느껴져 기뻤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는 아쉬움도 자리했다.
‘그런 두루뭉술한 말이 아니라 더 확실한 걸 원하는데 나는.’
머리로는 안다.
제논 폰 란페르세라는 남자는 가식을 모르고 직설적이라, 자신에게 보여주는 행동에도 거짓이 없음을.
이 사람은 나를 좋아하는 걸 거야.
이렇게 이성적으로는 판단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말하지 않으면 가라앉힐 수 없는.
말로써 확인받고 싶은.
그런 감정적인 불안도 있는 법이다.
키리아는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먼저 듣고 싶었는데. 내가 메데이아라고 밝히기 전에 말이야.’
그때 제논의 입술이 잠시 떨어졌다.
“딴생각 금지.”
“앗!”
제논에게 들린 키리아는 순식간에 책상 위에 앉혀졌다.
그리고 몸을 기울인 제논과 재차 입술을 맞물렸다.
이번에야말로 딴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다.
º º º
휘이잉―
북쪽에서부터 찬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먼 북쪽에서 아래 남쪽까지 단번에 치달을 듯 기세 좋게 뻗어나갔다.
“봄에도 이런 찬바람이 부나?”
공작성에 머무르고 있는 손님들 일부가 의아해했다. 봄에 안 맞는 북풍이었으니까.
“제국 수도에 있을 때도 찬바람이 불긴 했잖나.”
“아, 그건 그랬지. 근데 북풍이 여기서부터 이렇게 세게 부는 줄은 몰랐군.”
“뭐, 이것도 인마전쟁의 영향이겠지.”
다들 대수롭지 않게 수군거리며 확 달라진 공작성의 정원을 거닐었다.
공작성과 그 주변은 요툰이 이끄는 드워프들 덕에 지금도 계속해서 진화하는 중이었다.
최근에는 키리아와 감옥에서 나왔던 다른 마을 드워프들까지 합세하면서 경쟁까지 붙었다.
이런 이유로 라데츠는 더 이상 마을이라 볼 수 없었다. 유행을 선도하는 관광도시였다.
그중 단연 인기는 주민들이 적극 추천하는 <주간 마법>.
덕분에 라데츠를 자주 드나드는 공작성 손님들은 잡지의 인기 소설 속 주인공이 바로 공작성 약제사라는 사실을 대부분 알게 됐다.
그리고 이 정보는 마이언 클로버필드 백작에게도 들어가게 됐다.
성에서 알게 된 귀부인이 따봉과 함께 소설을 그에게 추천한 것이다.
‘이 소설 주인공이 공작성의 약제사님이랍니다. 백작님도 읽어보세요!’
리안의 문제가 해결됐으니 이제 마이언도 귀족들의 대화에 껴야 했다.
그래서 억지로 읽었을 뿐이었늗데….
“이 삽화…?”
소설 속 주인공의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었다.
아니, 묘한 정도가 아니다.
“이건 키리아잖아…!”
완전 판박인데?!
삽화를 뚫어지게 응시하던 마이언은 퍼뜩, 일전에 복도에서 주운 편지를 떠올렸다.
[아버지께. 백작님께.
저는 북부에 무사히 도착했어요.
이곳에서 빚을 갚을 방법을 꼭 알아내서, 손해를 메꿔드리도록 할게요.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제가 배운 건 약학만이 아니니까요. 백작님의 어깨너머로 저도 여러 가지를 배웠…]
받는 이와 보내는 이의 이름은 정확히 적혀 있지 않았지만, 아무리 봐도 내용이 익숙했다.
키리아가 자신에게 쓸 법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마물 공작을 일으키고 북부를 떠들썩하게 한 그 엄청난 인물이 내가 아는 키리아라고?’
도무지 믿기 어려웠다.
백작 자신이 아는 키리아의 약학 실력은 취미로라도 잘한다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유명한 인물과 동일인물이라고 쉽게 납득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약제사님의 얼굴도 직접 보지 않았는가?
우리 집 키리아가 더 예쁘고 귀여운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
하지만 이렇게 삽화까지 보게 되니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이 집 키리아가 우리 집 키리아란 말인가.”
허어. 마이언은 탄식을 흘렸다.
“그렇다면 내가 본 얼굴은 가짜란 거군. 마법 혹은 아티팩트를 썼구나….”
모습을 변형시키거나 변신하는 건 마족이나 하는 일이라는 인식이 있던 탓에, 그쪽으로는 쉽게 생각이 미치지 않았었다.
제국에서는 변신 종류의 마법을 사사로이 사용하는 걸 금하고 있기도 하고.
그런데 키리이가, 고작 내 눈을 속이려고 모습을 바꾸는 마법을 사용하다니?
“기가 막히는군!”
아무리 내 딸이라지만!
“능력이 좋아!”
푸하하!
마이언은 유쾌해져서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방구석에서 건어물처럼 삭아가던 내 딸이 맞나? 마이언은 가슴이 웅장해졌다.
키리아가 이 정도의 능력을 감추고 있었다니!
“녀석, 호언장담하며 북부로 온 이유가 있었군. 껄껄.”
싱글벙글 웃는 마이언.
그러나 그 얼굴은 이내 엄격하게 굳었다.
“하지만 여기에 붙어있게 할 수는 없지.”
마이언은 잡지를 두고 곧장 키리아의 방으로 향했다.
이만한 능력이 있는데 왜 그런 남자 옆에 있어야 한단 말인가?
흑심 가득하고 사람을 파렴치한으로 오해나 하고, 제안했던 사업을 낼름 취소하는 그런 옹졸하고 졸렬한 남자에겐 키리아가 아까웠다.
무엇보다 위험했다.
아직 여전한 공작의 마물의 팔을 똑똑히 본 마이언이었다.
“당장 제도로 데려가 제대로 날개를 펼치게 해 줘야겠어. 안전하게!”
그래서 키리아를 찾아왔건만.
“아가씨께서는 조금 전에 떠나셨어요.”
키리아의 하녀가 말했다.
“떠나다니? 어디로?”
“북부 중앙 신전으로 가셨어요. 공작님과 함께요.”
“란페르세 공작 각하와?”
마이언의 험상궂은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뭐하러 각하를 따라간 건가?”
“그, 그야 주치의니까요. 마나 진단부터 컨디션 관리까지 맡으시니까….”
“허!”
마이언은 기가 막혔다.
컨디션 관리?
지금 내 딸이 옹졸한 남자의 컨디션 관리나 해주고 있다고?
“절대 인정 못 해!”
마이언은 결심했다.
키리아를 공작으로부터 멀리 떼어놔야하겠다고!
º º º
북부 중앙 신전의 지하 수감실.
불과 얼마 전까지 롤스 추기경에게 반발하는 이들이 수감되어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철컹!
“날 꺼내줘! 대신녀님과 할 말이 있어. 할 말이 있다고!”
철컹철컹!
아무리 철창을 흔들어도 응답은커녕, 간수들조차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중앙 신전으로 이송된 후 롤스는 교단에서 영구 파문됐다. 그런 후 모진 형벌-고문-을 받았다.
비명만 지르다가 까무룩 정신을 잃길 수 차례.
그러다 간신히 깨어나니 이곳에 홀로 있었다. 자신이 아는 정보로 거래를 할 틈도 없었다.
롤스의 몸이 덜덜 떨렸다. 고문으로 인한 고통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롤스를 더 두려움에 떨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제길, 이, 이대로는…. 이대로는 진짜 죽을지도 몰라…. 그 전에 대신녀를 만나야 해…!”
“만나면 어떻게 할 건데요?”
어둠 속에서 들려온 부드러운 미성.
뚜벅.
발소리와 함께 누군가 철창 앞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얼굴이 드러날수록 롤스의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수척해졌군요. 안타깝게도.”
알렌스 황태자였다.
그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내 실험체를 몰래 빼돌려 부하로 삼을 때도 떨지 않더니. 의왼데요?”
“저, 저, 전하. 그건 만일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결코 전하의 것을 제가 갖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해해요. 계속 연구를 맡은 건 당신이니까 궁금하기도 하고 욕심도 났겠죠.”
“그… 그….”
“본인이 만들었으니 잠깐 쓰고 돌려놓는 것 정도야 괜찮겠지, 그런 마음이었죠?”
“…….”
“당신이 제멋대로 굴긴 했지만 다행히 제 계획에는 차질이 없어요. 공작도 곧 건강을 되찾을 테고요. 아, 물론….”
알렌스가 재밌다는 듯 키득거렸다.
“그건 내가 원하는 건강이지 공작이 원하는 건강은 아니겠지만요.”
“그, 그럼….”
롤스의 눈빛에 희망이 깃들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보낸 사람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두려웠늗데.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겁니까?”
“뭐, 여태까지 도움이 되기도 했으니 죽이지는 않기로… 콜록콜록!”
알렌스가 입가를 가리며 거칠게 기침을 했다.
평소에도 자주 기침을 하긴 했지만, 이번에는 몸이 흔들릴 정도였다.
입을 틀어막은 손수건에 언뜻 탁한 피가 비쳤다.
마기로 인해 몸이 약해진 황태자.
그래서 롤스는 황태자에게 넙죽 엎드리면서도 아주 조금은 얕잡아 보기도 했다. 황태자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거센 기침을 하는 황태자의 모습이 언뜻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
롤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황태자의 모습을 확인하려 했다.
“콜록, 콜록!”
기침이 심하게 커졌을 때.
황태자의 얼굴이 흐려지더니 다른 인물이 나타났다.
푸른 피부에 은발, 그리고 검은 뿔을 지닌 명백한 마족의 모습.
“헉…!?”
롤스는 너무 놀란 나머지 숨을 들이켰다.
겨우 기침을 갈무리한 알렌스는, 그 반응에 자신의 변신이 풀린 것을 알았다.
“아, 들켜버렸네.”
에휴. 피곤한 한숨을 쉰 알렌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소 미안하다는 듯 싱긋 웃었다.
“이럼 어쩔 수 없지. 당신도 이해하죠?”
“아, 아아…!”
으아악!
서늘한 감옥에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