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로하넨은 주군의 목덜미가 서서히 붉게 올라오는 것을 보고 웃음을 삼켰다.
“…쓸데없는 소리를.”
제논이 얼버무리려 했을 때였다.
“엥?! 주군이 풀떼기한테 청혼?”
가울이 큭큭 웃었다.
“웬 개 풀 뜯어먹는 소리하고 있냐?”
“…왜 그게 풀 뜯어먹는 소리지?”
제논의 목소리가 조용해졌다.
히죽거리던 가울이 그제야 제논의 눈치를 살폈다.
“그야… 왕은 왕이고 풀떼기는 제 친구니까요…?”
가울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소중한 두 사람이 서로 혼인을 한다고? 그런 이야기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가울의 단순한 생각을 모르는 제논은 즉시 반박했다.
“청혼할 생각이다.”
이때 발동되는 왕의 맹세.
“루크에게.”
“…예!?”
루크와 가울이 깜짝 놀랐다. 둘 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논은 입술을 꽉 깨물며 이마를 짚었고, 루크는 허둥거리며 정말 미안해했다.
“다, 단장… 아니 공작 각하. 저는… 정말 부족한 사람이고….”
파르르 떨리는 루크의 말을 제논이 단호히 가로막았다.
“다물어. 더 말하지 마라. 지금 이건… …때문에 멋대로 나온 말이니까.”
“네? 뭐 때문이라고요?”
“…말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아무튼 방금 건 진심이 아니야.”
진심이 아니라니, 루크와 로하넨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제논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는 맹세를 철회하거나 없애는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 많은 문헌을 뒤졌다.
마탑주 셜론과 신목의 정령 꽃님이에게도 물어봤다.
최근에는 대신녀에게도 아는 게 없느냐고 떠봤다.
하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다.
‘이젠 알 만한 사람도 없는데….’
그때였다.
제논이 끙끙 앓는 모습을 보던 가울이 퍼뜩 “알겠다!”하고 외쳤다.
“혹시 왕의 맹세를 하셨습니까?”
“뭐…?”
“왕답지 않게 괴상한 말씀에다 말할 수 없는 사정이라니 딱 그건데요. 그렇죠?”
“…….”
제논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가울은 확신했다.
가울이 씩 웃었다.
“불편하시면 그냥 깨버리시죠?”
덜컹. 제논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 다가가 가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어떻게.”
“예, 예?”
“어떻게 철회하지? 빨리 말해.”
“어, 그건―.”
가울이 당황하여 대답했다.
“전 왕이 아니라 모르는데요….”
쿵. 제논이 가울의 멱살을 가차 없이 놔버렸다.
으윽. 엉덩방아를 찧은 가울이 면목 없다는 듯 설명했다.
“왕의 맹세는 왕이 부하들을 복종시키기 위한 거니까요…. 왕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넌 아무것도 모른다는 건가.”
“최고위 마족이라면 알 겁니다!”
“인간계에 남은 건 너뿐이잖아.”
“아, 아니면 마왕 본인!”
“내가 죽였다.”
끼잉.
가울의 꼬리가 축 늘어졌다.
그럼 그렇지. 기대한 내가 바보다.
제논이 가울에 대한 가치 평가를 하락시키고 있을 때였다.
“저… 이제 제 보고를 드려도 될까요? 마침 마왕과 관련 있기도 합니다.”
“마왕과?”
“네. 다름이 아니라 단장님께서 메두사꽃이라고 부르는 것의 진짜 이름에 대해서입니다.”
제논은 키리아를 따라 익숙하게 메두사꽃이라 부르고 있었지만, 사실 그건 키리아가 임시로 붙인 이름에 불과했다.
“제가 손에 넣었던 꽃의 표본…. 단장님이 메두사꽃이라고 하신 그걸, 연구실 사람들은 다르게 부르고 있었습니다.”
루크가 틀림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레그누베르… 라고요.”
“레그누베르? 그게 무슨 뜻이지?”
그러자 가울이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왕! 왕, 왕! 저 압니다! 레그누베르는 마계어로 ‘왕의 꽃’이라는 뜻입니다!”
“왕의 꽃이라.”
제논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왕의 꽃으로 불리는 마계의 꽃.
결국 마왕의 꽃이라는 뜻이다.
‘그게 메두사꽃의 정체였다니.’
“연회장에 나타난 가고일도 왕의 근위병이라고 했지?”
“맞아요, 왕.”
모처럼 아는 게 나와 신이 난 가울이었다.
“놈들은 다른 녀석들처럼 종족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마물입니다. 마왕의 손에서요.”
그러자 로하넨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마왕은 주군께서 분명 제거하셨는데요. 우리가 보았던 그 가고일 역시, 연구실의 존재를 생각해보면 개량된 꽃의 결과물로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 나한테 그래? 나도 잘 몰라. 그냥 아는 대로 얘기했을 뿐이야.”
가울이 투덜거렸다.
둘의 대화를 들으며 제논은 계속 손가락을 툭툭 두드렸다.
‘마왕의 꽃과 근위병이라….’
왜 하필 마왕인 건지.
‘분명 성검에 의해 소멸했을 텐데.’
제논 자신의 눈으로 봤기에 틀림없었다.
그가 직접 마왕의 몸에 성검을 찔러 넣어, 마왕을 재로 흩어지게 했으니까.
하지만 나타난 단서에서 계속 마왕이 언급되니 재차 조사할 필요성을 느꼈다.
“…롤스 추기경을 신문해봐야겠다.”
“네. 중앙 신전에 연락을 넣겠습니다.”
절도 있게 고개를 숙인 로하넨이 즉시 명령을 시행하기 위해 집무실을 나섰다.
나가기 전, 로하넨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몸을 돌렸다.
“참, 주군. 아까 가울이 말한 왕의 맹세 말입니다만.”
“…….”
“그것 때문에 당장 청혼하기 곤란하신 상태라면… 다른 중요한 일부터 해두는 건 어떻습니까?”
“다른 중요한 일이라고?”
로하넨이 싱긋 웃었다.
“당연히, 키리아 양의 부모님께 점수를 따 놓는 일이죠.”
“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왕.”
가울이 이제 깨달았다는 듯 말했다.
“왕한텐 부모가 없지만 풀떼기한테는 있을 거잖아요?”
“…….”
순간 조용해진 집무실.
로하넨은 묵묵히 가울의 귀를 잡고 질질 끌었다.
“아, 아! 왜 잡아당겨!”
“죄송합니다. 데리고 나가겠습니다.”
“로하넨.”
제논이 로하넨을 불렀다.
“예?”
“남부 유력 상단들에게 보낸 사업 제안서 말인데.”
제논이 무심하게 말했다.
“클로버필드 상단에 보낸 것은 철회하도록 해.”
키리아를 보는 마이언 클로버필드의 눈빛에서 애정을 읽은 제논이었다.
중년의 그가 딸뻘인 키리아에게 애정이라니?
그는 나잇값 못하는 클로버필드 백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실 줄 알고 일찍 조치해두었죠.”
제논의 심기를 벌써 읽고 있던 로하넨이 자랑스레 대답했다.
º º º
‘…왜 저래?’
키리아는 맞은편에 앉은 마이언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원하던 대로 키리아와 대화를 나누게 된 마이언은 연회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꺼낸 뒤, 본론을 털어놓았다.
예상대로 리안의 병에 관해서였다.
‘답은 이미 정해두긴 했지만.’
희귀병에 대해 즉답을 하면 이상할 테니 잠시 뜸을 들였다.
키리아와 마이언은 자연스럽게 찻잔을 들었다.
그러느라 침묵이 찾아왔다.
그 사이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마이언의 표정에 언뜻 불쾌함이 스쳤던 것이다.
언뜻 들린 중얼거림에서 ‘이쪽도 사절이야….’ 어쩌구 한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아. 죄송합니다. 잠시 딴생각을 했군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마이언이 고개를 저었다.
딱히 궁금하진 않았기에 키리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잠시 중단됐던 말을 이었다.
“몸이 돌로 변하는 병이라면 사실 북부에서도 발견된 적이 있어요.”
“정말입니까?”
“네. 베른울프 백작님의 한쪽 다리가 석화 상태거든요. 다행히 초기에서 억누르고 있어요.”
“아, 그 곰 같이 생긴….”
사돈 남 말하는 마이언이었다.
“제가 활발하게 연구 중인 병이기도 하고요. 조만간 성과가 있을 듯하니, 약이 개발되면 클로버필드 백작님께도 보내드릴게요.”
“……!”
감격한 마이언이 테이블에 이마가 닿을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설마 백작님이 이런 반응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키리아는 놀라운 한편 어딘가 마음이 불편했다.
누군가에게 절대 비굴하게 굴지 않을 것 같았던 백작님이 이렇게까지 고개를 숙이다니….
‘기분이 이상한데.’
백작님이 저러는 꼴을 보기가 싫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심도 됐다.
리안을 위하는 마음이 진심으로 느껴져서.
하긴, 아버지… 아니, 백작님은 리안의 애교에 유독 약하긴 했지 원래.
반면 나와는 늘 데면데면했고 말이다.
‘…….’
불편한 기분이었음에도 키리아는 어째선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이런 아버지를 두다니, 백작님의 자제분들은 좋겠네요. 듣기로는 혼인 적령기의 영애가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맞습니다. 그 애 이름도 키리아죠.”
“어머, 그래요?”
키리아는 놀란 척을 했다.
두근두근 떨리는 속을 숨기기 위해 태연한 척 찻잔 입구를 손가락으로 쓸며 물었다.
“영애의 혼인 때문에 여러모로 참 신경 쓰이시겠어요. 혼인 문제로 가족 간에 갈등을 겪는 경우도 흔하다고 하던데, 백작님께선 어떤가요?”
“별다른 건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이 다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휴. 마이언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곧 굳은 의지가 담긴 얼굴을 했다.
“허나 어쩔 수 없는 문제입니다. 쉽지 않겠지만 결혼은 해야 합니다. 그게 귀족이니까요. 그 애가 허구한 날 집구석에서 책만 파고 있게 두지 않을 겁니다.”
“따님은 결혼 의사가 없는 것 아닌가요?”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찻잔을 매만지던 키리아의 손가락이 멈췄다.
“…딸이 싫어해도 굳이 결혼을 시키신다고요.”
“제가 매정한 아비로 보이시겠군요.”
“아, 뭐….”
키리아는 대답을 우물거렸지만 사실 그렇다는 긍정에 가까웠다.
백작은 예상했다는 듯 여상한 표정이었다.
이쯤에서 입을 다물어 버리는가 싶었는데, 그는 의외로 계속해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아들에게 도움을 줄 사람이라 그런 것 같았다.
“…저에겐 의무가 있습니다.”
“네, 알죠.”
키리아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자식을 결혼시켜야 하는 귀족이자 아버지의 의무 말이죠.”
“그보다 더 중요한 의무입니다.”
마이언이 고개를 저었다.
“먼저 떠난 제 아내, 엘리제와의 약속입니다.”
“……!”
엘리제?
동그래진 눈으로 키리아는 마이언을 쳐다봤다.
‘왜 엄마 이름이 나오지?’
당황한 키리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 사이 마이언이 찻잔을 내려다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제 아내, 엘리제는 몰락 귀족이었습니다. 저와 만나기 전부터 이미 홀몸으로 아이 둘을 키우고 있었죠.”
“…….”
키리아도 알았다.
그 아이 둘이 바로 자신과 리안이었으니까.
‘평민이나 다름없는 게 몰락 귀족이라고는 하지만… 우리 집은 그래도 품위 유지 정도는 했던 거 같은데.’
그러니 어머니가 클로버필드 백작과 재혼할 수 있던 거고 말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마이언의 말은 키리아가 알던 것과 달랐다.
“엘리제는 저를 만나기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당연하죠. 매일같이 남편의 빚을 갚으라며 빚쟁이들이 찾아왔으니까요.”
“…네?”
키리아, 그러니까 빙의 전의 키리아는 모르던 사실이었다.
키리아와 리안은 기숙사가 있는 아카데미에 있었으니까. 물론 비교적 저렴한 곳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런 처지인데… 어떻게 백작님을 만나실 수 있던 거죠?”
“제게 돈을 빌리러 왔으니까요.”
“……!”
“어떻게든 아이들만은 남부럽지 않은 귀족으로 키우려고 애쓰는 사람이었습니다.”
처음 알게 된 부모님의 만남이었다.
키리아는 기억 속 어머니가 자주 당부하던 말이 떠올랐다.
백작가에 들어오기 전에도, 들어온 후 병상에서도 수시로 손을 잡고 하던 말.
「부족함 없는 귀족으로 살아야 한다. 그게 최우선이야.」
“내 아이들이 부족함 없는 귀족으로 살게 해주세요.”
키리아의 회상과 마이언의 말이 겹쳐졌다.
“리안에겐 가문의 백작위를, 키리아에겐 부유한 귀족과의 혼인을.”
마이언이 담담히 말했다.
“그게 엘리제의 유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