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솨아―
키리아의 주변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며 마기가 브로치로 빨려 들어갔다.
마기는 신선한 공기로 정화되어 다시 빠져나왔다.
그러자 곧 숨이 넘어갈 것처럼 새파랗게 질렸던 사람들의 안색이 한결 편안해졌다.
‘마기 해독수 공기청정기 버전이지.’
자신들도 모르게 마기에 오염된 신관들, 증식한 마계초의 마기 때문에 노예로 납치됐던 드워프들, 그리고 개량까지 했을 정도로 대량의 메두사꽃을 확보한 추기경.
이 모든 일들을 보고 들은 키리아는 만일을 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결과가 이 마기 정화 아티팩트.
마기 해독수는 공기까지 정화하지는 못하니까 말이다.
‘처음으로 선보이는 건 연회장이 될 줄 알았는데.’
어쨌든 아티팩트 덕분에 숨통이 트였다.
키리아는 대신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제 근처로 바짝 끌어당겼다.
“대신녀님. 숨기기가 좀 편안하시죠?”
“키, 키리아 양….”
대신녀가 헐떡이며 눈을 떴다.
“미안해요. 내가 신성력을 써야 하는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요.”
“괜찮아요. 대신녀님 탓이 아니니까요.”
생명석은 어디까지나 매개일 뿐이었다.
대신녀가 신성력을 제대로 끌어올리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오래 갇혀 있던 탓에 대신녀는 무척 쇠약한 상태.
구속구와 쇠창살을 부술 때는 집중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지만, 지금 그녀는 독한 마기를 흡입해버렸다.
마기에 오염된 신관들이 많았듯, 신성력이 강한 대신녀이기에 남들보다 더 치명적이었다.
“무리하지 마세요.”
“그 아티팩트가 아니었다면 전 벌써 숨이 끊어졌을 테죠. 하지만… 점점 공기가 다시 탁해지는 것 같아요.”
“네, 맞아요.”
키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이건 1인용이거든요.”
“……!”
한 개의 아티팩트가 여럿의 호흡을 감당하다 보니 효율이 떨어졌다.
본래대로라면 아티팩트에 금방 한계가 오겠지만.
키리아의 것은 아니었다.
‘내 건 VIP들 것보다 훨씬 튼튼하게 만들었거든.’
여러 명을 감당해야 하기에 효율이 떨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대신 내구성이 아주 좋아 오래 갈 거다.
‘여기서 1박 2일도 가능할걸?’
내 몸은 소중하니까.
그래서 키리아는 다른 이들을 제 쪽으로 계속 끌어당기는 행동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하지만 쓰러진 드워프를 옮기는 건 키리아의 완력으로 무리였다.
‘내 쪽으로 오라니까 저기 자빠져 있네!’
대신녀의 발치에 쓰러진 드워프들.
키리아와는 반대편이어서 아티팩트의 효과도 미약했다.
키리아는 그들을 낑낑거리며 옮기는 것보다 더 간단한 방법을 썼다.
나보다 일행의 중심에 있는 사람에게 브로치를 주면 되잖아?
“대신녀님, 이걸.”
키리아는 브로치를 대신녀에게 주었다.
대신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키리아를 쳐다봤다.
“키, 키리아 양. 이건.”
“갖고 계세요.”
키리아가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을 제 쪽으로 끌어당기느라 힘을 쓴 탓에 상당히 지친 미소였다.
“저보다 대신녀님이 갖고 계셔야 해요. 대신녀님이 모두의 중심이니까요.”
“……!”
심하게 흔들리는 대신녀의 눈동자.
“…혼자라면 살 수 있는데도 이걸 양보하다니요.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과한 반응에 키리아는 움찔했다.
‘갑자기 왜 글썽거리시지?’
대신녀는 젖은 목소리를 꾹 눌러가며 말했다.
“내가 중심이라니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키리아 양이 아니었다면 나와 이 사람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었을 겁니다. 키리아 양이 우리 모두를 살렸고 살리고 있어요. 그러니 모두의 중심은 당신이에요.”
“어….”
뭔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은데.
대신녀가 제 손에 쥐어진 브로치를 다시 키리아에게 내밀었다.
키리아는 대신녀의 손을 얼른 도로 물렸다.
“아뇨. 갖고 계셔야 해요.”
“키리아 양…! 제발. 혼자서만 희생하려 하지 말아요!”
거의 울 것 같은 대신녀의 목소리.
키리아는 대신녀를 정말 울리기 전에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콰앙―!
몸이 흠칫할 정도로 커다란 굉음이 공기를 울렸다.
‘폭발이 시작됐나?!’
키리아가 다급히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키리아!”
자욱한 흙먼지 속에서 익숙하고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목소리를 듣자마자 키리아가 소리쳤다.
이윽고 제논이 키리아의 앞으로 달려왔다. 무사한 키리아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전 괜찮아요. 하지만 이곳이 곧 폭발할 거예요.”
“어서 나가죠.”
제논은 즉시 가울을 소환했고, 두 사람은 쓰러진 대신녀와 사람들을 두셋씩 한 번에 들쳐메고 밖으로 빼냈다.
마기 정화 아티팩트를 대신녀에게서 돌려받은 키리아도 제논의 뒤를 따라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막 빠져나가기 전.
개량 메두사꽃밭 한쪽 구석에 있는 유리관들이 키리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개량된 꽃들하고 비슷하지만 다른 생김새.
‘검붉은 색….’
키리아의 눈이 커졌다.
‘저게 진짜 메두사꽃이야!’
메두사병은 물론, 제논의 마물병을 치료할 필수적인 열쇠!
‘저걸 가져와야 해!’
키리아는 그쪽으로 방향을 틀어 달렸다.
꽃밭 곳곳에 박힌 유리구슬들이 붉은색으로 위험하게 점멸했다. 점멸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짐덩이들을 내려놓고 문득 뒤를 돌아본 제논이 키리아를 발견했다.
“키리아!”
순식간에 달려와 앞서가던 키리아의 허리를 낚아채는 제논.
“잠깐만요! 저걸 가져와야 해요!”
버둥거리며 키리아가 메두사꽃이 있는 구석을 가리켰다.
“저게 메두사꽃이라고요!”
“……!”
하지만 제논은 유리구슬들의 점멸을 봤고, 즉시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결정했다.
그는 키리아를 어깨에 들쳐메고 전력으로 바깥을 향해 달렸다.
그리고 가울이 있는 곳까지 건물과 거리를 벌리자마자.
콰쾅! 쾅!
요란한 굉음과 함께 건물이 터져나가듯 폭발했다.
거센 열풍이 멀리 떨어진 키리아의 머리칼을 마구 휩쓸었고, 제논이 그녀를 끌어안아 몸을 웅크렸다.
“안 돼, 메두사꽃…!”
저게 있어야 리안의 병을 치료하는데! 바로 눈앞에 있었는데!
불타오르는 건물을 보는 키리아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º º º
키리아는 허무한 얼굴로 멍하게 앉아 있었다.
제논이 말을 걸어도, 미인계를 써도 대답하지 않을 정도였다.
“으, 으음.”
그때, 정보원들과 루크가 눈을 떴다.
“헛, 주군!”
“아…!”
그들은 키리아와 제논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그러다 머리가 핑 돌아 비틀거렸다.
“앉아 있어.”
제논의 말에 그들은 감사히 바닥에 앉았다.
“시설에 잠입한 후 잡힌 건가?”
“예…. 송구합니다.”
“무언가 알아낸 것이 있나?”
정보원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에서 사각형으로 접힌 서류들을 꺼냈다.
“이건 해당 시설에서 불법으로 사람들과 이종족들을 납치해 데려왔다는 것을 증명할 장부입니다.”
제논이 놀라 서류들을 가져왔다.
제대로 펼쳐 보니, 정말로 실험체 수급에 관련된 내용과 함께 하단에는 롤스 추기경의 서명까지 있었다.
드워프들의 증언을 뒷받침할 확실한 증거였다. 이거라면 추기경을 성직에서 끌어내릴 수 있었다.
과연, 잡히더라도 그냥 잡히지 않은 정보원들이었다.
“잘했다. 시설의 연구에 대해선 알아낸 바가 있나?”
“그에 대한 것을 찾으려 했지만, 그 전에 성기사들에게 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랬군.”
“…저.”
이때 열심히 글을 적던 루크가 끼어들었다.
[문서는 찾지 못했지만 대신 연구에 쓰인 재료로 보이는 걸 챙겼어요.]
그러며 루크가 꺼낸 것은 새끼손가락 크기의 작은 시험관이었다.
꽃 한 송이를 해체한 듯한 꽃잎과 꽃술들이 시험관 안에 담겨 있었다.
검붉은색의 꽃잎이었다.
문득 그것을 발견한 키리아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그, 그거 혹시!?”
시험관을 낚아챈 키리아는 꽃잎을 자세히 살펴봤다.
확실했다. 유리관 속의 메두사꽃과 같은 것이다.
키리아의 얼굴에 희열이 차올랐다.
“우와아! 루크 최고다! 사랑해 진짜!”
루크를 덥썩 끌어안고 방방 뛰는 키리아.
루크는 얼굴이 벌개졌다. 키리아가 예상외로 기뻐해주니 루크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동시에 슬쩍 제논의 눈치를 보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
놀랍게도 제논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제논이 루크의 머리를 툭툭, 가볍게 두드렸다.
“잘했다. 아주 중요한 자료를 가져왔어.”
그의 칭찬에 루크가 수줍게 볼을 붉혔다.
머리를 두드리는 손에 힘이 들어간 것 같았지만… 그래도 칭찬 역시 진심 같았으니까 상관없었다.
키리아가 웃음을 되찾자 일행 모두의 마음이 비로소 편안해졌다.
그렇다면 이제 다음 할 일을 해야했다.
“추기경 놈을 잡으러 가죠, 왕.”
가울이 주먹으로 제 손바닥을 팡팡 치며 잔뜩 벼르고 있었다.
제논도 동의했다. 추기경이 방심하고 있을 지금이 기회였다.
“연회장으로 돌아가지. 아, 하지만 텔레포트 아티팩트가 하나뿐이군.”
제논이 가지고 있는 건 많아 봐야 두 명을 옮길 뿐이었다.
대신녀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중앙 신전에는 만일을 대비해 대형 텔레포트 진이 설치되어 있어요. 제가 사라지기 전과 같다면 그대로 있을 테죠.”
“정말요? 잘됐네요.”
키리아가 좋아했다.
“그럼 일단 중앙 신전에 가서 신관들에게 설명을….”
하지만 굳이 찾아갈 수고를 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 누구냐!”
폭발음을 듣고 조사를 위해 황급히 몰려온 성기사들과 신관들이 나타났으니까.
고위 신관 중 일부가 대신녀를 알아보고 깜짝 놀랐다.
“대… 대신녀님? 아니, 방금 중앙 신전에 계셨는데 어떻게…?!”
혼란에 빠진 신관들.
대신녀를 알아본 이 대부분이 키리아가 VIP로 선별한 사람들이었다.
키리아는 대신녀를 보고 히죽 웃었다.
“대신녀님. 공작성 연회장으로 저희와 함께 가시겠어요?”
대신녀도 싱긋 웃었다.
“초대를 기다리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