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5화 (105/141)

105화

“누구냐!”

소리 없이 나타난 소년에게 한스와 부하들이 단도를 빼 들었다.

‘언제 나타난 거지?’

한스를 비롯한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한때 정보 길드의 정예들.

그런 자들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접근했다면 상당한 실력자가 분명했다.

하지만 소년은 공격 의사가 없다는 듯, 다소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가만히 서 있었다.

이윽고 한스가 물었다.

“정체가 뭐냐?”

“…….”

슥슥, 대답 대신 메모장에 글을 써서 보여주는 소년.

[루크. 중앙 신전의 성기사입니다.]

“성기사?”

한스가 가장 경계하던 이들이 성기사였기에 다들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루크가 재빨리 뒷말을 적었다.

[저 산을 조사하려는 거라면 내가 할 수 있어요.]

“널 어떻게 믿고?”

그러자 대답 대신 작은 약통을 꺼내 보여주는 루크.

의심에 가득 찼던 한스가 그걸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그건 키리아가 자주 쓰는 약통이었다.

[공작님의 약제사 키리아 님이 주신 화상치료약이에요. 그래도 못 믿겠다면, 공작님이나 약제사님께 직접 물어봐도 좋아요.]

“물론 그럴 거다.”

부하들이 루크를 포위한 걸 확인한 한스는 제논과 주고받는 전서구를 띄웠다.

전서구 중에서도 성능이 가장 좋은 녀석이라, 제논의 답변을 금방 가지고 왔다.

제논의 답변을 확인한 한스가 말했다.

“루크라고 했지. 우리가 널 어떻게 도우면 되지?”

음. 조금 머뭇거리던 루크가 대답했다.

[동생들이 개구멍을 알려줬어요.]

“개, 개구멍?”

[…그런 게 있어요.]

“그래. 어찌됐든 우리야 정보를 얻으면 되니까. 그런데 왜 성기사가 우릴 도우려는 거지? 우리가 공작의 사람인 걸 알고 접근했지?”

“…….”

후우. 루크는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처럼 짧은 심호흡을 했다.

이윽고 단단한 결심으로 대답했다.

[내가 도움이 된다면 내 동생들이 공작성과 가까운 마을에서 살도록 도와주세요.]

º º º

드워프들이 공작성 리모델링에 돌입한 지 몇 주가 지났다.

키리아는 리모델링이 끝난 공작성을 보며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이건 그야말로….

“…처, 천지창조?”

그랬다. 낡아빠진 고성은 몰라볼 정도로 뒤바뀌어 있었다.

이끼 낀 음침한 돌벽은 매끈하게 빛났고, 멋대가리 없던 창문과 성문 등은 고아한 장식들이 더해져 위엄이 있었다.

무엇보다 많이 바뀐 건 내부였다.

보는 것만으로도 발바닥에 한기가 올라오는 것 같았던 썰렁한 성이 왕궁 못지않게 화려해졌다.

“이 황금 조각상들은 못 보던 건데?”

“아가씨! 복도에 깔린 이 푸른 융단, 엄청 비싼 거 아니에요?”

“키, 키리아 양. 내 주방 도구들이 전부 최신식으로 바뀌었다우…!”

조앤과 앨마에 이어,

“내, 내 방이 생겼어. 마물들하고 분리된 나만의 방….”

흥분해서 손을 덜덜 떠는 가울,

“성의 보안 장치와 난방 시스템도 싹 바뀌었습니다. 맙소사, 돈이 너무 들어서 엄두도 못 내고 있던 건데….”

신을 영접한 듯 두 손을 모은 로하넨까지.

모두가 달라진 성의 모습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중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를 맞은 건 단연 키리아와 제논의 방이었다.

이제 키리아의 방은 연구실과 침실이 정확히 분리되어 전문적인 느낌이 났고, 제논의 침실은 황량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삐까번쩍 광내고, 꽉꽉 알차게 채워진 공작성.

요툰과 드워프들은 엣헴 헛기침을 했다.

“뭐, 별거 아니야. 우리 마을은 가진 게 금덩이뿐이라 그거 조금 썼어.”

“그래도 그렇지… 갑옷까지 주셨잖아요.”

드워프 마을에서 마물용 갑옷을 보내온 게 바로 며칠 전이었다.

그런데 또 이런 엄청난 선물을 받다니!

아무리 바지 사장이 장래희망에 공돈을 좋아하는 키리아지만, 이렇게 받기만 하니 양심에 찔렸다.

뭐라도 줄 게 없을까?

궁리하던 키리아는 아,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로하넨. 어제 치맥 가게들 정식 오픈했죠?”

“아, 아, 네! 그렇습니다. 공작령 전역에서 가맹점을 모집했고, 오랜 준비 끝에 바로 어제 동시 오픈을 했어요.”

마기 해독수도 계약한 상단을 통해 북부에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북부 공작령 곳곳은 들떠 있었다.

공작성과 가장 가까운 라데츠도 마찬가지.

키리아는 즉석에서 글을 쓴 메모지를 찢어 요툰에게 건넸다.

“이건 제 추천장이에요.”

“음?”

[키리아의 특별 쿠폰! 이 쿠폰을 가진 일행은 오늘 하루 치킨과 맥주, 마기 해독수까지 무제한! 대금은 공작성으로 청구해주세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요툰에게 키리아가 찡긋 장난스럽게 웃었다.

“내일이면 마을로 돌아가잖아요? 그 전에 라데츠에서 식도락은 즐기고 가세요.”

“뭐어….”

요툰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북부의 맥주는 김빠진 주스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치킨은 무슨 음식인지 모르겠고,

귀찮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키리아의 권유니까 요툰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 그래볼까.”

드워프들은 기대 없이 라데츠로 나들이를 나갔다.

그리고.

신세계를 경험했다.

“이, 이것이 치킨!?”

“맥주가 입안에서 시원하게 터진다! 제기럴, 내 입속에서 파도가 몰아치고 있다고!”

“치킨에 대파를 같이 먹는다고? 아니 대파가 왜 이리 맛있어!? 향긋하고 아삭한 대파가 고소한 닭고기와 캉캉춤을 추고 있어! 미친!”

드워프들의 걸걸한 난리법석.

그들은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었기에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모두가 볼 수 있었다.

라데츠 사람들이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보는 신선한 호들갑이군….’

치킨 입문자를 바라보는 고수의 눈빛들이었다.

가게 점원이자 한스의 막내딸 리사가 드워프들에게 생글생글 웃으며 설명했다.

“음식이 전부 맛있죠? 전부 약제사님의 마기 해독수 덕분이에요.”

“마기 해독수…?”

“네. 성수 대신 쓰는데, 음식의 맛을 하나도 해치지 않아요. 가격도 저렴해서 우리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해독수로 갈아탔죠.”

“우리 마을이 가장 빨랐어요.”

듣고 있던 다른 주민들이 끼어들었다.

“옆 마을들도 우릴 보고 차례차례 갈아타고 있지.”

“라데츠가 북부 유행의 선두주자랄까?”

하하하.

자부심에 찬 라데츠 사람들의 웃음소리였다.

요툰과 드워프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 대화의 흐름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그, 그러니까 그 약제사가 치료만 하는 게 아니라 성수를 대신할 약품까지 만들었다고? 그게 어떻게…?”

사실 라데츠를 방문한 관광객들이 가장 자주 하는 질문이었다.

그래서 라데츠 사람들은 익숙하게 대응했다. 품에서 잡지 한 권을 꺼냈다.

“자세한 건 이걸 보세요.”

“으응? <주간 마법>? 우린 이런 거 안 보는데.”

“아니, 그 안에 있는 소설이요. <마법학교의 아리키>.”

리사가 페이지를 펼쳐 소설의 삽화를 보여주었다.

키리아와 닮은 얼굴의 소녀 삽화였다.

“아리키가 우리 공작성 주치의님이거든요.”

이젠 다들 알아버린 사실이었다.

리사는 전도용으로 비치해 두었던 잡지를 더 꺼내 드워프들에게 한 권씩 주었고, 드워프들은 소설을

부터 정주행하기 시작했다.

몇 시간 후.

탁.

최신화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요툰이 고개를 하늘로 들었다.

이제 그는 마기 해독수의 효능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 덕에, 키리아가 준 쿠폰의 진가를 깨달았다.

마기 해독수 무제한.

“정말이지, 이 인간은….”

너무 착해서 내가 눈을 떼면 호구가 될까 봐 불안하다니까.

훗.

가볍게 웃은 요툰이 동료 드워프들에게 호탕하게 물었다.

“이보게들. 이 마을도 낡아 빠져서는 손볼 곳이 많지 않은가?”

“음…!”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는 드워프들!

“아무래도 내일 떠나는 건 미뤄야겠구만!”

“어쩔 수 없네!”

“어쩔 수 없어!”

일심동체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요툰과 드워프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새로운 작업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이것이 훗날, 그들이 공작성 식구로 눌러 살게 된 계기였다.

º º º

제논의 생일 연회가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더불어 키리아도 할 일을 착착 해나갔다.

“이걸로 포장 완료.”

VIP로 선발된 극소수 고위 신관들에게 보낼 제품의 포장이 이제 막 끝났다.

맞은편에 책상에 앉아 있던 로하넨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자신만의 집무실이 생겨 아직도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선발된 신관들은 믿을 수 있는 자들입니까?”

“네. 도움이 될 만한 인물들로 엄격히 선발했어요. 망고 바나나 주스를 바친 신관은 다 제외했고요.”

“망고 바나나…?”

“그런 게 있어요.”

키리아가 싱긋 웃었다.

“아무튼, 롤스 추기경에게 반대하는 인물이자 최대한 우리 쪽에 호의를 가진 인물로 추려봤어요.”

“그래서 극소수였군요. 그런데… 그렇게 적은 인원들이 저희에게 도움이 될까요?”

“이 사람들은 구심점이 될 거예요.”

“구심점이요?”

“VIP는 특별 권한을 갖거든요. 이름하여 친구 추천.”

VIP가 친구로 추천을 하면 그 사람은 보다 쉽게 VIP 멤버가 될 수 있는 이벤트.

많은 이들이 VIP에게 잘 보이려고 아주 노력할 것이다.

“VIP가 그중에서 올바른 사람들을 잘 골라서 추천해주겠죠. 추천한 사람이 사고라도 치면 본인에게도 페널티가 가니까요.”

이런 식으로 중앙 신전 내부에 공작가 우호 세력을 키우려는 속셈이었다.

추기경이 뒤로 하는 짓을 밝히더라도, 그게 효과적으로 물살을 타려면 아군이 필요했으니까.

“그래서 VIP에게 보내는 제품은 단순한 생명석이 아니라.”

키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로하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목깃 바로 아래에 작은 브로치를 달아주었다. 생명석 브로치였다.

“바로 이 공작가 오리지널 아티팩트예요.”

“오, 드디어 완성하셨군요?”

“히히. 네. 마기가 신관들과 드워프들에게 영향을 미친 걸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죠.”

“이 아티팩트가 무슨 역할을 하는데요?”

“그건―”

그때였다.

“…엉?”

키리아는 로하넨의 손에 들린 생일 연회 초대 명단에서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잘못 본 건가? 명단을 빼앗아 자세히 들여다봤다.

“로, 로하넨. 이거… 이 명단 뭐예요?”

“아, 명단이 제법 길죠? 익숙한 이름도 많을 테고요.”

로하넨이 안경을 고쳐 쓰며 뿌듯하게 웃었다.

“초대장을 보낸 남부 귀족들 중, 초대에 응한 손님들의 목록입니다.”

“뭐… 라고요?”

“놀랍죠? 그 많은 사람이 초대에 응했다니. 저도 정말 놀랐지 뭡니까. 분명 우리 주군의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싶은 것이겠지요.”

“허….”

하지만 키리아가 놀란 이유는 그때문이 아니었다.

명단을 들고 있는 키리아의 손가락 끝이 떨렸다.

왜냐면 그 명단에 적힌 이름 중에는.

[마이언 클로버필드 백작]

‘…왜 아버지, 아니, 백작님까지 있는 건데!’

에서 쇳독에 걸린 라이벌 잡포이를 치료해주셨죠!”

“투덜대는 잡포이에게 명대사도 날려주셨고요!”

“입닥쳐, 잡포이!”

하하하!

어리둥절한 드워프들을 제외하고, 금세 공감대를 형성하며 유쾌해진 사람들.

이들은 주로 작은 마을 사람들이었기에, 공작성 약제사보다는 아리키에 더 열광했다.

그러다 아리키의 실제 모델이라는 소문 속의 인물, 키리아가 나타나자 열광은 더 증폭됐다.

마치 소설 속 영웅이 현실로 나타난 듯했다. 아리키처럼 어떤 난관이든 극복해줄 것만 같았다.

“텃세 부리는 마물들을 물리쳤을 때처럼 우릴 구해주실 거죠?”

“어둠의 마법사가 연 사냥 대회에서 탈출했을 때처럼요!”

“거기 드워프들도 믿어봐. 이분, 아리키 님이라니까?”

아리키 팬들은 드워프들까지 챙기며 으쌰으쌰 단합했다.

“어머나….”

이 광경을 본 대신녀는 진심으로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제가 기력을 잃기 전에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대신녀의 존경 어린 시선까지 받게 된 키리아.

“…….”

왠지 창피하다….

‘에라.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쪽팔려버려!’

이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나가려면 말을 잘 듣게, 아주 똘똘 뭉쳐야 했으니까.

“…여러분, 절 믿습니까?”

“믿습니다!”

“정말로 믿습니까?”

“절대로 믿습니다!”

흡사 광신도의 외침.

키리아는 사이비 교주처럼 양팔을 옆으로 펼쳤다.

때마침 옷차림도 대놓고 북부의 별 컨셉의 드레스!

“저 아리키를 믿으세요. 그럼 탈출할 것입니다!”

“우와아!”

감옥 안은 그 어느 때보다 희망찬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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