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2화 (112/141)

112화

“퉤.”

중앙 신전의 긴급 전서구가 쪽지를 뱉었다.

쪽지를 본 롤스 추기경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중앙 신전이 관리하던 야산에 갑작스러운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이었으니까.

‘슬슬 퇴장할 때군.’

그는 제 주변에 모여 있는 귀족들을 부드럽게 물리치며 말했다.

“신전에 급한 일이 생겨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 기회에 뵙지요.”

“아니, 예하. 더 있다 가시지 않고요.”

그에게 줄을 서고자 했던 다른 귀족들이 아쉬워하며 붙잡았다.

롤스 추기경은 기분이 좋아 허허 웃었다.

그때였다.

연회장 밖을 지키고 있던 갑옷을 입은 마물들이 우르르 안으로 들어오더니 추기경을 둘러쌌다.

켈베로스가 추기경을 노려봤다.

“왕의 허락도 없어 어딜 가겠다고?”

그러자 마물들이 제각기 무기나 무기처럼 여기는 신체를 추기경에게 들이밀었다.

당황한 귀족들은 잔뜩 인상을 구겼다.

“이, 이게 무슨 일이지?”

“감히 마물이 추기경을 겁박하다니!”

“당장 무기를 치우지 못해?!”

남부 귀족들이 불쾌하게 웅성거렸다.

“아무리 잘 입혀 놓아도 역시 마물은 마물이야.”

“공작의 안목이 정말 의심스럽군.”

키리아를 애타게 찾던 마이언 역시, 이런 마물들의 돌발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작 각하는 어디 계시는 건가! 왜 이 마물들을 통제하시지 않는 거지?”

“이들은 내 통제를 따르고 있어.”

“……?!”

열려 있는 연회장 문으로 제논이 키리아와 함께 뚜벅뚜벅 나타났다.

그를 불만스레 바라보던 사람들은 제논의 뒤를 따라오는 이들을 발견하고는 입을 벌렸다.

롤스 추기경도 눈을 부릅떴다.

“대신녀…?!”

베일을 쓴 대신녀가 성기사단과 고위 신관들, 그리고 일각수까지 대동하고 나타난 것이다.

대신녀가 걸음을 멈춘 제논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베일을 걷어 얼굴을 드러냈다. 여전히 파리하지만, 위엄과 노기에 찬 얼굴이었다.

“롤스 추기경. 지난 2년 동안 가짜 대신녀를 내세워 교단을 휘두른 죄, 스스로 알고 있겠죠?”

“……?!”

경악한 귀족들.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말이었으나, 이를 증명하듯 한 성기사가 베일을 쓴 여자를 바닥으로 밀쳤다.

그녀도 대신녀였다.

정확히는 대신녀 행세를 하던 가짜 대신녀.

성기사가 그녀의 베일을 잡아 뜯자 겁에 질린 노부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이어 대신녀가 신성력으로 그녀에게 걸린 마법을 해제하니 주름진 얼굴이 아가씨로 변했다.

이목구비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맙소사!”

이를 목격한 사람들은 저마다 말문이 막혔다.

자연히 모두의 시선이 굳어 있는 롤스 추기경에게 옮겨갔다.

롤스 추기경은 진땀을 흘렸다. 하지만, 궁지에 몰린 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맙소사. 제가 모시던 대신녀님이 가짜였다니….”

그는 대신녀의 앞에 두 무릎을 털썩 꿇었다.

“이는 분명 간특한 마족의 변신술입니다. 그렇다고 하나, 곁에서 대신녀님을 모시는 저의 불찰도 간과할 수는 없는 일. 부디 벌을 내려 주십시오!”

자신도 피해자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꼬리 자르기를 시도하고 있었다.

마족의 변신술이 워낙 감쪽같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워낙 베일을 쓰고 다니는 대신녀인데다, 마족의 술수라면… 그럴 수 있지 않나?

그런 의견이 사람들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나왔다. 추기경의 의도대로였다.

하지만 그는 위기를 모면하는 데 집중하느라 간과하고 있는 점이 있었다.

바로 키리아를 납치했던 제 수하가 자신의 바로 뒤에 있으며,

키리아가 이 꼴을 팔짱 끼고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디서 밑장 빼기야?”

코웃음을 친 키리아가 귀 위쪽의 머리칼을 걷어 올렸다.

“그쪽 성기사가 날 이렇게 때렸는데?”

그러자 타박상으로 찢어진 두피가 보였다. 굳어 있는 피까지 선명했다.

상처를 본 제논의 입매가 더욱 차갑게 굳었다.

“맞습니다! 밟았다, 나도! 저 인간이!”

키리아의 말에 그렘린과 다른 마물들도 동조하며 펄펄 뛰었다.

추기경은 안타까운 표정을 가장했다.

“제 성기사가요? 말도 안 됩니다. 성기사는 마물과 싸우는 게 당연한 이들이잖습니까?”

“아, 그래요?”

그렇게 나올 줄 알았다.

“가울.”

키리아의 호명에 가울이 성기사들을 가리켰다.

“틀림없어. 네가 갇혀 있던 건물에서 맡았던 역한 냄새가 저놈들에게서도 나.”

“비틀린 신성력?”

“그래. 마기와 신성력이 섞여서 같이 비틀렸어. 그래서 역하게 느껴졌던 거야.”

키리아는 대신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렇다네요, 대신녀님. 저 성기사들에게도 마법 해제를 한번 걸어보죠? 대신녀님의 강력한 신성력으로요.”

“……!”

태연하던 추기경이 눈을 부릅떴다.

“대, 대체 무슨 소리를? 죄를 추궁하려면 저에게 하시지요! 왜 무고한 성기사들까지 끌어내려고 하십니까?”

다급히 외친 추기경이 한쪽에 서 있던 알렌스 황태자에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안 그렇습니까, 전하? 공명정대한 전하께서 이 상황을 중재해 주십시오!”

“…….”

황태자는 무표정했다. 그가 대신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교단의 일이니 제가 함부로 나서선 안 되겠죠.”

“이해해주셔서 감사하군요.”

가볍게 답한 대신녀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양손을 펼쳤다.

“진실을 드러내라!”

간결하고도 고고한 외침과 함께 성스러운 신성력이 빛의 기둥처럼 성기사들에게 쏟아졌다.

“으… 으아아악!”

여태까지 묵묵하던 성기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키리아는 움찔했다.

“뭐, 뭐야?”

기껏해야 개량 메두사꽃의 부산물로 힘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심상치 않았다.

“으아아아… 크르으윽!”

성기사들의 비명은 점점 낮고 굵어지더니 이내 사람이 아닌 짐승의 것으로 변했다.

동시에 건장한 몸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상체가 근육으로 더욱 비대해지고, 등에는 박쥐 같은 날개가 솟아났다.

피부가 돌로 변하더니 이내 온몸이 석상으로 변했다. 그런데도 살아 움직였다.

누구도 본 적 없는 마물이었다.

단 한 명, 가울을 제외하고 말이다.

“…허.”

가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저건 왕의 근위병… 가고일이잖아?”

“캬아아아아!”

가고일 네 마리가 소름끼치게 울부짖으며 날개를 활짝 펼쳤다.

평범한 마물들과는 급이 다른 강력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피부까지 찌릿찌릿하게 만드는 마기는 저항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을 공포에 빠뜨렸다.

“콜록콜록! 수, 숨을 쉴 수가…!”

“살려줘! 으윽….”

패닉에 빠진 연회장.

그 속에서 재빠르게 모두의 구심점이 된 사람이 둘 있었다.

바로 키리아와 제논이었다.

제논이 외쳤다.

“검을 들어라. 가고일을 포위해 사람들에게서 떨어뜨린다!”

“핫… 예!”

제논의 명령에 루크를 비롯한 성기사들이 즉시 검을 들었다. 마물 기사들도 마찬가지.

성기사단과 마물 기사단은 제논의 능숙한 지휘 아래 대열을 갖췄고, 빠르게 가고일을 포위했다.

공작성 마물들과 성기사들의 첫 협동이었다.

º º º

한편 키리아는 연회장의 손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여러분! 여기 벽쪽으로 오세요. 네, 거기 숨어계신 분들도요! 혼자 떨어져 있으면 질식사합니다!”

“힉.”

겁먹은 귀족들이 얼른 키리아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거나 기어왔다.

갑작스런 가고일들의 출현에도 키리아는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이는 태도였다.

귀족들은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의지하면서, 뭘 믿고 있는 건지 궁금해했다.

사람들이 모이자 키리아가 로하넨을 쳐다봤다.

“로하넨. 아티팩트 갖고 있죠?”

“네! 곧 시연하려고 준비해두고 있었습니다. 여기 이 보관함에요.”

“그걸 모두에게….”

힐끔.

가련하게 떨면서도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귀족들을 발견한 키리아.

“…주지는 못하겠죠. 엄연히 이것의 가치를 먼저 알아보고 구매한 분들이 있으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키리아의 눈짓을 알아들은 로하넨은 마기 정화 아티팩트를 나눠주었다.

바로 키리아의 VIP, 고위 신관들에게.

이미 그들에겐 포장한 아티팩트를 주었던 키리아지만, 시치미를 떼고 지금 처음 주는 척했다.

그리고 신관들이 어리둥절하기도 전에 다그쳤다.

“서둘러요. 사람들이 숨 막혀하잖아요!”

“아, 예!”

고위 신관들은 사람들 주위에 울타리처럼 간격을 두고 서서 아티팩트를 발동했다.

마기를 포함한 모든 독소가 정화되고 청량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아….”

귀족들의 표정이 편안해졌다.

상쾌한 산림욕의 기분.

온몸을 경직시켰던 공포심이 가시며 몸의 근육이 이완됐다. 스트레스까지 해방되는 느낌이다.

이것이 바로… 힐링.

귀족들은 이런 맑고 깨끗한 기분을 집으로 돌아가서도 맛보고 싶어졌다.

북부인들만 이런 좋은 걸 갖게 되다니 너무 아니꼬웠다.

결국 한 남부 귀족이 고위 신관에게 슬쩍 물었다.

“그거… 얼마죠?”

º º º

단말마와 함께, 마지막 가고일의 몸이 와르르 부서졌다.

“헉, 헉….”

쉽지 않은 상대였다. 과연 왕의 근위병답게 강력했다.

하지만 해냈다. 예상을 뛰어넘는 최소한의 피해로 가고일들을 모두 쓰러뜨렸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성기사와 마물이 같은 지휘관 아래에서 뭉쳤기 때문.

“…흥. 마물들도 은근히 제법인데?”

“쓸만함, 인간치곤.”

두 기사단은 서로 입술을 씰룩거리며 칭찬 아닌 칭찬을 했다.

“…….”

그 꼴을 조금 징그럽단 듯 쳐다보던 제논이 화제를 돌렸다.

“이젠 저걸 치울 차례군.”

“크윽….”

가울에게 등을 밟힌 롤스 추기경을 말하는 거였다.

대신녀가 제논에게 조심스럽게 청했다.

“란페르세 공작. 이 자를 교단의 법도로 처벌해도 될까요? 물론 키리아 양과 마물 기사들에게 끼친 피해는 충분히 보상할 거예요.”

“…최종적인 형벌에는 저와 키리아의 동의도 있어야 할 겁니다.”

“물론이에요.”

제논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울이 추기경을 성기사들에게 넘겼다.

“그리고 제가 꼭 해야 할 일이 남았군요.”

대신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키리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신녀는 키리아가 걱정스러웠다. 모두가 가고일 때문에 공포에 질린 모습을 봤으니까.

그래서 두려워하는 그녀를, 이젠 괜찮다며 달래줄 요량이었다.

“키리아 양.”

“아, 대신녀님. 다친 곳은 없으세요?”

키리아가 환히 웃었다.

아티팩트 시연회를 크게 성공시켜 좋아하는 자본주의 미소였다.

그 미소에 대신녀는 크게 놀랐다.

“이런 때에도 제 안부를 먼저 묻는다고요?”

“네? 그럼요. 당연하죠.”

“…키리아 양은 정말 어둠 속 별빛 같은 존재군요. 저 스스로를 대신녀라 칭하는 게 부끄러워져요.”

“엥…?”

키리아가 멈칫 자리에 선 그때.

“나의 은인, 키리아 양.”

대신녀가 한쪽 무릎을, 일각수가 네 발의 무릎을 꿇었다.

교단의 수장과 상징이 보인 초유의 사태에 모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