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마이언 클로버필드.
클로버필드 백작가의 가주이자 제국의 유명한 상단주.
그는 북부 공작의 생일 연회에 초대를 받아 막 출발 준비를 마친 참이었다.
당일까지 이를 모르고 있던 리안은 당황했다. 알았다면 진즉 누나에게 알려줬을 텐데!
리안은 자신의 굳어버린 몸을 일부러 티내며 마이언에게 손을 뻗었다. 그의 동정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아버지… 저를 두고 가시는 거예요? 절 혼자 두지 마세요.”
“미안하구나, 리안.”
마이언이 험상궂은 얼굴에 미안함을 가득 담았다.
그가 리안의 작은 머리통에 두꺼운 손을 올렸다. 찌그러뜨리려는 게 아니라 쓰다듬는 거였다.
“하지만 이번 자리는 중요해서 내가 가봐야 한단다.”
“그렇지만….”
리안은 마음이 다급했다.
공작성에는 키리아 누나가 있을 텐데, 아버지가 가면 들켜버릴 게 아닌가.
‘내가 누나를 지켜줘야 해!’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 몸으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별 수 없다. 또다시 질풍노도의 사춘기 소년이 되는 수밖에.
리안이 반항적으로 외쳤다.
“고작 귀족들의 사업이 아들인 저보다 중요하다고요?”
“그게 아니라,”
“역시… 내가 친아들이 아니라 그러는 거죠!?”
“……!”
충격으로 굳어버린 마이언의 표정.
리안은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튀어나오려는 ‘죄송해요’라는 말을 꾹 참았다.
마이언은 드물게도 정말 상처 받은 얼굴이었다.
후우….
그가 시름이 담긴 긴 한숨을 뱉었다.
“내 아들은 너 하나뿐이다. 딸도 마찬가지, 키리아 하나뿐이지.”
“…….”
“내 부인, 엘리제의 자식들인 너희들이 내 아이들이 아니면 누구의 아이들이겠느냐.”
“아버지….”
키리아와 리안은, 어머니 엘리제가 마이언과 재혼하기 전에는 평민이었다.
마이언은 곧 표정을 가다듬었다.
평소의 엄격하고 무서운 얼굴로 돌아왔다.
“엘리제와의 약속을 위해서라도 난 너희를 어엿한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만들 생각이다. 물론 건강한 모습으로 말이야.”
“…하, 하지만 전 지금 아버지가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 건 참아 보거라. 하고 싶은 건 모든 조건이 갖춰진 후에 추구해도 늦지 않아.”
단호히 몸을 돌리는 마이언.
리안의 방을 나와 현관으로 향하던 그는, 마침 편지를 갖고 올라오던 시종과 마주쳤다.
“한동안 서신 확인을 할 수 없으니 집사에게 일임하지. 급한 서신은 전서구로 내게 보내.”
“알겠습니다, 백작님.”
“…크흠, 그런데 말야….”
그가 시종이 들고 있는 편지가 놓여진 쟁반을 힐끔 내려다봤다.
“키리아에게서 온 편지는… 이번에도 없는가?”
“…예. 분명 일이 순조로워 아주 바쁘신 탓일 겁니다.”
못마땅한 듯 마이언의 콧수염이 씰룩거렸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재개했다.
아무튼, 지금은 당장 집중해야 할 문제가 있었으니까.
‘북부 공작의 주치의.’
자신의 딸 키리아와 동명이인인, 신비한 인물.
‘신문에서 떠든 대로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면… 리안의 병에 대해서도 무언가 실마리를 줄지도 모른다.’
사업보다 그 대답을 듣기 위해 직접 북부까지 가기로 결정한 그였다.
모든 방법을 시도해도 차도가 없어 포기한 상태였던 리안의 병.
하지만 지금, 북부 공작의 주치의가 유일한 희망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정말 동명이인인가?’
아무래도 찜찜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º º º
슥―
누군가의 손이 반듯하게 정리된 서류철과 수상한 상자를 테이블 맞은편으로 부드럽게 밀었다.
가까이 온 서류철을 여유롭게 집어드는 남자.
바로 황태자 알렌스였다.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서류를 팔랑 넘기던 알렌스가 이윽고 더욱 짙은 미소를 띠었다.
“만족스럽군요.”
“감사합니다.”
롤스 추기경이 고개를 숙였다.
“전하의 지원이 없었더라면 힘들었을 겁니다.”
그도 그럴 게,
“다름 아닌 마계의 꽃을 개량하는 연구니까요.”
추기경의 눈빛에는 황태자의 의도를 가늠해보려는 듯한 의구심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알렌스는 대답 없이 미소만 짓고 있었고, 추기경은 익숙하게 제 궁금증을 덮었다.
어찌 됐든 자신의 이득만 확실하면 상관없는 일이었으니까.
“이 꽃의 억제된 마기를 해방하면 비로소 원하시던 진가가 드러날 겁니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점은, 마기를 해방하는 시점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
“전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순간에 말이지요.”
“그렇죠.”
알렌스가 한쪽 다리를 느긋하게 엇걸었다.
“내가 이 꽃으로 무엇을 할지 알고 싶은가요, 추기경?”
“…저는 그저 전하의 뜻을 따라가겠습니다.”
눈치 빠르게 추기경이 고개를 넙죽 숙였다.
신성력의 한계로 출세길이 막혔던 자신이 추기경의 자리에까지 오른 건 모두 알렌스 황태자 덕분이었다.
이 자리를 계속 지키기 위해 더러운 수를 써왔지만 들키지 않았던 것도 그 덕분.
황태자만 따라가면 앞으로 자신은 더욱 큰 보답을 손에 넣을 것이었다.
비록 최근에는 쥐새끼들이 퍼뜨린 소문 때문에 성가시기 짝이 없지만….
‘그것도 곧 끝날 것이다.’
추기경의 자리에 오른 뒤 그는 더러운 일에 익숙해졌다. 그게 간단하고 확실했으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기꺼이 그럴 셈이었다.
“그런데.”
상자 속 개량 꽃들을 확인한 알렌스가 상자를 닫으며 말했다.
“연구실은 정리 했나요?”
“아, 그건… 개량 꽃에 이상이 없는지 몇 차례 더 확인 실험을 해 본 후에 폐쇄할 생각입니다.”
“여태까지 잘 해왔으니 이번에도 잘하겠죠. 맡기겠습니다, 추기경. 하지만.”
순간 추기경은 알렌스의 눈웃음을 마주하고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연구 결과를 빼돌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겁니다. 아무리 탐나는 힘이더라도.”
“무, 물론입니다. 제가 어찌.”
테이블에 이마를 박을 정도로 납작 엎드린 추기경.
그래서 보지 못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알렌스가 마치 어리석음을 꿰뚫어본 듯한 비웃음을 머금고 있는 것을.
알렌스는 동행한 시종에게 서류와 상자를 챙기게 하며 일어섰다.
“그럼, 연회에서 뵙지요.”
“예, 전하. 그때 뵙겠습니다.”
알렌스가 떠난 후.
비로소 테이블에서 고개를 든 추기경은 흐흐 웃음을 흘렸다.
“빼돌리는 게 아니라 아주 잠시 빌리는 겁니다.”
그저 일이 잘못될 때를 대비한 보험으로 준비할 뿐이었다. 황태자에게 들킬 때를 대비한 변명도 준비했으니 괜찮았다.
어쨌든 공작의 생일 연회가 끝나면 자신이 처리해야 하는 건 모두 없앨 거니까.
연구소도, 독초 약제사도 말이다.
º º º
마침내 제논의 생일 연회가 열리는 날.
일찌감치 도착한 남부의 귀족들이 속속들이 성문을 통과해 들어오는 가운데….
“약제사님께서는 착의 중이십니다.”
“기다리지.”
제논은 키리아가 드레스로 갈아입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사실 이번에 키리아가 입을 드레스는 제논이 선물한 것이었다.
마주칠 때마다 짹짹거리며 잔소리하는 드워프들이 어찌나 지긋지긋하던지.
덕분에 제논은 키리아 한 사람만을 위한 편애적인 복지를 대폭 늘렸다.
하지만 제논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따로 있었다.
‘드워프들 때문에 키리아가 의기소침해하는 건 아닐까.’
자꾸만 꼴이 저게 뭐냐, 옷차림에 신경 좀 써 줘라 떠들었으니.
악의가 없는 건 알지만 키리아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제논은 드워프들에게 주의(“여기 계속 붙어있고 싶다면 좀 닥치는 게 좋겠군.”)를 주는 한편, 키리아가 상처받지 않았는지 유심히 살펴보기로 했다.
그런데….
‘…밖에서 기다릴 걸 그랬나.’
여기서 이러고 있자니 자꾸만 키리아가 사부작거리며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날 밤의 격렬한 키스도 떠오르고.
평소의 표정 없는 얼굴로, 제논은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무의식적이었다.
움찔.
그때 마물의 팔이 자극이라도 받은 듯 움찔거렸다.
“…….”
제논은 마물의 팔을 붙잡았다.
사실 키스 이후 키리아를 볼 때면 종종 이렇게 움찔거리는 일이 생겼다.
마물의 공격 본능은 아닌데… 왜지?
“준비가 끝났습니다.”
하녀의 말과 함께 드레스룸의 문이 열렸다.
키리아는 남색과 보랏빛이 어우러진, 여명을 연상하게 하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드레스 밑단에서부터 위로 올라갈수록 아주 작은 금빛 보석들이 총총히 돋보였다.
앞가슴의 브로치는 유려하게 세공된 생명석 아티팩트.
귀걸이 역시 생명석을 활용해 금색의 빛무리를 발하며 키리아의 얼굴을 별처럼 돋보이게 했다.
북부의 별.
그런 호칭이 절로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모두의 뇌리에 키리아의 존재를 똑똑히 새기고 싶은 제논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키리아?”
“네?”
“왜 가면을 쓰고 있습니까? 그 머리 색은 또 뭐고요.”
키리아는 금발로 염색을 한 데다, 가면무도회에 어울릴 법한 반가면을 쓰고 있었다.
키리아가 당황스레 웃었다.
“아하하… 그게… 오늘은 사람이 너무 많이 오니까… 얼굴을 보이기 부끄럽달까요.”
“얼굴을 보이기 부끄럽다고….”
제논은 미간이 좁아졌다.
“…그것들을 더 일찍 닥치게 했어야 했는데.”
“네?”
“아닙니다.”
제논이 키리아의 두 손을 부드럽게 모아 쥐었다.
“키리아. 이번 연회에서 단언컨대, 그대보다 내 시선을 끄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
저도 모르게 제논에게 잡힌 손에 힘이 들어가는 키리아.
‘가, 갑자기 왜 이런 멘트를?’
“아니.”
앞선 제 말을 나지막이 부정한 제논이 더욱 진중한 시선을 보내왔다.
“이번 연회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그의 입술이 다정한 연인처럼 키리아의 손가락에 닿았다.
“내게 있어 아름다운 사람은 오직 그대뿐이야.”
쿵.
키리아는 자신의 가슴이 걷잡을 수 없이 뛰는 걸 느꼈다.
자신의 손가락에서 천천히 떨어지는 제논의 직선적인 선홍빛 입술.
키리아는 저 입술의 감촉을 알고 있었다.
“…….”
정신이 멍해졌다.
이때 머릿속 한편으로 가상의 리안이 나타났다.
‘누나… 지금 남자에게 한눈팔 때야? 내가 죽어가는데?’
헉.
심장을 찌르는 죄책감!
덕분에 냉수를 맞은 듯 정신을 차린 키리아는 제논에게 받은 멘트를 그대로 되돌려줄 수 있었다.
“…큼큼! 영광이네요, 공작님. 저도 그래요.”
“음?”
키리아가 생글 웃었다.
“공작님도 제게 가장 아름다운 분이세요.”
말을 마친 키리아는 문가에서 자신을 부르는 가울을 발견했다.
키리아가 총총 제논을 지나쳐갔다.
그리고 멍하니 있던 제논은….
두근두근.
달아오른 얼굴로 꽉 눈을 감고 중얼거렸다.
“…진정해. 고백이 아니야. 아니란 말이다.”
그는 당장 키리아를 거칠게 돌려세울 듯 부릉부릉 시동을 걸어대는 마물의 팔을 꽉 붙들어야 했다.
º º º
방 밖으로 나온 키리아는 가울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정말 완벽한데?”
“당연하지. 이 몸은 귀족이라고.”
지금 가울은 추기경이 공작성에 심어 놓았던 첩자로 변신한 상태였다.
키리아와 가울의 눈이 악동처럼 빛났다.
“이번 연회에서 추기경을 제대로 사냥해 보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