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제논의 책망에 마이언은 일단 순순히 사과했다.
“…실례했습니다. 제가 잠시 경황이 없었군요. 하지만.”
고집스런 표정으로 공작을 마주보는 마이언.
“정식으로 초대받은 귀족으로서, 공작 각하의 주치의께 대화를 청하는 것이 잘못된 일은 아닐 텐데요.”
“내 주치의가 불편해하고 있다. 그대도 알 텐데.”
“하지만.”
“키리아가 불편해하는 것이라면 나조차 억지로 권할 수 없다. 그대는 더더욱 그럴 자격이 없지 않은가?”
제논이 키리아의 한쪽 어깨를 감싸며 제 쪽으로 살짝 끌어당겼다.
마치 마이언으로부터 보호하려는 듯한 모습.
“…….”
이 광경이 마이언은 이상하게 괘씸했다.
공작이 키리아에게 손을 댄 순간, 마이언은 그가 꼭 불한당, 도둑놈, 날건달처럼 느껴졌다.
제가 애지중지 보살핀 딸을 웬 공작 나부랭이가 손을 대는 건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까지 들었다.
약제사 이름이 하필 키리아라 그런가?
속으로 화를 삭이고 있을 때.
“주군께 그 무슨 불손한 눈빛이오.”
베른울프 백작이 꾸짖듯이 나섰다.
허. 이건 또 뭔데 날 혼내지?
그늘진 얼굴의 마이언이 그를 향해 스윽 고개를 돌렸다.
“내 눈빛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소. 불만이라도?”
“허…! 주군을 불한당이라도 되는 양 노려본 걸 내가 모를 줄 알고? 누가 보면 그쪽이 우리 약제사님 부모라도 되는 줄 알겠소?”
“그러는 그쪽도 가신과 부모의 선을 착각하는 거 아니오?”
“뭐요?”
크르렁.
흡사 두 마리의 불곰이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한 덩치 하는 남자 둘이 험상궂은 분위기를 조성하자 자연히 주변 시선도 모였다.
“아, 제발.”
키리아는 이마를 짚었다. 이런 관심은 달갑지 않았다.
“그만두세요, 클로버필드 백작님. 어서요!”
“크흠.”
마이언이 마지못해 한 걸음 물러났다.
“베른울프 백작. 그대도 그만해.”
“…예.”
제논의 한 마디에 베른울프 백작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한바탕 신경전이 소강되자 잠시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이때, 키리아는 뒤늦게 롤스 추기경에게 접근하려는 가울을 발견했다.
중앙 신전의 실세인 추기경의 주변에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야 타이밍을 잡은 상황.
그런데 하필이면, 황태자가 가울보다 먼저 추기경에게 접근하고 있었다.
그러자 또다시 주춤하는 가울.
‘어휴, 저 바보!’
결국 내가 나서야겠네.
말이 없는 제논과 마이언 사이에서, 키리아는 어색하게 음악에 감탄하는 시늉을 했다.
“아, 이건 제가 좋아하는 음악이에요. 전 이만 춤추러 가야겠어요.”
“키리아, 그럼 나와….”
“약제사님, 저와 춤을 추면서 제 말을 들어주시면….”
“아뇨, 아뇨. 두 분 천천히 얘기 나누세요. 저는 춤을 신청하고 싶은 상대가 따로 있어서!”
둘 사이를 후다닥 빠져나온 키리아는 빠른 걸음으로 한 남자에게 다가갔다.
상대는 바로 알렌스 황태자였다.
“…….”
“…….”
제논과 마이언의 불쾌한 침묵.
마이언이 작게 꿍시렁거렸다.
“남자 보는 눈도 없으시군….”
“키리아가 아까워.”
“…맞는 말씀을 하시는군요.”
의외라는 듯 마이언이 제논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의 눈빛 한구석에 숨겨진 또 다른 메시지.
‘근데 그쪽도 마찬가지야.’
제논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마이언의 시선을 라이벌의 것으로 오해했다.
‘제 나이를 생각하지 못하는 주책맞은 인물이군.’
키리아가 만든 제품들과 생명석을 남부에 진출시킬 때, 클로버필드 상단은 쏙 빼기로 결심했다.
º º º
“황태자 전하.”
키리아는 알렌스의 앞을 가로막듯 나타났다.
“아, 키리아 양. 오랜만이네요. 전에 봤을 때보다 더 아름다워졌….”
키리아가 은근슬쩍 그의 말을 끊었다.
“저와 한 곡 추시겠어요?”
“아, 네. 영광입니다.”
알렌스는 빙긋이 웃으며 키리아의 손을 잡았다.
이윽고 새롭게 시작된 연주에 따라, 키리아와 알렌스는 함께 춤을 추며 홀을 누볐다.
집순이이긴 해도 귀족 영애로서 기본적인 소양은 익혔던 몸.
키리아는 춤을 추면서 힐끗 가울과 시선을 교환했다.
‘지금이야.’
바싹 긴장한 가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기경이 심은 첩자로 완벽하게 변신 중인 가울은 혼자 서 있는 롤스 추기경에게 다가갔다.
“추기경 예하.”
“…당신은.”
추기경은 몰래 심어둔 인물이 연회 장소에서 접근한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울은 개의치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재킷 안쪽에 있는 녹음 아티팩트의 이물감을 느꼈다.
「자신의 수하 앞에서는 입이 좀 더 쉽게 열리겠지. 뒤에서 심상찮은 일을 꾸미고 있다는 확실한 말을 녹음해야 해.」
연회 전 키리아가 당부한 말이었다.
「그래야 나중에 한스가 물어올 야산에 대한 정보를 추기경하고 엮을 수 있어. 지금으로선 확실히 추기경의 짓이라는 증거가 부족하니까.」
젠장. 차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게 더 적성인데.
가울은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하나뿐인 친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할 작정이었다.
물론, 마음을 굳게 먹었다고 갑자기 화술이나 테크닉이 올라가진 않는 법이다.
추기경이 여상히 먼저 입을 열었다.
“공작님과 약제사가 아주 건강해 보이는군. 성의 음식이 입에 잘 맞으시는 모양이야?”
겉으로는 평범한 일상 대화였지만 속뜻은 달랐다. 독살 시도를 왜 실패했느냐는 책망이었다.
가울의 얼굴이 험악해졌다.
“이런 개똥 같은 게 뒤질―”
“…지금 나한테 말한 건가?”
“아, 아닙니다. 갑자기 벌레가 얼굴에 붙었습니다. 뒤질라고.”
어색하게 자기 뺨을 때리는 가울.
미심쩍게 그를 쳐다보던 추기경이 말을 이었다.
“아무튼, 공작님과 약제사의 인기가 이렇게 좋아졌으니, 두 분을 뵙고자 하는 손님들이 밤에도 끊이지 않았겠지? 어때 보이던가, 그 밤손님들은?”
첩자와 암살자 모두 일을 제대로 하고 있느냐는 추궁이었다.
추기경은 자신이 최근에 받은 첩자의 보고가 위장된 것임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것들 다 뒤졌다 이 새끼야.’
가울은 이번엔 잘 참았다.
“큼. 밤손님들이 공작성의 환대에 대단히 만족하시던데요?”
“뭐…?”
“다음번에 또 오시면 이번엔 저도 직접 나서겠습니다. 잊지 못할 밤을 선물해드리고 싶거든요.”
“쯧. 내 말을 엉뚱하게 이해한 모양이군. 멍청하기는.”
제대로 들었다, 이 새끼야.
속으로 약 올리듯 씩 웃는 가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초조했다.
이 능구렁이 같은 놈이 말을 속 시원하게 안 하고 자꾸 에둘러서 지껄이고 있지 않은가.
“그보다 제게 시키실 일은 없습니까?”
롤스 추기경은 흥미가 식어버린 듯 고개를 돌렸다.
“글쎄. 필요한 일이 생기면 부르도록 하지. 이만 가봐.”
“그러지 마시고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무엇이든….”
“가라고 했을 텐데.”
노기가 담긴 말이 떨어지자마자 몇 명의 남자가 가울의 앞을 벽처럼 가로막았다.
추기경을 따르는 건장한 사내들. 연회복을 입은 성기사들이었다.
“이것들이….”
열 받은 가울이 성기사들을 매섭게 노려봤다.
그러다 흠칫했다.
‘뭐야. 이 자식들 왜 다 동태 눈깔이야?’
신성력까지 묘하게 더 역겨워서 기분 나쁜 놈들이었다.
성기사들과 함께 추기경은 자리를 떠났다.
º º º
“이게 다라고?”
키리아는 가울이 녹음한 아티팩트의 음성을 다 듣고 물었다.
쭈그러든 가울이 눈치를 보다가 도리어 당당하게 책임을 떠넘겼다.
“지렁이 같은 추기경 놈이 말을 이상하게 하더라고. 그 정도로 몸을 사리는데 무슨 수로 말을 끄집어내?”
“하긴 뭐, 넌 조무래기로 변신한 거였으니까….”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키리아는 녹음 아티팩트를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뭔가 다른 수를 찾아봐야겠네.”
이걸로는 추기경의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런데 추기경 놈하고 같이 온 성기사들 말이야. 진짜 성기사 맞냐?”
“왜?”
“유난히 냄새가 역겹잖아. 지나치게 썩은 치즈 같아.”
“너한테 신성력은 다 역겹지 않아?”
“그건 그렇지…?”
갸우뚱거리던 가울은 제 머리를 벅벅 헝클어뜨렸다.
“아씨, 몰라. 아무튼 또 부탁할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해.”
“오, 친절한데.”
“너니까, 멍청아.”
가울이 대충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나도 슬슬 들어가야겠다.”
키리아는 앉아 있던 낮은 계단에서 엉덩이를 조금 들었다.
가울과 몰래 대화하기 위해 연회장을 빠져나와 있던 키리아였다. 옆에는 연회장 경비를 교대하고 쉬고 있는 마물들도 함께였다.
일어난 키리아에게 갑옷을 입은 그렘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됩니다, 찾는 중, 곰 같은 인간이.”
“윽. 백작님이 날 아직도 찾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키리아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다시 쪼그려 앉았다.
안 그래도 사람들 사이에 오래 있어 기가 빨리는데, 백작님 때문에 더 피곤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도 이상하네.’
오늘 백작님의 태도는 이상하리만치 간절했다.
어째서일까?
처음에는 클로버필드 상단과 계약하자는 부탁을 하려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볼수록 아닌 것 같았다.
돈에 엄격하긴 해도, 돈에 매달리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였으니까.
자존심 센 아버지가 초면에, 평민으로 알려진 약제사한테 공손하게 나올 정도로 급한 일이라면….
“설마 리안…?”
말해놓고 보니 리안 외에 다른 이유가 있을 리 없었다.
이러면 얘기가 달랐다.
“만나서 얘기를 들어봐야겠어.”
심각한 얼굴이 된 키리아는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에서 마물이 쿠당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1, 1위님, 주십시오, 도와….”
“에휴. 우리 그렘린, 몇 살?”
돌아본 키리아는 흠칫했다.
“……?!”
키리아의 곁에서 있던 마물들이 모두 쓰러져 있었다.
퍽!
키리아를 불렀던 그렘린까지 누군가의 발길질에 기절해버리고 말았다.
연회복을 입은 성기사였다.
“당신…!”
키리아는 소리치려 했지만, 그 전에 커다란 손이 그녀의 입과 뺨을 동시에 틀어쥐었다.
“흐읍, 으읍!”
‘미친!’
키리아는 버둥거렸다.
‘남부 귀족들까지 모인 자리에서 이런 짓을 벌인다고?’
게다가 아무리 성기사라고 해도, 어떻게 맨손으로 다섯 마리가 넘는 마물을 혼자 순식간에 쓰러뜨리지?
‘그러고 보니 이 사람.’
키리아는 성기사의 무표정한 얼굴을 힘겹게 쳐다봤다.
‘이런 사람이 북부 중앙 신전에 있던가?’
거의 모든 성기사들이 키리아에게 신성력 발현 가르침을 청했기에, 성기사들의 얼굴을 한 번씩은 익혔던 키리아였다.
‘처음 보는….’
퍼억!
머리를 후려치는 강렬한 충격.
“……!”
키리아의 의식이 순식간에 끊어졌다.
이윽고, 성기사가 축 늘어진 키리아를 데리고 텔레포트로 모습을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