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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113/141)

113화

일각수는 보통 대신녀의 앞에서만 무릎을 꿇는다.

신수인 일각수가 복종할 상대는 오직 그녀뿐이므로.

하지만 가끔 대신녀 만큼이나 자신이 인정한 대상에게도 무릎을 꿇었다.

대신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신에게 기도를 드릴 때만 무릎을 꿇었다.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아는 상식이었다.

그러나 교단의 오래된 성문법에는 대신녀가 무릎을 꿇을 수 있는 경우가 또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상대에게 갚을 수 없을 만큼 큰 은혜를 입었을 때.

감히 대신녀에게 커다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기에 대부분이 모르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위 신관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신녀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 성문법을 잘 모르는 젊은 성기사들 역시 뻣뻣이 서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눈치껏 절도있게 무릎을 꿇었다.

결국 성직자 모두가 키리아 한 사람을 향해 무릎을 꿇은 진풍경이 펼쳐졌다.

절로 경건한 분위기가 되면서 경악과 호기심, 그리고 자랑스러움을 가득 담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으아….”

키리아는 고개를 숙인 대신녀의 앞에 얼른 자신도 무릎을 굽혀 앉았다.

일각수는 몰라도 할머니한테 이런 걸 받으면 부담스럽다. 한창 관절이 아플 나이잖아?

“대신녀님. 왜 이러세요?”

“키리아 양. 당신이 아니었다면 전 감옥 속에서 폭발에 휘말려 죽었을 거예요.”

“그건 그렇지만….”

“구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마기 짙은 꽃밭에서 키리아 양이 보여준 숭고한 희생 정신은 저를 두 번째로 구해주었죠.”

“희생이요…?”

키리아는 대신녀가 무슨 오해를 하는지 이제야 짐작했다.

하지만 함부로 ‘착각하셨는데요.’라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

“…….”

키리아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어쩔 줄 모르는 표정에 대신녀는 참 겸손한 사람을 다 보겠다는 표정으로 흐뭇하게 웃었다.

“또한, 이곳에 키리아 양이 없었더라면 저 혼자서 많은 분들을 지켜내지 못했을 거예요. 저의 부족함으로 인해 일어날 뻔했던 참사를 당신이 막은 셈이죠.”

“전 그냥 연회의 손님들을 보호한 것뿐인데요….”

“그뿐만 아니라 오염되어 죽어가던 일각수까지 구한 분이기도 하고요.”

대신녀님이 내 말을 안 듣고 계신다.

그녀의 무시에서 어떻게든 감사를 전하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그러니 키리아 양은 저의 목숨과 명예를 구하고… 또한 교단까지 사악한 자로부터 구해준 은인입니다.”

대신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저와 교단은 이 시간부로 우리의 은인이신 키리아 양에게 영원한 우정과 신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맹세합니다. 그 첫 번째 지지를,”

대신녀가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을 훑어보며 선언했다.

“키리아 양이 독초 약제사로서 만드는 모든 제품에 세인트 워런트를 부여하는 것으로 표명하지요.”

“세, 세인트 워런트를!”

모든 귀족들이 술렁였다.

마물의 침도 성수라고 팔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인트 워런트는 제품의 안전과 고결함을 보장하는 마크였다.

대신녀와 교단이 보증한다는 뜻이니 그만큼 강력했다.

‘이 말인즉슨…!’

키리아의 눈이 환희로 반짝였다.

‘내가 만드는 것들을 불길하다거나 찝찝하다고 하면 신성모독이 되는 거?’

그런 셈이었다.

메데이아를 괴롭히던 안티들에게 엿을 먹일 생각에 매우 기뻐하던 키리아는 문득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바로 지금이 기회야.’

드디어 공작님에 대한 교단의 입장을 철회시킬 기회!

기쁜 나머지 양 주먹을 꼭 쥔 키리아는 제논을 휙 쳐다봤다.

제논 역시 키리아를 보며 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가 다가와 키리아의 어깨에 손을 다정히 얹었다.

“잘 됐군요, 키리아. 마땅히 받아야 하는 겁니다.”

“네, 공작님. 그리고 공작님도 한 말씀 하셔야죠.”

“뭘 말입니까?”

제논은 키리아 본인보다 더 기뻐하느라 정작 본인의 문제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에휴. 키리아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이때, 키리아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한 사람이 나섰다.

“…저.”

바로 루크였다.

루크는 대신녀에게 고개를 숙이며 청했다.

“대신녀님. 란페르세 공작 각하의 복권을 허락해 주십시오.”

한 번도 더듬지 않고 매끄럽게 이어지는 미성.

고개를 든 루크의 얼굴에는 예전과 같은 화상 흉터가 없었다.

폭파된 시설을 탈출한 후, 루크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키리아의 약을 사용했던 것이다.

덕분에 그의 뜻은 더욱 똑똑하게 전해졌다.

“그래요.”

대신녀 역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래야죠. 저는 성기사단장 제논 경을 타락으로 규정한 적도, 교단에서 퇴출한 적도 없으니까요.”

대신녀는 빠른 시일 내에 공식적으로 발표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키리아는 뿌듯하게 제논을 올려다봤다.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방방 뛰는 대신 제논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제논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 틈새를 꽉 채우며 단단하게 맞잡았다.

º º º

찹.

임프의 작은 손바닥이 신문 기사를 벽에 붙였다.

모서리가 일어나지 않게 꼼꼼히 누른 후 임프가 자신을 목말 태우고 있는 동료의 머리통을 두드렸다.

그러자 동료 임프는 가장 아래에 있는 임프의 머리통을 두드렸다.

“이동!”

3단 목말을 한 임프들이 휘청휘청 위태롭게 이동했다.

그런 식으로 공작성 곳곳에 신문 기사가 덕지덕지 나붙고 있었다.

[대신녀가 독초 약제사에게 무릎을 꿇다?!]

[“이것이 당신과 저의 눈높이” 마물 공작의 주치의가 중앙 신전을 접수하다]

…라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이었다.

마물들은 복도를 지나갈 때마다 해당 기사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우리 1위님이다!”

“나도 있다! 구석에, 요기!”

“더 가깝다 내가! 1위님과!”

흐뭇해하며 ‘우리 1위님’ 하고 노래를 불렀다.

“이걸 보셈. 신성력 대장이 우리 1위 님에게 무릎을 꿇었음!”

“신성력 대장의 부하들도 전부!”

마물들이 1면 기사의 섬세하고 큼직한 삽화를 홀린 듯이 바라보며 조잘거렸다.

공작성 마물들 사이에서 키리아의 인기는 제논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왜냐면 1위님은 인간 중에서도 특히 거북한, 신성력 쓰는 인간들에게 승리했으니까!

마물들은 짜릿한 대리만족을 느꼈다.

1위님에게 조공을 바치는 마물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자랑을 떠벌리는 걸 도저히 참지 못했다.

“우리 성엔 인간들이 무서워하는 마족 가울 님도 있고!”

“인간들이 주군 주군 하면서 굽실거리는 새로운 왕도 있고!”

“무엇보다 신성력 대장까지 때려눕힌 서열 1위님도 있음!”

이런 자랑을 성 밖 마물들에게 해댔다.

“너희는 이런 님들 없지?”

“…….”

공작성 일대뿐만 아니라 더 먼 거리에 있는 마물들에게도 이러한 소문과 자랑이 흘러들어갔다.

그러지 않아도 포이즌 리저드 일족이 인간을 왕으로 모신다는 소문은 마물들 사이에 알음알음 퍼져 있었다.

그때도 조금 고민스럽긴 했는데.

‘신성력 대장까지 살려달라고 싹싹 빌었다고?’

가슴이 두근두근 설렜다.

이런 분을 1위로 모신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분을 모시면 인간들도 날 함부로 하지 못할 거다.’

이쯤 되니 고민할 시간이 아까웠다.

다른 놈들보다 빨리 서열 아래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는 게 이득이었다.

그리하여.

공작성 앞마당은 공작령 전역에서 찾아온 마물들로 가득 찼다.

º º º

공작성에 마물이 몰려들자 제논은 질색했다.

하지만 마물들이 찾아온 이유를 알게 되자, 제논은 그들 중 쓸만한 녀석들을 선별하기로 했다.

그 귀찮은 작업은 루크와 가울이 맡았다.

왕의 세력이 커졌다며 자랑스러워하는 가울과, 고아원 가족들과 함께 라데츠 주민이 된 루크는 이 일을 기꺼워했다.

“다음, 661번, 662번, 663번 마물 들어와.”

가울이 말하자 번호표를 가진 마물들이 루크와 가울의 앞에 착석했다.

루크가 진지하게 말했다.

“자기소개 해 봐.”

마물들에겐 차갑고 딱딱한 말투의 루크였다.

“저, 저는 케륵, 산악 고블린 일족에서 팔 남매 중 첫째로 태어나… 케륵, 약자는 빨리 뒤진다는 어머님의 가르침 아래….”

대기 번호가 600쯤 되면 마물들 사이에서도 면접 족보가 돌기 마련이었다.

야생의 마물들에겐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어쩌겠는가?

가장 강력한 세력에는 아무나 끼는 게 아닌데.

오히려 합격이 특권처럼 느껴져서 마물들은 더욱 열의를 불태웠다.

어설픈 자기소개가 끝나자 이번엔 가울이 입을 열었다.

면접을 준비하는 마물들이 가장 싫어하는 면접관이다.

가울이 씩 웃었다.

“지원동기랑 네놈의 장점과 단점을 말해봐.”

이건 절대로 질문 그대로 대답해선 안 된다.

강한 세력의 일원이 되어서 약한 인간과 마물들을 얕잡아보기 위해서… 라고 솔직히 대답했다간 뒤지게 맞고 쫓겨난다.

그래서 마물들은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공작성 일원의 마음가짐과 인간과의 원만한 상호교류 방법, 그리고 자신들이 지켜야 할 왕과 서열 1위님의 명예, 그리고 상납해야 하는 조공에 대해서 말이다.

다행히 공부를 도와주는 선배님이 있었다.

“왕의 명예 수호. 왕의 명예는 바로 왕의 부하들. 이 부분을 외워라. 네놈들의 본능이 될 때까지 외워.”

“먀먀.”

라데츠 경비부대장과 경비대장인 포이즌 리저드와 알비였다.

“마물들의 수준이 점점 높아지네요.”

루크가 면접자들의 점수를 매기며 말했다.

성기사인 그는 여전히 마물들이 싫었지만, 마물들이 점점 학습해가는 모습은 솔직히 놀라웠다.

가울은 못마땅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 멀었다. 왕과 풀떼기에게 도움이 되려면 더 노력해야 해.”

“그렇죠. 그런데….”

루크가 문득 궁금해하며 물었다.

“키리아 님이 요즘 방에서 잘 안 나오시는 것 같은데 괜찮으신 겁니까?”

“또 연구에 빠져 있는 모양이던데. 그 뭐냐, 네가 가져온 꽃으로 뭘 만든다고.”

키리아가 걱정이 되어 슬쩍 방문했었던 가울이었다.

그는 머리는 산발이 된 채 눈은 수면 부족으로 벌개진 키리아가, 희열에 차서 ‘히히히… 드디어….’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을 회상했다.

부르르. 몸이 절로 떨렸다.

“…본인이 즐거워하는 모양이니까 일단 냅둬. 절대 들어가지 마.”

“……?”

키리아가 연구를 마치고 방에서 나온 건 바로 다음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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