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마이언의 얼굴에 씁쓸함이 번졌다.
“제국법상 귀족의 작위와 재산의 상속 우선권은 아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제는 특히 딸을 걱정했죠.”
그럴 만도 했다.
재산의 일부를 상속받는다 해도, 평범한 귀족 영애에게 그건 결혼 지참금에 포함되는 것이었으니까.
원작 여주인공 릴리처럼 조금씩 변화의 움직임도 일어나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전통적인 사고방식의 사람들이 많지.’
어머니처럼 말이다.
“그래서 엘리제가 남긴 유언도 딸의 결혼이었습니다. 허울만 남은 귀족의 비참함을 딸까지 겪게 하고 싶지 않다면서요.”
“…그래도 좀 과한 거 아닐까요?”
키리아가 슬그머니 반박했다.
“클로버필드 백작님의 하나뿐인 영애를 누가 허울만 좋다 평할 수 있단 말이에요? 백작님께선 따님을 돌보기 싫으신 건가요?”
“천만에요! 그 애는 내 딸입니다. 내가 죽어도!”
예상보다 과한 대답에 키리아는 순간 당황했다.
“어, 음.”
키리의 뺨이 붉어졌다. 흠흠,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 결혼쯤이야 늦게 해도….”
“그래도 된다면 제가 왜 서두르려 하겠습니까.”
“네?”
마이언이 골치 아프다는 듯 제 눈가를 짚었다.
“그 아이는 약학에 관심은 있는데 아쉽게도 재능이 없습니다. 항상 뭔가 끔찍한 걸 만들어내는 거 같은데… 사교성도 없어서 매일같이 방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사교계에 소문이 다 났습니다.”
“소, 소문이요?”
“클로버필드 영애는 음침한 괴짜에, 얼굴을 숨기는 못난이, 제 실력도 모르고 약제사 흉내 내는 돌팔이라고요. 그 애에게 초대장이 끊긴 지도 꽤 됐고요.”
“…….”
신경을 전혀 안 써서 몰랐다.
“이러니 아비가 되어서 그냥 둘 수 있겠습니까? 사교계 소문은 무시할 게 못 됩니다. 딸아이를 기피하는 분위기가 심해지면 그 애가 당할 취급은….”
키리아는 마이언이 생략한 뒷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이야 젊으니 본인이 사교계를 따돌린다지만, 좀 더 나이가 들면 사교계 전체가 날 따돌리게 되겠지.
마이언이 문득 눈앞의 키리아를 보더니 아쉬워하며 웃었다.
“그 애가 약제사님처럼 재능을 꽃피워서 모두의 콧대를 눌러주었으면 좋겠군요.”
“눌러봤자 결론은 결혼 아니에요?”
“천만에요.”
마이언이 얼굴을 무섭게 굳혔다.
“능력과 명성이 있다면 주변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땐 딸아이가 원하는 놈으로 골라서 데리고 살면 되는 겁니다.”
“오….”
의외로 화끈한 대답에 키리아는 감탄했다.
지금 확 정체를 밝혀버려? 아티팩트 마법 해제해버려?
백작님의 반응이 궁금했지만 키리아는 조금 더 참기로 했다.
‘메두사병 치료약하고 4억 통장까지 준비됐을 때 정체를 밝히면 더 멋있겠지.’
킥킥, 키리아는 웃으며 마이언의 말을 재밌다는 듯 받아주었다.
“원하는 놈이라도 커트라인이 있겠죠? 공작쯤 되어야 눈에 차시지 않을까요?”
“아니오.”
정색.
마이언은 키리아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개정색’을 했다.
“지위가 문제가 아닙니다. 속이 시꺼먼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다짜고짜 사람을 주책맞은 늙은이처럼 쳐다보거나, 손길 하나까지 흑심이 가득 묻어나거나, 본인이 가진 걸 이용해서 치졸하게 줬다 뺏는 일을 하는 남자를 말입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있다고요? 지위도 높은데?”
“분명 있습니다. 약제사님의 주위에도 있죠. 조심하십시오. 그 남자는 절대 함정이니까.”
의미심장하게 가늘어지는 마이언의 눈빛. 진심이었다.
“헉….”
누, 누구지? 그런 치사한 사람은 내 주변에 없는 거 같은데.
이후로도 잡담을 조금 더 나눈 후 마이언이 일어났다.
“시간을 많이 빼앗은 것 같아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약은 곧 보내드릴게요. 걱정 말고 기다리고 계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클로버필드의 신의를 걸고.”
마이언은 깊게 허리를 숙이고는 떠났다.
“휴.”
키리아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모습을 변형하고, 목소리에도 신경을 쓴 덕분에 백작님은 자신의 정체를 전혀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백작님이 아는 키리아는 재능도 명성도 마이너스를 찍는 사람이니까.
“그건 그렇고….”
키리아는 마이언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 애는 내 딸입니다. 내가 죽어도!」
긁적. 괜히 뺨을 긁었다.
“…슬슬 아버지라고 불러드려도 괜찮지 않을까?”
º º º
마이언은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를 걷고 있었다.
가장 큰 걱정거리가 이렇게 쉽게 해결되다니, 그야말로 신의 보살핌이었다.
‘아니, 약제사님의 보살핌이지.’
북부에서도 거의 알려지지 않은 병의 치료약을 준다면서 대가도 언급하지 않았다.
어리숙해서는 아닐 것이다. 그가 조사하고 관찰한 약제사의 행보를 보면 말이다.
그러니 이건 선의이자 호의라고 봐야 했다.
‘무엇으로 갚으면 좋을까.’
마이언은 그녀의 호의에 절대 부족함이 없도록 감사를 표할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뭘 준비할까?
궁리하면서 걷는 그의 시야 한쪽에 웬 종이 한 장이 들어왔다.
“음?”
집어들고 보니 글씨가 가지런히 쓰인 편지였다.
“누가 편지를 이런 곳에 떨어뜨렸나.”
하인에게 시켜 주인을 찾아주라고 해야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편지를 접으려던 마이언은 무심코 편지의 첫머리를 읽게 됐고….
“……!”
휘둥그레진 눈으로 편지를 정독하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돼!”
º º º
“키리아.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키리아는 제논의 집무실을 찾았다.
약이 완성되기 직전이라고 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했던 것이다. 얼른 기뻐하는 공작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치료에 있어서는 뭐든 확실해야 했다.
‘조금만 더 참자. 베른울프 백작님에게 약효가 나타날 때까지는.’
며칠만 기다리면 되겠지.
그래서 키리아는 고개를 저으며 제논의 마나 진단에만 집중했다.
“아니에요.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내 용건을 말하죠. 이틀 뒤 대신녀를 만나러 중앙 신전으로 갈 예정인데, 함께 가겠습니까?”
“그럼요. 주치의니까 공작님을 옆에서 지켜봐야죠.”
“알겠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는데.”
“네, 뭔데요?”
“그대의 양친 말입니다만.”
흠칫!
“애초에 그대가 목표했던 바도 달성되어가는 것 같으니… 가족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키리아는 처음에 자신의 행적을 가족들에게도 숨기고 있다고 둘러댔었다.
“알릴 필요가 있을까요…?”
“네. 인사를 드리고 싶군요. 함께 가죠.”
“?!”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공작님이 왜요…?!
제논의 비장하고 긴장한 표정을 보면 꼭 교제를 허락받으러 가는 남자 같았다.
‘하지만 고백도 안 했는데? 우린 사귀는 사이도 아니잖아?’
설마 아끼는 주치의의 부모님이라고 대접하는 건가?
과한 것 같은데 이 공작님이라면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것도 같았다.
어쨌든 제논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기에 키리아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나, 나중에요. 나중에. 지금은 아버지께서 마음의 준비가 안 되셨을 거예요.”
나도 안 됐고요.
그러자 제논이 한발 물러나는 듯하더니 고집스럽게 다시 말했다.
“…그럼 양친께서 뭘 좋아하시는지 알려주십시오. 선물이라도 보내겠습니다.”
그러니까 공작님이 왜요!?
“아뇨, 선물도 조금. 우선 제가 해결할 일이 있어서요….”
‘설마 공작님… 전에 키스 한 번 했다고 우리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앞서나가는 거야?’
그런 거 같은데? 맙소사.
하지만 전처럼 난감하진 않았다.
리안의 문제가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이제 키리아에겐 마음의 짐이 없었다.
‘메데이아라는 사실도, 마물병 치료약을 주면서 함께 밝힐 작정이고.’
비록 정체를 숨긴 일에 대해서 공작님이 어떻게 반응할지 걱정되긴 했지만… 적어도 그의 마음을 보류하거나 밀어낼 이유는 사라졌다.
‘나도 공작님을… 조, 좋아하는 것 같고? 아마도?’
그렇지만.
‘근데 공작님도 나 좋아하는 거 맞지?’
말을 확실히 안 하니 알 수가 있나.
‘내가 아니라 메데이아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라는 삽질은 그만뒀다.
어차피 내가 메데이아고 정체도 곧 밝힐 건데 뭐.
게다가 아무리 분위기에 휩쓸렸다 해도, 다른 사람도 아닌 공작님이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입맞춤을 하지는 않을 거고.
‘그래도….’
분위기에 휩쓸리는 게 아니라 분명히 듣고 싶어.
좋아한다고.
‘물론 내가 먼저 해도 되지만!’
이런저런 티를 낸 쪽이 먼저 고백하는 게 매너지! 그리고 솔직히 내가 말하기 전에 듣고 싶어!
이때였다.
열어 놓은 창문에서 아름다운 관현악 선율이 흘러들어왔다.
키리아는 반갑게 화제를 돌렸다.
“아. 오늘도 연주회가 있나 보죠?”
생일 연회가 끝났다지만, 공작성에는 클로버필드 백작을 비롯해 아직 남아 있는 귀족들이 많았다.
또한 기사를 보고, 소문을 듣고 새롭게 오는 손님들도 끊이지 않았다.
그래서 저녁이 되면 아름다운 피아노나 관현악의 선율을 성 곳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오늘의 명당은 제논의 집무실이었다.
잠시 귀를 기울이던 제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키리아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연회에서 못 했으니, 이번엔 내게 손을 주시겠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그랬네요….”
“네. 그대가 날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가는 바람에.”
“마, 말씀이 좀 이상하시네요? 제가 버리긴 누굴 버려요?”
어이없어하면서도 키리아는 기꺼이 제논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손을 맞잡고,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큰 손으로 감싼 제논이 가만히 눈웃음을 지었다.
“그럼 날 버리지 않을 겁니까?”
“당연하죠. 제 환자신데요.”
“…흠.”
박자에 맞춰 제논이 먼저 움직였다.
그에 따라 키리아의 드레스도 살랑이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노을이 길게 그림자를 기울이는 저녁.
오직 두 사람뿐인 이 방은 둘만의 작은 무도회장으로 변했다.
키리아는 노을이 발갛게 물들인 제논의 부드러운 얼굴을 홀린 듯이 바라봤다.
제논 역시 키리아의 보랏빛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눈을 깜박이는 찰나조차 아깝다는 듯.
키리아는 자신의 심장 박동을 느꼈다.
몸이 밀착한 탓에, 가슴이 뛰는 걸 제논에게 들킬까 봐 걱정이 됐다.
동시에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들었다.
너무 멍하니 있던 탓일까.
스텝을 밟던 키리아의 구두 굽이 삐끗 미끄러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