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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100/141)

100화

키리아의 안정된 호흡과 혈색을 확인한 로하넨이 제논에게 말했다.

“이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군. 키리아 양은 며칠 쉬면 건강해질 거예요.”

“…그래.”

제논은 키리아의 한 손을 가볍게 잡고 그녀만 바라보고 있었다.

목소리만 로하넨에게 향한 채였다.

“정말 다행입니다…. 가울이 허둥거리면서 절 대뜸 들쳐메고 어딜 가나 했는데, 설마 키리아 양이 쓰러져 있다니요. 방을 지키는 호위들도 쓰러져 있고.”

“성이 어수선한 만큼 허술한 탓이지.”

“제 불찰입니다….”

로하넨이 송구스러워하며 허리를 깊게 숙였다.

제논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성 안에 첩자가 있다, 로하넨.”

“첩자 말씀입니까?”

“그래. 내 음식에 독을 타서 주의를 돌린 후에, 키리아가 혼자 있는 시간을 알아내 암살자에게 알린 자가 있을 거다.”

넓은 성에서 암살자 혼자 정보를 알아내고 목표물을 노리기란 힘든 일이었다.

반드시 협력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래야 실패하더라도 다른 암살자에게 계속 정보를 제공할 테니까.

어쩌면 이미 다른 암살자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로하넨을 향하는 붉은 눈이 선득했다.

“알아내라.”

“실은, 재차 신원을 검토한 결과 수상한 자들을 추려놓았습니다. 더욱 범위를 좁힌 다음에 보고하려 했습니다.”

“그럴 필요 없어.”

제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직접 신문하겠다.”

“예. 함께 가겠습니다.”

제논은 잠든 키리아의 이마를 살며시 한 번 쓸어주고는 조용히 문을 닫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그날 밤.

공작성 지하에서는 누군가의 울부짖음이 끊이질 않았다.

º º º

키리아는 암살자가 자신에게 억지로 독을 먹이는 꿈을 꿨다. 그런데 고통스럽지 않았다.

어라? 독약은 백 퍼센트 포도주스 맛이었다.

아예 병나발을 부는 키리아를 보고, 암살자는 맛이 궁금한 듯 쭈뼛댔다.

착한 키리아는 암살자와 독약을 나눠 마셨다.

그러자 뒤에서 나타난 제논이 암살자의 목을 뎅강 베어버렸다.

“내가 아닌 다른 남자와 독을 나눠 마시다니요.”

맛이 간 눈을 번득거리며 제논이 키리아의 뺨을 붙잡았다.

“하는 수 없지. 그대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도 마시는 수밖에.”

제논의 입술이 키리아에게 주저없이 다가왔다.

그리고 키리아는.

“…이런 미친 꿈.”

퍼뜩 눈을 뜨면서 몸을 떨었다.

잠에서 깨자마자 얼굴이 화끈거리는 건 처음이었다.

분위기에 휩쓸린 키스 한 번 했다고, 공작님이 나한테 집착하는 꿈을 꾸다니.

‘나… 설마 키스 또 하고 싶은 거야?’

“키리아.”

“아니야!”

반사적으로 빽 소리친 키리아는 그제야 옆에 제논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놀란 제논이 두 눈을 깜박였다.

“악몽이라도 꾼 겁니까?”

“네? 어, 악몽까진 아니고요 그냥….”

그때 제논의 손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당황한 키리아는 어깨를 조금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입술이 절로 예쁘게 오므려졌다.

하지만 제논의 손은 키리아의 뺨이 아니라 이마를 짚었다.

“음. 열은 완전히 내렸군요. 목청을 보니 컨디션도 좋아 보이고. 다행입니다.”

‘아니, 나 왜 눈 감았지? 주둥이는 또 왜?’

정말 수치스럽다….

‘정신 차려, 키리아. 너 이렇게 키스 밝히는 애였니?’

공작님이 좋아하는 사람은 메데이아잖아.

제논이 키리아에게 정체를 추궁하던 날, 키리아는 그의 마음이 단순한 팬심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메데이아에 대한 감정을 차마 말 못하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나. 평소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나한테 몇 번이나 시시한 농담 쪽지를 보냈겠어.’

로하넨을 좋아한다느니 베른울프 백작을 독점하고 싶다느니….

그땐 대체 왜 이런 장난을 하는 건가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얼버무리려는 의도였다면 이해가 되었다.

‘그래도 어차피 메데이아는 나잖아. 내가 까다롭게 구는 걸까?’

그렇지만… 이왕이면 쿨하고 멋있는 컨셉의 부캐보다는 키리아 클로버필드라는 나 자체를 더 좋아해 주었으면 하는걸.

‘그러면 굳이 정체를 밝힐 필요도 없을 테니 더 좋을 텐데.’

“…….”

키리아는 이불을 쥔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러다 고개를 굳게 저었다.

‘아니, 너 대체 뭐하는 거야? 키리아 클로버필드!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잖아.’

키스보다도, 공작님에게는 정체를 밝혀버리고 싶다는 마음보다도 우선해야 할 게 있잖아.

‘리안.’

그 애는 여태 편지에서 한 번도 우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항상 즐거운 이야기만 썼다.

오히려 그 때문에, 키리아는 리안이 악화된 상태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더 강한 약을 보내주고는 있지만….

‘여유부릴 시간은 없어.’

그래. 이런 고민에 매달려 있다가 리안을 구하지 못하면 평생 후회할 거야.

어떤 고민이든 리안의 병을 해결하고 나서 생각해도 늦지 않아.

키리아가 자신을 다잡는 사이, 제논은 부름을 받고 온 앨마에게서 죽을 건네받았다.

이미 앨마가 기미를 마친 음식이었지만 제논은 자신이 직접 이상을 확인했다.

그리고 나서야 키리아에게 한 숟갈 내밀었다.

“자, 드십시오.”

“제, 제가 먹을 수 있는데요.”

“그대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밀어내지 말라고.”

제논이 고집스럽게 숟갈을 키리아의 앞에 내밀었다.

“그러니까. 어서.”

밀어내지 말라고 했지 내밀어 달라는 말은 아니었는데요.

키리아는 황당했지만 제논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어색하게 입을 벌렸다.

“아, 아―.”

쏙. 숟가락이 새끼에게 모이를 나르는 어미새의 부리처럼 키리아의 입에 들어갔다 나왔다.

제논이 흐뭇하게 칭찬했다.

“잘했습니다.”

“이런 걸로 칭찬받아도….”

“다 먹어야 합니다. 자.”

“…아아―.”

키리아가 입을 벌리고 넙죽넙죽 죽을 받아먹을 때마다 제논의 칭찬이 쏟아졌다.

가식이 아니라 진심어린 칭찬이어서 키리아는 더 쪽팔렸다.

‘앨마가 구경하고 있어서 더 수치스러워….’

“…….”

문간에서, 의미심장하게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키리아와 제논을 바라보고 있는 앨마였다.

고통스런 식사가 끝난 후.

앨마도 물러가자 키리아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서였다.

“저, 잠시.”

“가려는 곳이 있습니까? 함께 가죠.”

“아뇨! 절대 싫어요.”

“저도 양보할 수 없습니다. 같이 가겠습니다.”

“아니 그게!”

기겁하던 키리아는 문득 벽에 걸린 거울 속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얼마나 침대에 자빠져 있던 건지, 머리는 엉망에 얼굴도 부스스하고, 눈덩이는 부은 심한 몰골이었다.

나 이런 꼴로 죽 받아먹은 거냐고!

‘내가 아무리 방구석을 좋아하는 인간이라지만 이건 아니잖아!’

한마디 언질도 없이 칭찬만 해준 제논에게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제논은 때마침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병상에서 막 일어난 사람을 혼자 보낼 순 없습니다. 나와 함께 가죠. 명령입니다.”

그 순간, 캬악! 소리높여 위협하는 고양이처럼 키리아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졌다.

그녀가 제논이 앉아 있던 의자를 가리켰다.

“필요 없으니까 가만 계시라고요!”

“……!”

제논이 즉시 자리에 앉았다.

“따라오지 마세요. 따라오기만 해봐.”

두 손가락으로 제 눈과 제논을 번갈아 가리키는 것으로 경고한 키리아는 문쪽으로 뒷걸음질을 했다.

왠지 애처로워 보이는 눈빛의 제논을 외면하면서, 방문을 닫았다.

º º º

화장실을 다녀오니 씻고 싶어졌다.

욕실은 키리아의 방에도 딸려 있었지만, 키리아는 큰 욕탕을 원했다.

그래서 공작성에 있는 상급 사용인 전용 욕탕을 이용했다.

“성의 사용인이 늘어난 덕분에 이런 시설도 이용할 수 있게 되고, 좋네.”

솔직히 처음에는 더 고급스러운 공작님의 욕탕을 이용하려 했고, 로하넨도 허가해 주었지만….

‘…왠지 같은 욕탕을 쓰는 건 부끄럽단 말이지.’

어쨌든 상급 사용인들의 욕탕도 만족스러웠다.

뽀송뽀송해진 키리아는 제 방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때, 복도를 청소하던 하녀들의 수다가 들려왔다.

“이제 북부는 괜찮지 않을까? 공작님이 마물을 부리실 수 있잖아. 여기 마물들도 우리를 도와주고.”

“그야 공작님 주변은 그렇겠지. 내가 살던 곳에서는 마물들이 여전히 기승인걸? 실종 사건도 심심찮게 들린다고.”

“저, 정말이야?”

“당연하지. 혹시 알아? 공작님이 멀리 떨어진 마물을 조종해서 사람들을 납치한 것일지도. 예전에 검은 숲에서도 납치가 빈번했다며.”

“그런 말은 하지 마…! 공작님도 주치의님도, 우리를 얼마나 위해주시는데!”

“그, 그냥 겁 좀 주려고 한 말이야. 정색하긴.”

“공작님과 주치의님에 대한 공격은 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알았어, 알았다구. 그치만 정말 우리는 알 수가 없잖아? 어느 마물이 공작님의 마물인지 어떻게 알아보란 말이니? 그러니까 이런 소문이 돌 때마다 공작님이 엮이지….”

소곤소곤.

걸레질도 잊은 채 수다에 열중하던 하녀들은 가까이 다가온 사람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주, 주치의님!”

키리아는 팔짱을 낀 채 생긋 웃었다.

“방금 한 말, 좀 괜찮았어요. 자세히 말해주면 조금 덜 혼내드릴게요.”

º º º

설령 악의가 없다고 해도, 모시는 분에 대한 험담은 해선 안 된다.

키리아는 두 하녀를 꾸짖은 후 그녀들의 처벌을 새로 부임한 하녀장에게 맡겼다.

로하넨이 고른 인사니 적당한 조치를 할 것이다.

“그건 그렇고….”

키리아는 하녀들의 수다를 곱씹었다.

‘공작님의 마물을 알아볼 수가 없다, 라….’

일리 있었다. 특히 공작성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영지민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공작님 덕분에 마물이 우호적이 됐다고 해서, 모든 마물이 그런 건 아니니까 말이다.

‘이건 어떻게든 해야 하겠어.’

그러지 않으면 하녀의 말마따나, 이런 소문으로 공작님의 명예에 타격을 입히는 일이 쉬워질 테니까.

그래서 키리아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아직도 저를 기다리고 있던 제논에게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이야기를 다 들은 제논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을 구분하는 일이라. 방법을 생각해보겠습니다.”

“네. 신전에서 소문을 이용해서 꼬투리를 잡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렇죠. 이번엔 우리 쪽에서 먼저 꼬투리를 잡았지만.”

“네? 어떻게요?”

“성에 잠입해 있던 쥐를 잡았으니까요.”

키리아가 잠들어 있는 사이, 제논과 로하넨은 사용인으로 위장해 있던 첩자를 잡아냈다.

그자를 물리적으로 신문하고 이용한 제논은 또 다른 암살자를 잡았고, 이어 두 번째 첩자도 알아냈다.

그렇게 꼬리를 물고 올라간 결과, 의미를 알 수 없는 어떤 정보를 입수하게 됐다.

키리아는 제논이 건넨 작은 쪽지를 읽어봤다.

[3일 뒤 9시, 델닛 삼거리]

쪽지에 적힌 건 그게 다였다.

“이게 뭐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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