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웬 꽃…?”
키리아는 제논의 발치에 있는 꽃 한 송이를 내려다봤다.
만지면 진득하게 묻어나올 것만 같은 검붉은색의 꽃.
더 자세히 보려고 쭈그려 앉으려는데 가방에서 환한 금빛이 새어나왔다.
“어? 꽃님이?”
키리아가 가방에서 신목의 가지를 꺼내자 꽃님이의 말소리가 머릿속으로 들려왔다.
신목의 가지는 꽃님이의 신체 일부이기에 이런 식으로 의식이 연결되어 있었다,
<위험해.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마.>
“위험하다니, 이게 뭔데?”
<익숙하게 기분 나뿐 기우니야…. 내게 자세히 보여조.>
“음, 이렇게…?”
키리아는 신목의 가지를 검붉은 꽃 가까이 쭉 뻗었다.
잠시 후 꽃님이가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이런….>
“뭔데 그래?”
꽃님이의 말은 가지를 잡고 있는 키리아에게만 들렸기에, 제논과 요툰은 궁금함을 참고 있었다.
꽃님이는 한숨을 쉬었다. 그 숨에 분노한 듯한 열기가 배어 있었다.
<이건 메두사꽃이야.>
하지만 메두사꽃을 루쿠스 산에서 없애고 다녔던 꽃님이가 바로 알아보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개량된 메두사꽃이야.>
º º º
마계초가 우거진 곳에 있자니 현기증이 느껴졌다.
그래서 키리아는 일단 자리를 옮긴 후 제논과 요툰에게 꽃님이의 말을 전해주었다.
“…개량된 메두사꽃이라.”
“메두사꽃이 대체 뭔데?”
요툰의 질문에 키리아가 대답했다.
“메두사꽃은 꽃가루로 사람을 돌로 변하게 만들어요. 마계의 꽃이죠.”
“뭣…! 그런 위험한 게 우리 마을에 있었다고!”
요툰이 기겁했다.
“납치범들이 몰래 심은 게 분명해! 빌어먹을 것들! 반드시 도끼로 쳐죽인다!”
무서운 소리를 하는 요툰.
하지만 그 납치범들은 이미 공작성 지하감옥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굶어 죽는 게 제논이 그들에게 내린 형벌이었으니까.
씩씩대는 요툰을 바라보던 키리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드워프 중 아무도 석화에 걸리진 않았죠?”
“…응? 그러고 보니 맞아. 몸이 돌로 변하는 증상은 한 번도 못 봤어.”
몸이 약해진 원인인 마계초를 알아낸 드워프들이었다.
그만큼 메두사꽃 가까이 접근했다는 건데, 아무도 석화를 겪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바로 그게 개량의 목적인 건가.”
석화보다는, 메두사꽃이 발산하는 마기로 마계초를 퍼뜨리는 것?
하지만 무언가 시원치 않은 답이라서 제논은 스스로 말한 직후 미간을 좁혔다.
키리아가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했다.
“그건… 부가적인 현상 아닐까요? 생각해보면, 루쿠스 숲에서 마계초를 많이 보진 못했어요. 공작님은요?”
“백작이 없앴을 가능성도 있지만, 나 역시 마계초를 이 정도로 많이 보진 못했습니다.”
“그럼 한 가지는 확실하네요.”
개량된 메두사꽃은 발산하는 더 짙은 마기를 지닌다는 점.
“그럼 석화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글쎄요… 드워프들에게 피해가 없는 걸 보면 마기를 높이는 대신 석화 능력이 약해진 걸까요?”
두 사람의 대화를 바쁘게 듣고 있던 요툰이 팔짱을 끼고 툭 던졌다.
“무슨 소린지 원. 그러니까 개량된 메두사 뭐시기를 여기 심은 게, 우리를 노예로 잡아가려고 그런 건가?”
“그 목적으로 심은 건 맞겠지만, 개량 자체의 목적은 여러분이 아닐 거예요.”
“으응?”
“왜냐면 그저 노예를 얻기 위해 메두사꽃을 개량하는 건 너무 위험부담이 크잖아요.”
그보다는 개량하다보니 알게 된 효과를 노예를 확보하는 데 썼다고 보는 게 자연스러웠다.
결국 메두사꽃을 개량한 진짜 목적은 오리무중.
‘일단 채취는 했지만….’
키리아는 개량 메두사꽃을 뿌리째 담아 놓은 상자를 내려다봤다.
메두사병의 치료에 활용할 수 있을까?
이미 몇 번이나 인위적으로 손이 더해진 꽃이니 기대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에휴.”
허탈한 마음에 키리아가 어깨를 늘어뜨렸을 때였다.
“반대로 생각해보십시오, 키리아.”
키리아의 실망을 짐작한 듯 제논이 말했다.
“반대로요?”
“원하는 성능을 얻기 위해 개량을 한다는 건 그만큼 자원이 확보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아?! 설마!”
키리아가 쳐졌던 고개를 퍼뜩 들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제논.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이걸 개량한 자는 메두사꽃을 충분히 갖고 있을 겁니다. 수십, 어쩌면 수백 송이.”
“……!”
키리아는 순간 아찔했다.
리안의 메두사병 치료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사태의 심각성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큰 것 같았다.
메두사꽃을 그 정도로 갖고 있으면서도 개량을 한다고? 누가? 왜?
‘…지금은 알 수 없어.’
키리아는 고개를 푸르르 저어 답을 내릴 수 없는 질문은 치워버렸다.
대신 제논이 내린 결론에 질문을 덧붙였다.
“그 정도의 군락을 갖고 있다면 분명 숨길 만한 장소가 필요하겠네요?”
“맞습니다.”
“혹시 공작령 어딘가에… 아니, 그건 아니겠네요.”
그럴 가능성은 낮다.
제논이 수시로 각 영주들에게 공문을 보내 수상한 꽃은 제거하거나 통제하도록 지시하고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공작령이 아닌 곳.
추기경을 생각하며 인상을 쓰던 키리아가 문득 깨달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 야산.”
북부 중앙 신전에서 출입을 통제한다는 야산이 있지 않던가!
“어쩐지 이상했어! 분명 거기에 뭔가 있다고요!”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맙소사….”
야산에 있을 메두사꽃들과 노예로 잡힌 사람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º º º
드워프 마을을 떠나기 전, 제논은 가울을 소환했다.
가울은 수십 마리의 마물들과 함께 나타났다.
“흐어억!”
그에 드워프들이 기겁하며 망치와 방패를 들고 전투 태세를 갖췄지만 가울은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흥.”
왕에게 인정받은 손등의 증표가 잘 보이도록 앞머리를 천천히 넘긴 가울.
그런 후 제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뭐든 하명하십시오, 왕.”
그 말에 드워프들은 꿀꺽, 침을 삼키며 긴장했다.
요툰도 마찬가지였다.
설마 마족과 마물들에게 우리 마을을 공격하라고 할까봐 걱정이 됐던 것이다.
은인으로 여겨도 인간 외부인에게 일말의 불안감이 남아 있던 드워프들.
그런 그들에게 제논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곳에 있는 마계초를 전부 먹어치워라.”
“저, 정말임? 왕 최고!”
마물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제각기 흩어졌다.
곳곳으로 가서 높이 자란 마계초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여기 마계초는 엄청 큼!”
드워프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건물이나 돌 틈새에 돋은 작은 마계초까지 전부 찾아내 먹어치웠다.
탁했던 드워프 마을의 공기가 점점 맑아졌다.
“어…?”
무기를 쥔 드워프들의 손에 맥이 탁 풀렸다.
키리아가 그들을 향해 싱긋 웃었다.
“이제 어지럽지 않을 거예요. 그래도 혹시 마계초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 마물들 몇 마리를 파견해드릴게요.”
“아니… 이런….”
요툰은 키리아와 제논을 잠시나마 의심했던 일이 무척 부끄러웠다. 얼굴이 벌개졌다.
“…그, 크흠. 원하는 대가가 뭐요?”
“대가요?”
우스운 말이라는 양 키리아가 피식거렸다.
어차피 공작성에는 인력이 충원 되어서 마물 몇 마리 자리를 비운다고 지장이 있진 않았다.
게다가 이렇게 드워프들을 건강하게 만들어줘야 이들이 마물용 갑옷을 더 빨리, 잘 만들어줄 게 아닌가?
“대가는 이미 받기로 했잖아요? 이 마물들에게 멋진 갑옷을 만들어주는 거 말예요.”
때마침, 키리아의 가방에서 슬그머니 황금빛이 새어나와 키리아를 비췄다.
키리아에게 성스러운 후광이 생겼다.
눈부신 그녀의 모습에 드워프들은 단추만 한 눈망울을 일렁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어쩜 이렇게 착해빠진 인간이 있는지.
요툰은 제 가슴을 쾅쾅 두드렸다.
“또! 또 그런 말 한다! 내가 인생 그렇게 살지 말라고 했는데!”
“에, 예?”
“받을 건 받아야지. 우리를 수치사로 다 죽여버릴 셈인가? 그런 거요?”
“아니… 왜 화내세요?”
“시끄럽고! 내가 드워프들을 좀 데리고 공작성으로 함께 가겠소!”
왠지 어색한 기분에 키리아는 뺨을 긁적였다.
“저도 처음엔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요, 많은 갑옷을 만들려면 이 마을의 설비를 이용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갑옷뿐만이 아니야. 직접 가야해.”
요툰의 눈빛이 심상치 않은 결의로 이글거렸다.
“그 낡아빠진 공작성을 아주 말끔하고 멀끔하게 뜯어고쳐 줄 테니까!”
“…잉?”
왜 갑자기?
키리아는 요툰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요툰은 씩씩거리며 순식간에 짐가방을 챙겨 나왔다.
그리고는 제논에게 소리쳤다.
“어서 출발하지! 그리고 공작, 자넨 돈 벌면 주치의 옷 좀 해주시고!”
“……?”
옷이 왜…?
제논은 눈썹을 찡그렸고, 키리아는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고 조금 시무룩해졌다.
“내 옷차림이 그렇게 이상한가…?”
º º º
어두운 밤.
철조망과 여러 명의 삼엄한 경비병들이 한 야산의 입구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쪽을 호시탐탐 지켜보는 한 남자.
“…좀처럼 틈이 안 보이는군.”
한스였다.
북부 중앙신전이 관리하는 야산.
며칠 전 그는 주군인 제논으로부터 그곳을 은밀히 조사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래서 부하들과 함께 왔는데 야산에 대한 정보는커녕 야산 안쪽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함부로 움직였다간 큰일이 나겠지.”
이미 한 번 신전 측에 정체를 들켰던 한스다.
이 탓에 움직임이 제한되어 일찍 한계가 왔다.
그나마 중앙 신전에서는 다른 놈들을 잡는 데 열심히라 다행이었다.
점점 더 커져가는 ‘독초 약제사와 일각수’ 소문의 발원자를 색출하려고 눈에 불을 켠 것이다.
키리아가 신전에서 활약한 일들이 소문과 합쳐지면서, 신전이 잘못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 커지고 있었으니까.
“이 이상 움직이는 건 위험한데, 움직이지 않으면 정보를 건질 수가 없겠어.”
감시가 삼엄하다 해도 분명 어딘가 허술한 곳 하나쯤은 있기 마련.
그것만 찾으면 좋을 텐데….
고민 끝에 한스는 결국 움직이기로 결정했다. 그가 부하들에게 말했다.
“만약 들키면… 최대한 주군에게는 피해가 가지 않게끔 처신한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았겠지.”
“…예!”
부하들이 비장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더, 더 좋은 방법이 있어요.”
말을 더듬는 한 소년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