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키리아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작은 약병을 눈앞에 들었다.
“드, 드디어…!”
의자와 물아일체 직전이었던 엉덩이를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드디어 메두사 병 치료약을 완성했어!”
뚜두둑!
굳어 있던 온몸의 관절에서 소리가 났다.
“어억.”
너무 오랜만에 움직였다며 비명을 지른 허리와 무릎 때문에 잠시 부르르 떠는 키리아.
하지만 고통스런 떨림은 곧 기쁨의 떨림으로 바뀌었다.
당연했다. 북부에 와서 이리저리 고생한 목표를 방금 이뤄냈으니까!
“그건 그렇고… 완벽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일단은 환자의 반응을 살펴봐야 하는데.”
혹시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안 그래도 위험한 상태인 어린 리안에게 위험을 감수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지.”
그래서 키리아는 베른울프 백작에게 약을 보내고 경과를 살펴보기로 했다.
안 그래도 그는 연회 이후로 아직 공작성에 머무르고 있으니 관찰하기에도 좋았다.
베른울프 백작에게 별 이상이 없으면 이 약을 토대로 공작님의 마물병 치료약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가벼워진 키리아는 밀린 일들을 처리했다.
먼저 피폐해진 자기 몸을 돌본 후, 유난히 두꺼워진 마물 조공 장부를 대충 검토했다.
키리아가 검토를 마치길 기다리던 조앤이 생글생글 웃었다.
“아가씨께서 연구를 마치셔서 다행이에요. 오늘 약속도 잊어버리신 줄 알고 조금 걱정했거든요.”
“약속?”
키리아는 처음 듣는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조앤이 역시, 하며 웃었다.
“한창 연구 중이실 때 승낙하셨던 거예요. 남부에 그 있잖아요. 클로버필드 상단의… 곰처럼 생긴 백작님이요.”
“아.”
기억났다.
백작님이 티타임을 청하는 편지를 보내왔던 것을.
“오늘이었구나. …에휴.”
안 그래도 리안의 약을 완성했으니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았다.
키리아는 연회에서 썼던 머리 염색약을 다시 사용하고, 이번엔 가면 대신 마탑주에게서 빌린 유사 변장 아티팩트를 꺼냈다.
이때 누군가 문을 노크했다.
키리아는 놀라서 얼른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평범한 외모에 금발이 된 키리아 조앤에게 물었다.
“벌써 백작님이 오신 거야?”
“어머. 약속 시간이 아직 안 됐는데… 제가 확인해 볼게요.”
잠시 후, 문앞에서 손님을 맞이한 조앤이 다시 문을 닫고 키리아에게 돌아왔다.
“아가씨. 클로버필드 백작이 아니라 로버트라는 분이 찾아오셨어요.”
그러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편집장이라는데요? 저는 처음 듣는 잡지인데.”
“……!”
편집장이 왜 여기까지?
“아… 그러고 보니 감옥에 그 인간도 있었구나.”
이제야 로버트의 존재를 기억해낸 키리아였다.
º º º
공작성의 독초 약제사 키리아가 세인트 워런트를 받았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제국 전역의 신문에서 이 사실을 다뤘고, 자연히 키리아가 만든 약품과 아티팩트까지 알려지게 됐다.
이 소식은 중앙 신전에서 몸을 회복 중이던 로버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 이럴 수가.”
신문을 읽는 로버트의 눈이 떨렸다.
“가짜 메데이아가 이렇게 선수를 쳐버리다니….”
특허권을 거론하며 강하게 나갈 작정이었는데 글렀다.
상대는 세인트 워런트다.
잘못 행동하다간 본전도 못 찾았다.
그렇다고 불법 노예로 잡히는 수모까지 겪었는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
게다가 꼭 확인해 보고 싶은 의혹이 있었다.
‘감옥에서 보여줬던 그 여자의 행동들… 뭔가 익숙하단 말이지.’
그때는 워낙 멍한 상태라 몰랐는데, 지금 떠올려보니 그랬다.
독 이끼를 치료제로 활용한 것도, 그걸 이용해 대신녀가 쉴 틈을 주지 않고 일하게 만든 점도.
은근히 일하라고 몰아가는 그 점이….
‘…빨리 독초 구해달라고 날 갈구던 메데이아 님과 비슷한 느낌이란 말이지.’
로버트가 메데이아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대우하지 않았듯 메데이아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게다가 공작성 약제사의 업적에 대해 들으면 들을수록 메데이아의 생각을 떨치기가 힘들었다.
독초 약제사로 유명한 인간이 메데이아 말고 또 있다고?
로버트는 즉시 공작성 독초 약제사에 대해 좀 더 조사했고,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독초 약제사의 등장 시기와 메데이아의 휴재 시기가 일치한다는 것.
‘감이 온다.’
메데이아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온 편집자의 감이었다.
물론 틀리면 개망신이 따로 없겠지만….
“떠보기라도 해 보자. 이렇게 된 이상 도박이다. 그냥 돌아가도 개털 되는 건 마찬가지야!”
다행히 중앙 신전에서는 노예로 잡혀 있던 이들을 위해 텔레포트 진을 무료로 허가하고 있었다.
고향으로 고생 없이 돌아가라는 배려였다.
로버트는 고향 대신 라데츠로 이동했고, 마침내 공작성에서 키리아를 만날 수 있었다.
º º º
‘왜 안 오나 했다.’
로버트가 만남을 청한다는 조앤의 말에, 키리아는 흔쾌히 그를 들이라 했다.
키리아가 아는 로버트는 얍삽한 사람이었다.
눈앞의 이득에 태세 전환이 상당히 유연한 사람.
한 마디로.
‘속이 뻔히 보인다는 거지.’
그래서 키리아는 로버트를 앞에 두고 여유로울 수 있었다.
특허권에 대한 얘기를 들은 지금도 말이다.
“그래서요?”
“그, 그래서라니요. 잘 모르시나 본데… 제국은 특허법에 엄격합니다. 약제사님께서 도용한 그 제조법이 바로 특허법의 보호를 받는단 말이에요!”
“상관없는데요?”
“…에?”
키리아가 싱긋 웃었다.
“아직 모르시나 보네. 제가 바로 메데이아 님의 제자거든요. 비밀 제자.”
“…예에?”
로버트는 당황했다.
“금시초문인데… 메데이아 님에게 제자가 있을 리 없어요.”
“왜요? 워낙 안티가 많으니까?”
“그야, 이렇게 대외적으로 활동이 가능한 제자가 있다면 왜 저한테 연구용 독초를 구해달라 부탁하셨겠어요?”
“…….”
…생각보다 허를 찌르는 질문이었다.
‘역시, 저래 보여도 호흡을 맞춰온 경력은 있다는 거네.’
키리아는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왜요? 저도 스승님을 도와드렸는데. 정 궁금하시면 제가 아니라 스승님께 직접 여쭤보세요.”
“하지만….”
“사실 선약이 있는데 로버트 씨가 갑자기 방문하신 거라서요.”
마침 문밖에서 조앤이 알려왔다.
“아가씨, 마이언 클로버필드 백작님께서 오셨어요.”
“들어오시라 해.”
키리아는 슬쩍 반지 아티팩트를 작동시켰다.
일전에 셜론에게서 받았던, 다른 모습으로 보이게 해주는 것이었다.
문이 열리며 곰 같은 덩치의 마이언이 들어왔다.
“먼저 오신 분이 있으셨군요.”
“아, 지금 나가실 분이에요.”
“그렇습니까?”
마이언의 시선이 한참 아래에 있는 로버트를 내려다봤다.
키리아를 물고 늘어지려던 로버트는 마이언의 덩치와 눈빛에 쭈그러들었다.
더 붙어 있기엔 그의 담력이 작았다.
“그, 그럼 저는 이만….”
키리아는 이미 로버트에게서 등을 돌린 상태였다.
“백작님, 이쪽으로.”
“네.”
쓸쓸히 혼자 방을 나가려던 로버트.
이때 그의 눈에 키리아의 너저분한 책상이 들어왔다.
“…….”
마침 키리아는 마이언과 티룸으로 간 상황.
꿀꺽.
로버트는 재빨리 키리아의 책상을 뒤졌다. 서랍들을 열어젖히며 안에 있는 것들을 뒤적거렸다.
그러다 수첩을 발견했다. 손때를 보니 오래 사용한 것이었다.
“…….”
로버트는 재빨리 그 수첩을 품에 넣고 방을 빠져나왔다.
아무도 없는 곳까지 온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수첩을 꺼냈다.
“딱 확인만 하고 돌려줄 거니까….”
혼자 변명을 하며 수첩을 파라락 넘겼다.
그럴수록 로버트의 눈이 점점 동그래졌다.
“여, 여기 있는 연구 과정들 전부… 메데이아 님이 칼럼에 실었던 것들이잖아?”
연구 결과만이 아니라, 결과를 도출하기까지의 과정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메데이아의 칼럼을 편집 검수해왔던 그이기에 알 수 있었다.
이건 일개 제자가 아닌, 오직 메데이아 본인만이 가능한 기록들이다.
그렇다는 건….
“저 약제사가 바로 메데이아…!”
역시! 좋아하던 로버트는 헙, 하고 제 입을 막았다.
누구 좋으라고 이 사실을 발설한단 말인가?
‘나만 알아야지!’
메데이아 님, 아니, 키리아 님에게 잘 보이려면 비밀을 지켜줘야 했다.
‘내가 정체를 알아냈으니… 어쩔 수 없이 나도 사업에 동참시켜 주시겠지!’
그게 가까운 미래에 본인의 발목을 잡을 거라는 생각은 못 하고 있었다.
로버트는 조앤이 발견하기 쉬운 곳에 수첩을 떨어뜨려 놓았다.
조앤이 수첩을 발견해 회수하는 것까지 확인한 후, 자신의 철저함에 뿌듯해하며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가져왔던 수첩에는 키리아가 서랍에 쑤셔 박아놓은 편지 낱장이 함께 끼워져 있던 것을.
수첩에서 편지 낱장이 떨어지면서 복도 한편에 뒹굴게 된 것을.
또한 그 편지의 첫머리는,
[아버지께. 백작님께.]
라고 시작된다는 것도.
로버트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º º º
“요즘은 메데이아 님께 서신을 보내시는 게 뜸하시네요?”
로하넨이 빙글빙글 웃으면서 물었다.
제논의 집무실에는 지금 남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제논과 로하넨, 그리고 가울과 루크였다.
루크의 보고를 모두의 앞에서 듣기 위해 제논이 불러 모은 것이었다.
그런데 루크가 도착하기 전, 로하넨이 이런저런 잡담을 하다가 저런 질문을 꺼냈다.
“메데이아…?”
루크에겐 생소한 이름이었지만 아무도 루크에게 설명해주지 않았다.
제논은 로하넨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너무 자주 보내면 성가실 테니까. 그동안은 이 점을 헤아리지 못했어.”
그의 대답에 로하넨은 내심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전에는 메데이아와의 편지에 매달리는 듯한 주군이었다.
편지의 텀을 조정한 것도 제논이 아니라 메데이아 쪽이었으니까.
‘그러던 게 이제야 균형을 찾은 거지.’
현재 상황이 바뀐 영향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심적으로 안정됐기 때문일 것이다.
‘키리아 양 덕분에.’
로하넨은 주군이 키리아와 함께 있을 때 웃음도 많아지고 눈빛도 달콤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제논 본인이 숨기지 않는데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단 말이야.’
주군의 직설적인 성격을 생각해 보면 아직까지도 잠잠한 게 이상했다.
그러니까, 고백 말이다.
“주군.”
“또 뭐야?”
“키리아 양께 청혼하실 거죠?”
우뚝.
제논의 동작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