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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102/141)

102화

마차의 숨겨진 공간은 높이가 낮았다.

그런 곳에 사람들이 짐짝처럼 몸을 구부리고 얼기설기 얽혀 있었다.

서로 빈틈을 채우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으으….”

그중에는 이미 의식이 흐려진 자들도 많았다.

제논의 목소리에 분노가 서렸다.

“…불법 노예군.”

제국에서 노예매매는 불법이다. 만약 관여했다가 걸리면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런데 제논이 분노한 이유는 한 가지 더 있었다.

키리아는 보고도 믿기지 않는 듯 탄식했다.

“…드워프들이에요.”

숨겨져 있던 노예들의 반 이상이 드워프였다.

타고난 대장장이인 드워프는 고집스러운 성격만큼이나 다른 종족과 잘 교류하지 않는다.

심지어 같은 드워프 마을이라도 특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니 소문을 키우지 않는 납치 대상으로 적합했을 것이다.

“…이런 짓을 얼마나 해왔던 걸까요?”

“…….”

고개를 저은 제논은 구겨진 이들을 한 명씩 꺼냈다.

키리아는 그들을 한 명씩 살펴보며 돌봤다.

특히 드워프들의 상태는 심각해, 응급처치 후 공작성으로 데려가야 할 성싶었다.

‘저 괴한들의 무기에 묻어 있던 피가 이들의 것이었어.’

못된 자식들.

키리아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이때 드워프들을 살펴보던 제논이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하군요.”

“네? 뭐가요?”

“이 드워프들의 몸은 단련되어 있습니다. 드워프 중에서도 싸울 줄 아는 전사일 가능성이 큽니다.”

드워프는 망치나 도끼를 다루는 전사로서도 유명한 종족이었다.

“저 괴한, 그러니까 납치범들하고 싸우다가 끌려온 걸까요?”

“그게 이상합니다. 저 자들은 드워프 전사와 맞붙을 정도로 강하진 않았으니까요.”

“그럼.”

키리아는 그다지 이상할 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정공법이 아니라 뭔가 야비한 수를 썼나 보죠. …아.”

스스로 한 말에 무언가 깨닫는 바가 있었다.

이 납치범들은 특출나게 강하지도 않고, 특별한 물건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드워프 전사들을 무력화시켰다는 건 싸움에 능한 드워프들도 예상 못한 수를 썼다는 뜻이다.

“그 야비한 수는 추기경이 낸 걸까요?”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만약 증거가 남아 있다면 이종족 불법 납치로 잡아넣을 수 있겠네요!”

그러려면 우선 이 드워프들의 말을 들어봐야 했다.

생색낼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잡혀가던 걸 구해줬으니 고마워하겠지?

드워프들은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히힛.

º º º

응, 아냐.

“인간은 못 믿는다!”

가장 덩치가 큰 드워프가 이렇게 외치자, 다른 드워프들도 입을 딱 다물어 버렸다.

키리아의 접객용 미소가 꿈틀거렸다.

이 드워프들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마물들을 보고는 난동을 피웠다.

하는 수 없이 가울과 켈베로스가 그들을 물리적으로 설득하고 나서야 진정했다.

「인간과 마물이 같이 일한다고?」

「말도 안 돼.」

드워프들은 인간과 마물이 함께 어울리는 공작성이 별천지라도 되는 양 연신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긍정적인 기색은 아니었다.

대장으로 보이는 드워프가 이렇게 말했으니까.

「인간이 아니라 마물의 손을 빌리다니, 여기 인간들은 간도 쓸개도 없나? 정말 웃기는군!」

그 말을 지금 다시 떠올리며 키리아는 생각했다.

드워프들이 다른 종족과 교류가 없는 건… 아마 따돌림당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드워프 대장이 키리아를 잔뜩 경계했다.

“우릴 무슨 속셈으로 여기 데려온 것이냐? 그 인간놈들처럼 우릴 어딘가로 팔아치우려고?”

“아니요.”

“인간의 말을 어떻게 믿어!”

뭐 어쩌라는 건지?

키리아는 이마에 튀어나오려는 혈관을 애써 꾹 눌렀다.

“…안 믿으셔도 괜찮으니까 그냥 당시 상황만 말씀해주세요. 여러분 같은 전사가 어째서 그 괴한들에게 당했던 건지 말예요.”

“…….”

드워프 대장의 입술이 씰룩였다.

하도 억울한 일을 당해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어 못 견디는, 그런 씰룩임이었다.

하지만 드워프의 자존심은 셌다.

드워프 대장은 고개를 팽 돌려버렸다.

“인간에게 말해줄 의무는 없어.”

‘아오, 저 할방탱구가!’

기절할 때까지 웃도록 간지럼 독약이라도 뿌려버려?

하지만 참았다.

‘어찌 보면 당연하니까.’

안 그래도 배타적인 종족이 인간에게 큰일을 당할 뻔했다.

그러니 인간이라면 무조건 의심하게 된 것이리라.

그래서 키리아는 노인공경의 마음으로 일단 웃었다.

“에이, 어떻게 된 건지 말씀해주세요.”

“싫어.”

“그러지 마시고.”

“싫어.”

“그럼 됐어요.”

“싫… 응? 돼, 됐어?”

언제 매달렸냐는 듯 깔끔하게 물러난 키리아.

‘아무래도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때까진 내버려 두자.’

키리아의 갑작스런 태세 전환에 드워프 대장이 당황스러워했다.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말 됐어?”

“네. 안 그래도 제가 좀 바빠서.”

때마침 조앤이 상자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아가씨. 수도에서 생명석이 왔어요.”

“오, 드디어 왔네.”

사냥대회 이후 신목들이 생성하는 생명석은 모두 키리아의 차지가 됐다.

공작령의 특산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소유주는 키리아인 셈이다.

하지만 키리아 혼자서는 생명석을 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그래서 공작인 제논과 수익을 나누는 대신, 그의 이름으로 인력을 차출해 주기적으로 신목에게 마기 해독수를 투여하고 생명석을 채취할 이들을 고용했다.

채취한 생명석의 해독과 가공, 판매에 필요한 모든 과정도 맡겼다.

그리하여 지금, 상품화된 첫 생명석이 도착한 거였다.

키리아가 상자를 열자 녹색 광채가 쏟아졌다.

타원형으로 매끄럽게 가공된 투명한 녹색 수정들이 보였다.

내부에 반짝이는 황금빛이 매력적이라, 보석으로 장식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가씨. 그런데 생명석은 약의 재료로 사용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응. 그러긴 할 건데 원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지금도 고위 신관들이 VIP가 되기 위해 은밀한 러브콜을 보내고 있었다.

심지어 그 기세가 줄어들긴커녕 더 늘어나는 중이었다.

정보를 뒤늦게 접한 다른 신관들까지 가세해, 신관들끼리 경쟁이 불붙은 탓이다.

“그리고 가공하지 않은 생명석은?”

“물론 가져왔죠.”

“좋아.”

키리아는 조앤과 함께 생명석을 갖고 걸음을 옮겼다.

덩그러니 남겨진 드워프들은 작은 눈을 끔뻑였다.

그들은 방금 얼핏 본 녹색 광물의 정체에 대해 수군대기 시작했다.

“방금 그건 뭐였지? 그런 빛깔을 가진 광물은 본 적이 없는데.”

“말도 안 돼. 우리가 모르는 광물이 있었다고?”

다들 흥분해서 콧구멍이 벌름거렸다.

그중 가장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소유자는 바로 대장 드워프였다.

º º º

“…아가씨.”

“응?”

“저, 저 털북숭이가 우릴 따라와요.”

조앤의 속닥임에 키리아는 뒤를 힐끔 돌아봤다.

대장 드워프가 제 두꺼운 요리조리 숨겨가며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인간을 미행해서 자존심 상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생명석 상자를 볼 때는 아이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이 됐다.

“내버려 둬.”

“네…. 저렇게 보면 참 착해 보이는데, 인간을 싫어한다니 아쉽네요.”

“뭐가?”

조앤이 힝, 입맛을 다셨다.

“드워프는 건축에도 엄청 뛰어나다면서요. 아가씨가 목숨을 구해줬으니 고맙다면서 이 성을 멋지게 손봐줄 거라고 기대했거든요.”

“아….”

그건 키리아도 아까웠다.

“어쩌겠어. 이 상태로는 뭘 요구하면 이미지만 더 나빠지겠는데.”

“그렇죠. 앨마 님도 기대하던데… 아쉽네요.”

자신의 연구실에 도착한 키리아는 생명석 상자와 독초 상자를 열었다.

공작성에서 출시할 아티팩트를 위한 연구였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볼게요, 아가씨. 조, 조심하시고요.”

“응. 가봐.”

끼익….

조앤이 닫고 나갔던 문이 슬그머니 열렸다.

문틈으로 빼꼼 고개를 내민 드워프가 보였지만 키리아는 모른 척했다.

드워프 대장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아니, 저 신기한 돌과 독초로 뭘 하려는 거지?”

…다 들리긴 하는데 일단은 혼잣말 같아서 무시했다.

쾅쾅. 키리아는 생명석을 망치로 잘게 깨부쉈다.

“허억! 저, 저걸 저렇게 무식하게! 내가 처음 보는 돌이라면 분명 귀중한 것일 터인데!”

무시.

“아깝다, 아까워. 나라면 더 알뜰하게 쓸 텐데….”

무시.

“내가 더 잘 다룰 수 있는데…. 분명 신비한 힘이 느껴지는데….”

무시….

키리아는 새침한 얼굴로, 부서진 생명석 조각들을 아예 가루를 내어 독초 배합 용액에 넣고 휘저었다.

거기에 기타 재료도 적절히 첨가했다.

“저렇게만 쓰면 너무 아까운데… 인간은 광물의 힘을 온전히 끌어내지 못하던데….”

“…….”

눈을 위로 한 바퀴 굴린 키리아가 마침내 드워프 쪽으로 고개를 휙 돌렸다.

“해 보실래요?”

“어. 어!? 내가 여깄는 걸 어떻게 알았지!?”

“놀랍게도 제겐 눈과 귀가 있답니다.”

“…크흠!”

“보아하니 관심이 많으신 것 같은데, 이쪽으로 와서 한번 해보세요.”

드워프는 팽 고개를 돌렸다.

“인간을 믿을 줄 알고!”

“그러지 마시고 해보세요.”

“싫어.”

“에이, 빨리 오세요.”

“싫어.”

“그럼 됐어요.”

“돼, 됐다고?”

“밀면 밀려나는 사람이라, 제가.”

키리아는 당황한 드워프 앞에서 어쩔 수 없다는 듯 문을 탁 닫아버렸다.

아니, 닫으려 했다.

“자, 잠깐!”

드워프가 뭉툭한 손으로 문을 붙잡았다.

“참 성질 급한 인간이군 그래! 왜 그렇게 포기가 빨라?”

“안 한다면서요?”

“…그, 그러니까 인간은 믿을 수 없지만 광물은 인간이 아니잖아? 저 광물 정체가 뭐야?”

키리아는 문을 다시 열어주었다.

“생명석이라고 해요. 신목에게서 나온 특수한 돌이죠.”

“신목에게서…!? 과연, 그래서 내가 몰랐던 거군.”

“한번 다루게 해드릴까요?”

다루게 해 줘?

거드름이 느껴지는 키리아의 말에 자존심 강한 드워프의 기분이 상했다.

그렇지만….

“…크흠! 그, 그럼… 더 거절하기도 뭣하니 내 솜씨 좀 보여줄까?”

광석에 대한 열정은 자존심을 압도했다.

그리하여 키리아는 드워프 대장을 자신의 의자에 앉혔다.

‘다리가 바닥에 안 닿네.’

드워프는 연신 생명석을 요리조리 조물딱거리며 탄성을 터뜨렸다.

“오오!”

“허어, 이런!”

“하하하, 신기하군, 아주 멋있어!”

그때마다 신이 난 듯 허공에 뜬 두 다리가 파닥거렸다.

어찌나 기분이 좋아졌는지 키리아의 팔을 호들갑스럽게 두드리기까지 했다.

“이거, 이거! 이걸 봐! 불의 온도가 높지 않은데도 마치 엿가락처럼 늘어지잖아! 고온이라도 액체로 변하진 않을 것 같은데, 궁금하지 않아? 궁금하지?”

“와, 대박. 그럼 뭐든 만들 수 있어요?”

“있고말고! 이거 참, 손이 근질거리는군!”

“어머, 그래요?”

슥.

키리아가 드워프의 손에서 생명석을 가져갔다.

“어어…?”

어리둥절한 얼굴의 드워프에게, 키리아가 접객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체험판 끝났어요.”

“어?”

“지금부터는 유료세요, 고객님.”

키리아는 생각했다.

‘상대가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면.’

뜯어내면 그만 아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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