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운반 날짜라는군요.”
제논도 궁금한 듯 조금 골똘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자세히 묻기 전에 자결해버리는 바람에, 뭘 운반하는 건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우리에게 유의미한 것이겠죠.”
“…저랑 공작님을 노린 배후의 꼬투리를 잡을 수 있다는 말이군요?”
키리아의 눈이 반짝였다.
“이렇게 비밀스럽게 정보를 주고받을 정도라면 분명 떳떳한 물건은 아닐 테니까요.”
“내 생각도 그렇습니다. ‘운반물’을 손에 넣는다면 신전의 약점을 쥘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러면 직접 이 시간에 해당 장소에 가봐야겠네요. 물론, 저도.”
“안 됩니다.”
제논이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요. 위험합니다. 그대는 여기 있으십시오.”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미 예상했던 키리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준비했던 질문을 비수처럼 던졌다.
“왜요? 지켜주실 자신이 없으세요?”
“……!”
흥흥, 키리아는 얄미운 콧소리를 냈다.
“자신이 없으시구나아. 이번 일로 자신감을 잃으신 거구나아.”
“아닙니다.”
“그럼 그동안 수련을 게을리 하셨군요?”
“그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공작님이 절 못 지켜준다면 전 누굴 믿고 여기 붙어 있어야 하나요? 여기 공작님보다 강한 사람이 누가 있는데요? 저한테 과연 안전한 곳이 있는 거예요?”
“…….”
제논이 소리 없는 한숨을 쉬며 제 얼굴을 손으로 덮었다.
처음이었다.
말로 후드려 맞는 기분은.
반박할 수도 없는 게, 암살자의 습격은 공작성 안에서 일어나지 않았던가.
결국 제논이 항복했다.
“알겠습니다. 나 역시 그대가 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야 안심이 되니까.”
“히히. 그렇게 나오셔야죠.”
“대신 내 옆에만 있는 겁니다.”
“제가 공작님 옆 아니면 어딜 가겠어요?”
키리아는 한쪽 눈을 찡긋했다.
“…….”
제논의 귓바퀴가 조금 붉어졌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방을 나가기 위해 문고리를 돌렸다.
그러다 나가기 직전 머뭇거렸다.
“…키리아. 예전의 난….”
“네?”
키리아의 귀에 더욱 분명해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전의 난 누군가 다치지 않으려면 거리를 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로부터 보호해야 하니까.”
“…….”
“하지만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습니다. 난 여전히 누군가를 지킬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공작님….”
“그걸 알려준 건 그대야.”
제논이 키리아를 돌아봤다.
“그대가 있으면 난 위험하지 않아.”
웃음기도, 홍조도 없는 진심을 다하는 얼굴.
“나 스스로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내 사람에게 상처를 내는 것이라면 비늘 하나까지 내 몸에 남겨두지 않을 겁니다.”
“저도 도울―”
“그래야.”
순간, 제논의 붉은 눈이 키리아에게 무언가를 예고하듯 예리함을 띠었다.
“다음엔 놓치지 않을 테니까.”
“네…? 뭐, 뭘요…?”
“쉬십시오.”
제 할 말만 하고 나가버리는 제논이었다.
키리아는 소름이 돋은 자신의 양팔을 문질렀다.
“뭐야. 왜 뒷골이 서늘한 건데….”
공작님은 참, 포커페이스일 때와는 다른 의미로 속을 알 수 없는 건 한결같네.
“루크랑은 비슷하면서 다른 타입이란 말이지… 그러고 보니 잘 있으려나?”
신전에서 만난, 얼굴에 화상이 있는 소년 루크.
루크 덕분에 마족으로 변한 공작님을 빨리 발견할 수 있었다.
“별일 없겠지…?”
추기경에게 꼬투리를 잡힐 일은 남겨두지 않은 것 같지만 그래도 걱정이 됐다. 일각수도.
부디 추기경한테 괴롭힘당하지 않길 바랐다.
사실 키리아의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앙 신전에서는 어디선가 자꾸만 퍼지는 ‘독초 약제사와 일각수’ 소문 때문에 곤혹을 겪고 있었으니까.
‘일각수가 헌신하는 성녀가 나타났는데, 바로 독초 약제사래!’
중앙 신전의 누군가가 더 열받아 하는 사실은, 성기사와 고위 신관들이 이 소문을 그다지 적극적으로 막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º º º
“먀먀. 먀먀아, 먀마아먀.”
용을 닮은 하얗고 작은 녀석이 키리아의 뺨에 제 뺨을 연신 비벼댔다.
변종 포이즌 리저드인 알비였다.
알비는 키리아가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반가워 어쩔 줄 모르며 계속 치댔다.
그동안 키리아를 보기 위해 공작성을 얼마나 드나들었던가.
수많은 허탕의 나날들이 알비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먀먀, 먀아아먀.”
자신은 한창 사랑이 필요한 n개월이라고 주장하며 키리아의 뺨을 사탕마냥 핥아대는 알비.
키리아는 체념한 얼굴로 뺨이 축축해지는 것을 견뎠다.
“그래… 소리 내지 말고 그냥 조용히 핥아.”
왜냐면 지금, 키리아는 제논과 델닛 삼거리에서 매복 중이었으니까.
“먀아아 먀먀.”
“알비, 쉿!”
“쉬이이이!”
키리아의 안면에 침이 튈 정도로 우렁찬 쉿이었다.
‘알비, 양치 했나…?’
입술을 꾹 다문 키리아 대신, 제논이 알비에게 냉정하게 말했다.
“입 다물어라.”
“쉿.”
제논에게는 얄짤없이 뱀눈을 뜨는 알비.
그때였다.
“으, 으악!”
쿠당탕!
삼거리로 오던 마차 한 대가 갑자기 나타난 마물에게 습격을 당했다.
고블린 한 무리가 마차를 넘어뜨리고 짐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다른 마차들은 저 멀리 얼른 도망갔다.
이곳은 도시와 마을을 잇는 길목이라, 물자를 노린 마물의 습격이 심심찮게 있는 곳이었다.
“…….”
미간을 찌푸린 제논은 삼거리를 내려다보던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키리아도 제논을 뒤따르려 했다.
“알비, 우리도 가자.”
“먀먀!”
알비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키리아의 뒷덜미를 앙증맞은 손으로 잡고 파닥파닥 날갯짓을 했다.
덕분에 키리아는 천천히 나무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응?”
키리아는 뒤늦게 나타난 다른 고블린 무리를 발견했다.
놈들은 동료들이 붙잡은 사냥감에 합세할 듯하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었다.
넘어진 마차가 아니라, 도망가는 승합 마차를 뒤쫓기 시작한 것이다.
“뭐지?”
이상했지만 저대로 두면 승객들이 다칠 건 뻔한 일. 빨리 고블린들을 패버려야 했다.
물론 내가 아니라 알비가!
“가라, 알비!”
“먀!”
알비가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마차 승객들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빼앗던 고블린들이 휙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알비가 입을 쩍 벌렸고 녀석들의 안면에 끈적한 독액이 철썩 달라붙었다.
독액은 고블린들의 피부를 녹이기 시작했다.
“키르르륵!”
“크르륵!”
알비가 애시드 브레스로 고블린들을 휩쓸었다.
브레스라기엔 앙증맞지만, 지독한 산성액은 무시무시했다. 주변의 풀들까지 녹아내렸다.
결국 고블린들은 우르르 몰려왔던 것처럼 우르르 꽁무니를 뺐다.
“알비, 대단해!”
진심으로 감탄한 키리아는 짝짝 박수를 쳤다.
“아름다운 독액이었어!”
“먀히히.”
알비가 쑥쓰러워하며 꼬리를 비틀어댔다.
그런 알비를 쓰다듬어준 키리아는 승합 마차 가까이 다가갔다.
“다들 괜찮으세요?”
“그게….”
얼떨떨해하는 승객들이 키리아와 알비를 번갈아 보았다.
키리아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아이는 여러분을 공격하지 않으니까요. 공작님의 마물이에요.”
그 말에 알비가 키리아를 못마땅하게 쳐다봤지만, 키리아는 무시했다.
승객들이 안심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아, 공작님의…! 감사합니다. 덕분에 저희 모두 무사합니다.”
“다행이네요. 여기, 떨어졌던 짐이요.”
키리아는 고블린들이 바닥으로 팽개친 승객의 짐가방을 주웠다.
“헉.”
그런데 가벼울 줄 알았던 짐이 의외로 무거웠다.
‘뭐야, 쇳덩이라도 들었나?’
키리아의 의문에 답하듯 짐가방이 흔들리면서 캉, 작은 금속성을 냈다.
“먀?”
긴 목을 갸웃한 알비가 짐가방에 코를 대고 킁킁거렸다.
“제 겁니다.”
승객 한 명이 짐가방을 재빨리 가져갔다.
키리아가 두 손으로 겨우 든 걸 그녀는 한 손으로 가뿐히 들었다.
승객들이 짐을 되찾은 것을 확인한 마부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마차 시간에 맞추어야 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고는 마부석으로 돌아가 마차를 출발시키려 했다.
하지만 키리아가 더 빨랐다.
“알비.”
“먀!”
키리아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알비가 쌩 튀어나가 마부의 눈가를 긴 꼬리로 후려쳤다.
“아이고!”
갑작스러운 공격에 마부가 두 눈을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승객들이 놀라 엉덩이를 일으켰다.
“이게 무슨!”
“여러분. 그 가방에 뭐가 들었죠?”
키리아의 물음에 승객들의 표정이 변했다.
그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가방의 내용물을 꺼내 저마다 손에 쥐었다.
전부 무기였다.
그것도 피가 말라붙어 있는 살벌한 무기들. 섬뜩하게도 피는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헉….”
키리아가 주춤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승객들, 아니, 승객으로 위장하고 있던 괴한들이 조소를 띠었다.
“그러게 모른 척하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것을.”
“눈치가 너무 빠르면 참 싫단 말이지.”
괴한들은 주춤거리는 키리아를 보고 여유롭게 웃었다.
작은 마물이 있다지만 약해 보이는 여자 하나쯤 처리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겁먹은 표정을 짓던 키리아가 돌연 빙긋 웃었다.
“지금쯤이면 처리하고 오실 때가 됐는데.”
“…뭐?”
저벅, 발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제논이 나타났다.
한 손에는 그가 방금 처단한 고블린들의 피로 젖은 검이 들려 있었다.
“키리아. 내 옆에 있으라고 했을 텐데요.”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요.”
키리아는 겁먹은 척하며 괴한들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이 갑자기 절 붙잡고 괴롭히잖아요!”
“우리가 언제…!”
“감히.”
반박하려던 괴한들은 제논의 짧은 한마디에 주춤했다. 그들은 두려움을 떨치듯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괴한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둘 다 때려눕혀주마!”
그리고 잠시 뒤.
괴한들이 전부 때려눕혀졌다.
바닥에 떨어진 괴한들의 무기를 알비가 킁킁대고 있었다.
알비를 보던 키리아가 말했다.
“고블린들이 피 냄새를 맡았던 모양이에요.”
“이게 우리가 기다리던 마차 같군요.”
기절한 괴한들을 발로 치워가며 키리아와 제논은 마차 안의 물건들을 살펴봤다.
물과 마른 빵을 비롯한 식량과 야영에 필요한 도구들이 나왔다.
“운반물 같은 건 안 보이는데요…?”
이상한데? 마차 안에는 더 이상의 짐이 없었다.
“신문해봐야겠군요.”
제논이 검집에서 검을 달칵, 들어올리며 기절한 마부에게 성큼 다가갈 때였다.
킁킁.
아까부터 계속 냄새를 맡아대던 알비가 어느새 마차 안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짐칸 바닥을 가리켰다.
“먀먀!”
“거긴 아무것도 없잖아?”
“먀아아!”
“…그 아래에?”
키리아가 알비의 뜻을 알아채자 제논이 겁짐으로 마차 바닥을 콱 찍었다.
부서진 부분을 손으로 잡고 단번에 뜯어냈다.
그러자 숨겨져 있던 아래쪽 공간이 드러났고, 그 공간을 빽빽하게 채운 것들도 드러났다.
“맙소사.”
키리아는 경악하여 입을 막았다.
“이게 운반물? 신전… 추기경 정말, 미친 거 아니야?”
욕지기가 치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