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체, 체험판? 유료? 이제 와서?!”
뒤통수를 맞은 드워프의 눈이 땡그래졌다.
키리아는 말없이 검지와 엄지를 둥글게 만들며 씩 웃을 뿐이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
‘치료비, 입원비(?) 다 받아야지.’
뻔뻔한 그녀의 태도에 드워프가 외쳤다.
“이런 양아ㅊ…!”
그러나 문득, 그에게 섬광 같은 의문이 들었다.
이 여자는 정말 양아치인가?
드워프의 경계심은 생명석을 조물거리며 한결 누그러졌다.
덕분에 전보다 이성적으로 상황을 따져 볼 수 있었다.
이 여자는 인간이긴 하지만.
‘…나와 내 동료들의 은인이지.’
분명 납치범들에게 큰 부상을 입었는데, 누구 하나 목숨을 잃지도 않았고 몸도 아주 가뿐해졌다.
그것도 이 인간 약제사 덕분.
‘…그런데도 여태 제가 잘났다는 말 한 마디 없었다.’
지금 요구하는 것도 진귀해 보이는 생명석에 대한 대가이지, 치료비가 아니지 않은가.
그런 그녀에게 자신은 어땠던가.
납치범들과 같은 인간이라며 무례한 말을 내뱉지 않았던가.
정말 부끄러운 일이었다.
“…으음.”
드워프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존심이 센 만큼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존재가 바로 드워프다. 그들은 남들보다 염치를 잘 알았다.
‘따지고 보면 생명석은 오히려 이쪽에서 대가를 주고서라도 다루고 싶은 광물이야.’
대가를 요구하는 방식이 사기꾼 같아서 그렇지, 요구 자체는 지극히 정당했다.
“후우.”
드워프 대장은 한결 가벼워진 숨을 뱉었다.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화낼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래. 얼마를 원하는 거요?”
“엥.”
왜 갑자기 징그러울 정도로 다정하게 말하지?
키리아는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래도 어쨌든 원하는 바를 말했다. 드워프를 치료할 때부터 생각해두었던 것이었다.
“마물들의 갑옷을 만들어주세요.”
“마물들의… 갑옷?”
“네. 거창할 필요는 없고 흉갑 정도만 해도 충분해요.”
공작님을 따르는 마물들과 그렇지 않은 마물들을 구별하기 위한 방법.
바로 유니폼을 입히는 것이었다.
이왕이면 폼나게.
“하얗고 막 성스럽게. 기사 같이. 아시죠?”
유니폼이라고 하면 마물들은 불편하다며 안 입으려 들겠지만, 왕의 기사로 임명한다고 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앞다퉈 입겠지.
소속감과 책임감이 강해질 거다.
결국 갑옷을 만드는 건 내부의 결속을 더 다지는 일이기도 했다.
“사람의 갑옷과는 다르니, 드워프 정도의 솜씨여야 안심할 수 있겠더라고요.”
키리아의 설명에 드워프는 긴 탄식을 흘렸다.
“허어…. 인간이 아니라 하필 마물을 기사로 쓴다고. 이 성이 그렇게까지….”
형편이 어려운가?
드워프는 뒷말을 꿀꺽 삼켰다.
그는 새삼 방을 둘러봤다.
고성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오래된 티가 팍팍 나는 돌벽.
기품있긴 하지만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가구들.
무엇보다….
드워프는 키리아의 옷차림을 바라봤다.
예쁜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다소 후줄근한 원피스. 어디서 물이라도 들었는지 치마가 얼룩덜룩했다.
머리 모양은 또 어떤가.
아름다운 장신구를 꽂아야 할 머리를 대충 둥글게 틀어올리고 있었다.
드워프들의 생명의 은인이 이런 꼴을 하고 있다니.
가슴이 아팠다.
‘우리조차 탐낼 정도로 귀중한 광물을 갖고 있으면서 꼴이 저게 뭐야. 바보 같은 인간! 치료비부터 청구했어야지!’
드워프 대장은 자신의 가슴을 퉁퉁 두드렸다.
그런데 이어진 키리아의 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갑옷을 만드시는 동안은 여기 머무르세요. 다른 드워프 분들도 모두. 몸 상태는 제가 수시로 봐드릴 테니까.”
“허! 제정신인가?”
“네?”
“지금 대가를 요구하는 와중에 우리를 계속 돌봐준다고?”
사람이 얼마나 착해빠진 거야!
드워프 대장은 씩씩거렸다.
그 모습에 키리아는 “어….” 뜸 들이며 눈치를 살폈다.
‘뭐지? 설마 들켰나?’
갑옷을 제대로 완성하기 전엔 성에서 나갈 생각도, 아프다고 누울 생각도 하지 말라는 의도였는데.
키리아가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 태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드워프 대장이 다시 제 가슴을 두드렸다.
“도저히 안 되겠군!”
비장한 표정으로 그가 의자에서 폴짝 내려왔다.
“당장 우리 마을로 가자고. 마을의 모두가 나서면 이 성에 있는 마물 수의 두 배, 아니 세 배로 갑옷을 만들어줄 테니까.”
“드워프들은 외부인을 마을에 들이지 않잖아요?”
“그런 건 신경 쓰지 마!”
어째선지 버럭 화냈다.
키리아는 드워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생명석은 이쪽에서 전부 지원할게요. 남는 건 가지세요.”
부스러기 회수하기도 귀찮으니까.
“아니아니, 제발 좀 공짜로 주지 마!”
“…예?”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려고 그래! 돈 받아. 받을 건 받아야지!”
그러고 있는데요….
드워프 대장의 박력에 키리아는 쪼그라들었다.
그렇게 드워프 대장의 강력한 요구로, 키리아와 제논은 드워프 마을로 향하게 되었다.
º º º
드워프 대장의 이름은 요툰이었다.
키리아는 요툰과 그 일행을 따라 보통 사람은 발견할 수 없이 외진 곳에 있는 드워프 마을에 발을 디뎠다.
과연 광물을 다루는 종족답게 암석 곳곳에 집이 있었다.
요툰과 드워프들을 본 마을의 다른 드워프들이 달려나왔다.
“요툰 장로! 무사하셨구먼!”
“납치당한 사람들이 돌아왔어!”
금새 마을의 드워프들이 키리아 일행을 둘러쌌다.
“그런데 저 인간들은 누구야?”
“납치범들을 잡아온 거요? 고문이라면 내가…!”
“아니, 아니야!”
요툰은 한 걸음 옆으로 비키며 키리아와 제논을 모두에게 소개했다.
“이 사람들이 잔악무도한 인간들에게서 우릴 구해줬다. 은인이야.”
고집불통 요툰이 은인이라고 강하게 단언할 정도라면 다른 설명이 필요 없었다.
마을 드워프들은 언제 노려봤냐는 듯 호의적인 미소를 띠었다.
“그러면 우리도 보답을 해야겠군.”
“그렇지. 그러려고 데려온 참이야. 마물들에게 입힐 흉갑을 만들어주려고.”
“마물들에게…?”
의아해하는 드워프들에게 요툰이 무어라 속닥거렸다.
대체 뭐라고 한 건지, 속닥거림을 들은 드워프들의 안색이 시시각각 달라지더니 마지막엔 일제히 측은함을 띠었다.
“인간의 공작은 부자인 줄 알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자기 주치의 의식주는 잘 좀 챙기지 참.”
“……?”
영문을 모르는 제논은 불쾌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드워프들이 키리아에게 다정스럽게 말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들어가시오.”
“그래요. 인간의 얇은 다리로 여기까지 오는 것도 고생이었겠군.”
키리아와 제논은 드워프들에게 등을 떠밀려 요툰의 집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키리아가 제논에게 속닥거렸다.
“드워프들 말투가 원래 이렇게 징그러워요?”
“내가 제공하는 의식주가 부실합니까?”
의문만 깊어졌다.
잠시 후, 키리아는 요툰의 집에서 물 한 잔을 대접받았다.
“미안하군. 집이 한바탕 뒤집어진 바람에 차가 없어.”
“괜찮아요.”
요툰의 말대로 그의 집은 엉망이었다. 그가 납치범들과 집안에서까지 싸움을 벌였던 탓이다.
“마물용 갑옷은 도면이 만들어지는 대로 작업할 생각이야.”
요툰이 말했다. 그의 명으로 다른 드워프들이 이미 작업실로 들어가 도면 작업을 시작한 참이었다.
그때 잠자코 있던 제논이 입을 열었다.
“마을 드워프들은 대부분 싸움을 할 줄 아는 모양이던데.”
“맞아. 우리 마을 녀석들은 강한 편이지.”
“그런데 납치범들이 어떻게 이만큼 헤집어놓을 수 있었던 건가?”
“…끄응, 그래. 좋은 질문이야….”
요툰은 대답하기 싫은 듯 망설였지만 이내 한숨을 푹 쉬고는 털어놓았다.
“은인에게 말 못할 일은 아니지. 사실은 납치범들이 들이닥치기 며칠 전부터 우리 마을 놈들의 상태가 안 좋았어. 나도 그랬고.”
“어떻게 안 좋았는데요?”
키리아가 물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는데 어째 점점 숨쉬기가 힘들어지더니 어지럽지 뭔가. 다행히 원인을 알아냈긴 했지만, 해결하기도 전에 납치범들이 마을로 들이닥치는 바람에….”
요툰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키리아는 그의 시선을 따라갔다.
곳곳이 부서진 마을과 아직까지도 다소 비틀거리는 드워프들이 보였다.
키리아는 다시 요툰에게 시선을 돌렸다.
“원인을 알아냈다고 했죠? 원인이 뭐였는데요?”
“마계초.”
“……?!”
여긴 숲도 초원도 아닌 암석지댄데?
마계초는 마기를 발산하는 마계의 풀로, 마물들이 좋아하는 식물이다.
공작성 인근에 많아서 키리아에겐 익숙하기도 했다.
이번엔 제논이 물었다.
“이 근방에 마물들이 둥지라도 틀었나?”
마계초는 마물을 끌어들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마기가 짙으면 마계초가 생겨난다.
가울이 키리아를 쫓아내려 했을 때 마계초를 하루아침에 증식시킨 것처럼 말이다.
요툰이 고개를 저었다.
“온통 바위와 돌뿐인 곳에 터를 잡을 마물이 얼마나 되겠어? 있다 해도 우리가 용납할 리 없지. 그런데….”
요툰이 눈가를 찡그렸다.
“마을 근처에 갑자기 풀들이 자란 거지. 그게 마계초였고.”
키리아와 제논의 시선이 마주쳤다.
무언가 있다.
누군가가 드워프들을 노리고 마계초를 일부러 퍼뜨린 것이다.
‘아마 추기경이겠지.’
하지만 추기경은 신성력을 다루는 신관이다.
마기를 퍼뜨렸던 가울과는 정반대의 속성인데.
‘대체 무슨 수를 쓴 거지?’
불안감이 등줄기를 훑는 것을 느끼며, 키리아는 들고 있던 잔을 탁 내려놓았다.
“요툰 씨. 마계초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세요. 지금 바로요.”
º º º
키리아와 제논은 요툰을 따라 돌산을 올랐다.
“여기요.”
마침내 요툰이 마계초가 높이 자란 곳 앞에서 멈췄다.
키리아는 당황했다.
“이게 정말 마계초라고요?”
키리아가 아는 마계초는 일반적인 잡초 크기였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것들은 거의 갈대 수준이었다.
“…마기를 발산하는군요. 크기는 다르지만 마계초가 확실합니다.”
말한 제논이 풀을 헤집으며 앞서갔다. 키리아가 뒤를 따랐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 때.
“키리아. 이걸 보십시오.”
“아, 금방 갈게요!”
키리아는 제논이 가리킨 곳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의 가방 안에 있는 신목의 가지가 들썩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