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키리아는 의식이 비몽사몽 돌아오기 시작하자 몸이 떨리는 한기를 느꼈다.
그리고 머리의 얼얼한 통증도.
“아, 씨….”
불쾌한 통증에 눈살을 찌푸리며 눈을 뜨는 키리아.
그제야 이끼 낀 더러운 돌바닥에 뺨을 대고 쓰러져 있던 것을 알았다.
“어…?”
고개를 든 키리아의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건 철장이었다.
이곳은 감옥이었다.
다른 여러 사람도 함께 갇혀 있었는데, 평범한 사람들, 처음 보는 드워프들, 앙상한 노부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하나같이 지치고 피폐한 모습이었다.
이들의 체념한 분위기에 키리아 자신까지 침울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발견한 한 남자 때문에 키리아는 침울할 타이밍을 놓쳤다.
‘저기 쭈그리고 있는 배 나온 중년인… 낯이 익은데… 설마.’
<요람에서 무덤까지> 로버트 편집장?
‘헉. 왜 여기 있지?’
자신이 칼럼을 연재하는 잡지를 꼬박꼬박 챙겨본 덕에, 가끔 뒷페이지에 실리는 편집부 사람들 소개 삽화도 몇 번 봤던 키리아였다.
삽화 페이지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에 있던 편집장의 얼굴.
구석에 가장 침울하게 쭈그리고 앉은 저 중년인이 삽화 속 편집장과 똑같았다.
키리아의 시선을 느꼈는지 로버트가 키리아를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곧 흥미 없다는 듯 관심을 껐다.
여기저기 상처도 많고 상당히 지친 얼굴이었다.
“…….”
남부에 있을 사람이 왜 북부에, 그것도 이런 비밀 감옥에 와 있는 거야?
이때 한 앙상하게 마른 노부인이 키리아의 의문을 짐작하고 답을 했다.
“저 사람은 남부 사람인데, 북부에서 마물에 쫓겨 길을 헤매다가 그만 납치되고 말았다고 해요.”
운도 더럽게 없었단 얘기였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처지지요. 드워프들은 마을을 습격당했고.”
쇠고랑을 차고 있으면서도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이 무척 품위 있는 노부인이었다.
푸른 눈은 젊은이 못지않게 맑고 깊었다.
키리아는 노부인의 옆에 떨어져 있는 흰 베일과, 유독 그녀만 차고 있는 쇠고랑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혹시… 혹시 대신녀님이세요?”
“음? 어떻게 그렇게 빨리 짐작했지요?”
“지금 신전에 있는 대신녀가 가짜라는 걸 알고 있거든요.”
대신녀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하지만 이내 빛은 꺼지고, 다른 사람들처럼 우울한 낯으로 바뀌었다.
“2년 만에 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나타났군요. 너무 늦었지만….”
“늦긴요!”
키리아는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탈출해야죠. 신성력 최강이신 대신녀님이 바로 여기 계시잖아요?”
“어디로 끌려온 건지 알고나 하는 소린가?”
한 여자가 자조하듯 비아냥거렸다.
키리아는 개의치 않고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럼요. 여긴 아마 북부 중앙 신전 근처에 있는 야산이겠죠. 야산에 있는 숨겨진 시설. 제 말 맞죠?”
“…맞아요.”
대신녀의 대답이었다.
다른 사람들도 키리아가 이런 정보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듯했다.
“알면 뭘 할 수 있는데.”
편집장 로버트가 구석에서 중얼거렸다.
“우린 전부 실험체야. 곧 한 명씩 끌려 나갈 거라고.”
“실험체…?”
이들을 불법으로 납치한 목적은 실험체 조달이었구나.
‘역시. 메두사꽃의 개량 목적은 따로 있었어. 실험체가 필요할 정도의 목적이 뭘까?’
키리아는 생각하며 로버트에게 물었다.
“실험체라니, 무슨 실험인데요?”
“내가 어떻게 알아? 여기서 나간 적도 없는데. 그저 간수가 실험체를 데려간다고 해서 아는 것뿐이라고.”
“그리고 한 명도 다시 돌아오지 않았어….”
다른 사람이 덜덜 떨며 덧붙였다. 그가 키리아에게 따지듯 물었다.
“여기 왔다는 건 당신도 실험체가 될 거란 얘기라고. 무섭지도 않아?”
“…네. 생각보다 괜찮네요.”
“어, 어째서 그럴 수 있는 거지?”
왜냐면.
“분명 날 구하러 올 테니까요.”
공작님은 분명 그럴 것이다. 반드시 날 찾아줄 거야.
강한 확신 덕분에 키리아는 모두가 체념한 분위기 속에서도 혼자 꿋꿋할 수 있었다.
그리고, 뭐라도 시도하기 전에 징징대는 멘탈로는 메데이아 못 하거든.
키리아의 태연한 모습에 다른 사람들은 기가 막힌 듯했다.
“우리도 처음엔 그랬어.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은 허무한 얼굴의 대신녀를 힐끗거리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에 키리아는 이들이 왜 이렇게까지 비관적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대신녀가 한동안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었던 거구나.’
그런 그녀마저 저렇게 무너지니 다들 희망을 놓아버린 듯했다.
“대신녀님.”
키리아는 대신녀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앉았다.
“저랑 같이 탈출 방법을 궁리해봐요.”
일단 대신녀가 기운을 차려야 했다.
사람들의 사기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탈출을 위해선 대신녀의 신성력이 가장 쓸모 있을 테니까.
드워프들에게 무기가 없는 이상, 이 중 유일한 전투 인원은 대신녀였다.
“…미안하군요.”
대신녀는 자신의 팔목을 연신 긁으며 말했다.
사실 그녀는 키리아에게 처음 말을 걸었을 때부터 제 몸을 긁어대고 있었다.
“너무 간지럽고 아파서… 다른 일을 할 수가 없을 지경입니다.”
“으악.”
키리아는 대신녀의 두꺼운 수갑 사이로 진물과 핏물이 섞여 흐르는 걸 보고 경악했다.
“그만 긁으세요!”
이제 보니 손목만이 아니라 발목도 마찬가지였다.
수갑과 족쇄에 닿은 피부에 빨간 두드러기가 올라와 있었는데, 그 부분을 연신 긁어대면서 진물과 피로 지저분해졌다.
평범한 쇳독이라기엔 유난히 심해 보였다.
“이 구속구는… 내 신성력을 억누르기 위해 독으로 특수 처리된 것입니다. 내 기력이 쇠약해지면서 구속구의 독이 더 심하게 작용했죠.”
“독으로 특수 처리를 했다고요?”
“예…. 북부의 독초는 마기의 영향을 받은 게 많으니까요. 마기가 섞인 독이지요.”
“다른 증상은요?”
“기력이 빠지고, 쇳독이 점점 심해진다는 것 정도….”
대신녀가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가짜 대신녀를 들키지 않기 위해선 신탁도 받아야 하고 일각수도 속여야 하겠죠… 그러니 날 죽이지도, 완전히 무력화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괴롭히는 거랍니다.”
“…….”
“…아가씨?”
“쉿. 잠시만 조용히.”
키리아는 대신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마기가 섞였다고 해도 독초의 효능은 같아. 기력을 뺏고 쇳독을 심하게 만드는 독이라면… 마이넌 풀과 페레우스 꽃씨의 혼합. 그게 가장 가능성 높아.’
해독이 어려운 독은 아니지만….
키리아는 칫, 가볍게 혀를 찼다.
‘지금은 아무런 재료도 없는데.’
다른 방법이 뭐 없을까?
감옥을 두리번거리는 키리아.
그런 그녀를 대신녀와 사람들이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희미하게 기대감이 어린 눈빛.
감옥 안에는 아무도 손대지 않은 말라비틀어진 음식 외에는 쓸만해 보이는 게 없었다.
어디까지나 일반인의 눈에는 그랬다.
하지만 키리아에겐 아니었다.
“오.”
작게 탄성을 뱉은 키리아는 음식 쟁반에 있는 더러운 스푼을 쥐고 벽에 붙었다.
그녀의 행동을 보던 사람들은 황당해했다. 왜냐하면,
“아니, 왜 이끼를 긁는 거야?”
키리아가 열심히 이끼를 긁어모으고 있었으니까.
제법 이끼를 모은 키리아가 대답했다.
“대신녀님의 쇳독을 어떻게든 해야 하잖아요.”
“하지만 쇳독을 치료하려면 페레우스 꽃의 뿌리가 필요하잖아?”
“꽃씨의 독을 뿌리가 중화하니까.”
사람들이 의외로 정답을 말하고 있었다.
“어라, 알고 있었네요? 하긴 알고 보면 되게 간단한 처방이죠.”
그래서 언젠가 쇳독에 대처하는 방법을 물은 조앤에게도 알려준 적이 있었다.
“이 이끼는 딱히 해독제는 아니에요. 하지만 스스로 냉기를 뿜는 독 이끼죠.”
감옥이 유난히 추운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피부에 붙이면 매우 시원하고, 알레르기 반응도 잠깐 동안은 진정시켜줘요.”
대신 오래 붙이면 몸에 고열과 한기가 동시에 나타난다. 괜히 독 이끼가 아니었다.
“…사정이 급하니까요. 임시 처방이에요.”
키리아는 구속구와 대신녀의 피부 사이에 짓이긴 독이끼를 고루 붙였다.
“하아….”
잠시 후, 그동안의 시름을 토해내듯 대신녀가 긴 한숨을 내쉬며 벽에 등을 편안히 기댔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요. 당신은 약제사인가요?”
“네. 소개가 늦었네요. 전 란페르세 공작님의 주치의 키리아라고 해요.”
“…제논의?”
대신녀가 놀란 나머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순간,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의 표정도 놀란 채로 딱 굳었다.
이들을 눈치채지 못한 채 키리아가 대신녀에게 당부했다.
“네. 하지만 다른 얘기는 잠시 미루도록 해요. 그 이끼는 오래 붙이면 안 되니까요. 신성력을 쓰실 수 있겠어요?”
“아, 아아. 네. 가능할 것 같군요.”
“좋아요. 그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키리아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대신녀가 기운을 회복했으니 여러분도 희망을 가지라고 말하려 했다.
그런데 사람들은 키리아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게 변해 있었다.
“이끼를 모을 때부터 범상치 않았는데!”
“아리키 님이셨군요!”
“…엥?”
당황한 키리아와 달리, 사람들은 언제 우울했었냐는 듯 들뜬 얼굴로 키리아의 손을 굳게 잡았다.
“
에서 쇳독에 걸린 라이벌 잡포이를 치료해주셨죠!”
“투덜대는 잡포이에게 명대사도 날려주셨고요!”
“입닥쳐, 잡포이!”
하하하!
어리둥절한 드워프들을 제외하고, 금세 공감대를 형성하며 유쾌해진 사람들.
이들은 주로 작은 마을 사람들이었기에, 공작성 약제사보다는 아리키에 더 열광했다.
그러다 아리키의 실제 모델이라는 소문 속의 인물, 키리아가 나타나자 열광은 더 증폭됐다.
마치 소설 속 영웅이 현실로 나타난 듯했다. 아리키처럼 어떤 난관이든 극복해줄 것만 같았다.
“텃세 부리는 마물들을 물리쳤을 때처럼 우릴 구해주실 거죠?”
“어둠의 마법사가 연 사냥 대회에서 탈출했을 때처럼요!”
“거기 드워프들도 믿어봐. 이분, 아리키 님이라니까?”
아리키 팬들은 드워프들까지 챙기며 으쌰으쌰 단합했다.
“어머나….”
이 광경을 본 대신녀는 진심으로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제가 기력을 잃기 전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신녀의 존경 어린 시선까지 받게 된 키리아.
“…….”
왠지 창피하다….
‘에라.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쪽팔려버려!’
이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려면 말을 잘 듣게, 아주 똘똘 뭉쳐야 했으니까.
“…여러분, 절 믿습니까?”
“믿습니다!”
“정말로 믿습니까?”
“절대로 믿습니다!”
흡사 광신도의 외침.
키리아는 사이비 교주처럼 양팔을 옆으로 펼쳤다.
때마침 옷차림도 대놓고 북부의 별 컨셉의 드레스!
“저 아리키를 믿으세요. 그럼 탈출할 것입니다!”
“우와아!”
감옥 안은 그 어느 때보다 희망찬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