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귀족들을 한참 상대하던 제논은 겨우 틈을 내 빠져나왔다.
제논을 대하는 북부인들의 공경과 주접 덕분에, 남부 귀족들도 두려워하지 않고 제논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래서 제논은 오랜만에 귀찮음을 마구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게 검술 훈련보다 피곤한 일이었다.
‘이것만큼은 마물병 때문에 배척받았을 때가 낫겠는데.’
이러는 지금도 마물병은 완화됐을 뿐 낫지는 않은 상태다.
그런데도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다니. 제논은 새삼 신기했다.
단 한 사람이 불러온 변화였다.
제논은 바로 그 한 사람, 키리아를 찾기 위해 연회장을 훑었다.
“……?”
그런데 키리아가 보이지 않았다.
발코니도 찾아보았지만 마찬가지.
설마.
‘나만 두고 혼자 땡땡이치고 있나.’
할 거면 같이 하지.
사알짝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고 삐진 건 절대 아니었다. 절대.
“가울.”
“예, 왕!”
가울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연회 음식을 마구 먹고 있었다.
“키리아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
“풀떼기요? 아까 저랑 같이 연회장 밖 회랑 계단에 있었는데요.”
“…둘만 땡땡이쳤던 건가?”
미묘하게 뾰족해진 제논의 눈매.
가울은 눈치채지 못하고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티팩트 일로 말할 게 있어서 잠깐 나왔던 겁니다.”
“그렇군.”
제논이 평온을 되찾았다.
제논은 가울이 말한 장소로 향했다.
회랑 근처에도 마물들이 있을 테니, 키리아가 어디 갔는지 물어볼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더니.
마물들이 죄다 쓰러져 있었다.
“…….”
순간 멈칫했던 제논은 연회장을 힐끗 돌아보고는 은밀히 가울을 소환했다.
제논의 명령으로 가울이 신속히 상황을 파악해 보고했다.
“다른 곳에서 경비를 서는 마물들과 인간들은 소란을 알아채지 못한 모양입니다. 그리고… 추기경 놈이 보이질 않습니다.”
“…키리아만이 목적이었던 건가.”
“이건 그냥 넘어가선 안 됩니다, 왕. 풀떼기가 위험하다고요. 당장 연회장을 봉쇄하고 모두를 족쳐봐야…!”
“아니.”
제논이 단호히 명령했다.
“섣불리 굴지 말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행동해라. 로하넨에게 이 사실을 조용히 알리고 경비를 강화해.”
“으, 알겠습니다.”
가울이 사라진 후 제논은 바닥에서 작은 핏자국을 발견했다.
마물들과 떨어진 곳에 있는 흔적.
키리아의 것이다.
“…….”
핏자국을 짚은 제논의 붉은 눈이 살기를 띠었다.
콰드득
얌전하던 마물의 팔이 멋대로 날카로운 손톱을 세우며 손가락에 바짝 힘을 주었다.
기절한 마물들이 고통스럽게 신음할 정도로, 주변 공기가 저릿저릿해졌다.
제논이 당시 정황을 알기 위해 마물들을 깨우려 할 때였다.
팟!
텔레포트 특유의 빛과 함께 한 남자가 비틀거리며 나타났다.
온몸에 상처를 입은 한스였다.
“주, 주군.”
“한스. 보고해라.”
괜찮으냐는 하나마나 한 질문보다 신속한 파악이 먼저였다.
“주군의 의심대로 그 야산에 비밀 시설이 있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이를 더 깊이 조사하다 제 부하들과 루크가 붙잡혔습니다.”
그들 덕분에 한스라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아티팩트.”
제논이 손을 내밀자 한스가 텔레포트 아티팩트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제가 있던 곳으로 이동하실 수 있습니다. 그곳에 주군을 도와줄 자가 있을 겁니다.”
한스가 얼른 덧붙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뭐가?”
“야산의 출입을 막던 경비가… 제가 도망칠 때 보니 많이 허술해져 있었습니다.”
더 이상 인력을 쏟을 필요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
제논은 두말하지 않고 바로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도착한 곳은 야산 한복판.
한스는 급히 후퇴하느라 시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아티팩트를 사용했다.
길이 없는 곳이기에 어디서부터 시설을 찾아야 하는지 애매한 상황.
이때였다.
“푸르릉.”
일각수가 기다렸다는 듯 제논에게 다가왔다.
고아원 아이들을 감지했을 때처럼 무언가를 예감하고 달려온 일각수였다.
“한스가 말했던 조력자가 너구나.”
제논이 일각수의 뺨을 한 번 쓰다듬고는 훌쩍 말 위에 올랐다.
“가자.”
잠깐이나마 온화해졌던 제논의 인상이 살벌하게 구겨졌다.
“최대한 서둘러라. 키리아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어.”
“히히힝!”
분노가 전염된 듯, 일각수가 제논을 태우고 거칠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º º º
“자, 조용 조용.”
북부의 별, 키리아는 지휘자처럼 양손을 부드럽게 내리누르는 제스쳐를 하며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어느새 두 손을 기도하듯 포개고 있던 사람들.
그만큼 모두가 탈출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나갈 방법을 다 같이 생각해 보자구요. 일단은 간수가 가진 열쇠를 손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건… 무리야.”
드워프들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 간수들은 어딘가 이상해. 완력부터가 보통이 아니야.”
“그, 그래요?”
“간수 하나에 우리가 다 덤벼도 장담할 수 없어. 무기도 없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드워프가 이렇게 말한다면 참고하는 게 좋겠지.
키리아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대신녀의 구속구도 벗겨야 하니 간수를 제압하는 게 제일 좋긴 한데….’
“저.”
대신녀가 차분히 말했다.
“내가 신성력을 끌어올리면 이 족쇄는 물론 철창도 없앨 수 있을지도 몰라요.”
“네? 그 상태에서 신성력을 쓰실 수 있다고요?”
“마기가 묻은 것들이니까 신성력이 통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대신녀가 미안함을 담아 작게 덧붙였다.
“오래 갇혀 있던 탓에 내 신성력은 기력처럼 쇠한 상태예요.”
“아….”
“그러니 조금만 시간을 줄래요? 키리아 양 덕분에 몸 상태가 나아졌으니 이대로 휴식을 취하면 신성력도 회복될 것 같군요.”
과연 유일한 공격수이자 힐러.
하지만 키리아는 대신녀를 쉬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 이끼를 붙인 채로 휴식하시면 휴식이… 아주 길어질 거예요. 영면처럼.”
“…그, 그렇군요.”
“어쨌든 신성력을 지금 당장 쓰실 순 있다는 거죠?”
키리아가 씩 웃었다.
그러고는 자신의 귀걸이를 양쪽 다 빼서 대신녀에게 건네주었다.
바로 생명석이 장식된 귀걸이였다.
“저는 보통 약에 넣어 쓰지만… 기본적으로는 만능 마정석이거든요, 이게.”
“마, 마정석이요?”
“대신녀님의 신성력을 증폭시킬 거예요. 어서 해보세요.”
키리아의 재촉에 대신녀는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집중했다.
그녀의 손목과 발목에서 희미한 금빛 신성력이 연약하게 발현되는가 싶더니.
번쩍!
태양처럼 강렬한 빛이 한순간 터져 나왔다. 신목의 가지에 버금갈 정도로.
“흐억!”
“악!”
키리아를 비롯한 사람들이 제 눈을 부여잡았다.
“미, 미안해요. 오랜만에 하다 보니.”
“괜찮아요.”
키리아는 눈물이 핑 도는 눈을 수 차례 깜박거렸다.
이윽고 키리아는 대신녀의 구속구가 형편없이 약해지고 부식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침내 대신녀가 힘을 주자, 구속구는 동강 나듯 부서졌다.
“오오…!”
키리아와 모두가 감탄했다.
탄력받은 대신녀는 이번엔 창살을 붙잡았다.
다시 한번 번쩍이는 신성력과 함께, 창살이 푸스스 부서져 내렸다.
사람 한 명은 충분히 통과할 구멍이 생겼다.
“우와!”
키리아를 선두로, 모두가 소리 없이 박수를 쳤다.
“역시 대신녀님!”
“어머나, 호호호. 저도 아직 청춘이군요.”
대신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키리아에게 받은 생명석 귀걸이를 제 귀에 걸었다.
“잠시 빌릴게요, 키리아 양. 이렇게 아름다운 귀걸이를 하니 기분이 좋군요.”
키리아는 찡긋 웃으며 쌍따봉을 들어올렸다.
º º º
다행스럽게도 대신녀는 감옥으로 끌려올 당시의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키리아는 그녀를 따라 사람들과 함께 감옥을 빠져나가 이리저리 복잡한 길을 걸었다.
제1연구실, 제2연구실 등 수상한 방들도 지났다.
‘이상하게 사람이 없는 것 같은데….’
날 납치한 성기사도, 간수들도 전부 어딜 간 거지?
키리아는 스멀스멀 불안감을 느꼈다.
이때 대신녀가 갈림길 가운데에서 멈췄다.
“여기서 어느 방향이었는지 헷갈리는군요.”
“일단 가 보죠 그럼.”
키리아가 왼쪽 길로 들어섰다.
하지만 그곳은 출입구가 아니었다.
개량 메두사꽃밭이었다.
“음…!”
대신녀가 소매로 코와 입을 막았다.
“마기가 짙어요. 다들 숨을 참고 길을 되돌아가지요!”
“저, 저기 사람이 있는데요?”
누군가 꽃밭 가운데를 가리켰다.
그쪽을 본 키리아는 깜짝 놀라 단번에 달려갔다.
“루크! 여러분!”
루크와 전 자경단원인 한스의 부하들이었다.
“왜 여기에…? 일단 정신 좀 차려봐요.”
“우리가 업지.”
정신을 차릴 기미가 안 보이는 루크와 부하들을 드워프들이 업었다.
기절한 이들의 발이 땅에 질질 끌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들어왔던 곳으로 빠져나가려는데.
“이런. 더 머물다 가지 않으시고.”
롤스 추기경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롤스 추기경!”
노한 대신녀가 그를 일갈하듯 불렀다. 추기경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키리아를 증오스럽게 노려봤다.
“독초나 다루는 마녀 주제에, 자꾸 내 심기를 거슬린단 말이지.”
키리아가 모두의 앞에서 보인 찬란한 신성력과 일각수의 치료.
구원자가 될 거라는 신탁.
그리고 뒷골목에서부터 시작된, 키리아를 성스럽게 영웅시한 소문.
그것들이 뒤섞여 사람들은 신전을 의심의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바깥의 소문까지 점점 흘러들어오면서 의심은 의혹이 되었고,
설상가상, 자신에게 반대해서 힘껏 밟아놨던 신관들에게 어째선지 조금씩 세력이 붙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들은 키리아와 공작에게 우호적인 세력으로 변모했다. 신전 내부에서 말이다!
롤스는 자신의 자리가 위험하다고 느꼈다. 이제 와 황태자 전하에게 내쳐져서도 곤란했다.
그래서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고자 했다.
바로 이 모든 일을 일으킨 원흉, 키리아를 제거함으로써 말이다.
“네가 벌인 일이니 네가 수습해줘야겠어.”
롤스는 손에 들고 있던 아티팩트 구슬을 깨뜨렸다.
그러자 메두사꽃밭 곳곳에 심어져 있던 작은 구슬들이 불길한 붉은 빛을 깜박이기 시작했다.
“어차피 폭파해 없애려던 곳인데 이렇게 활용할 수 있어 기쁘군. 흐흐.”
“롤스 추기경! 나를 없애면 당신은 무사할 줄 아는가!”
대신녀가 소리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어차피 일각수가 점점 성가시게 구는 바람에 당신도 곤란하게 된 참이었어. 그럼.”
롤스 추기경이 손을 뻗자 엷은 신성력이 꽃밭 전체로 퍼졌다.
그러자 자극을 받은 메두사꽃들이 짙은 마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공작의 생일 연회에서… 폭발 사고 소식이 언제쯤 들려올지 즐겁게 기다리고 있겠네.”
팟. 추기경이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이곳의 유일한 출입문도 닫혀버렸다.
“콜록콜록!”
눈에 보일 정도로 짙어진 마기에 사람들이 풀썩, 연속으로 쓰러졌다.
현기증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순식간에 빼앗을 정도로 치명적인 농도의 마기.
대신녀조차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이때 키리아가 다급히 외쳤다.
“다들, 제 옆으로 오세요!”
키리아는 자신의 브로치에 손을 올렸다.
새로 개발한 아티팩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