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깍지 꼈던 손을 뿌리친 키리아는 자신을 욕하며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키, 키리아? 왜 그럽니까?”
“으윽, 죄송해요. 아무래도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는지 망상증 조짐이 보여서.”
“네…?”
“수면 부족인가 봐요. 맞아, 그래서 그래…!”
거의 패닉에 빠진 키리아의 모습에 제논은 얼른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진정하십시오. 아무래도 피로회복제가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 그대였던 모양입니다.”
“그런가 봐요….”
급격히 차올랐던 흥분은 급격히 빠져나갔다.
키리아는 몸을 축 늘어뜨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 있자니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렇게 힘들다면 호위를 물릴 수도 있습니다. 대신 나와 함께 있어야겠지만.”
“…….”
다정하게 토닥이는 손길에 키리아는 마음이 약해졌다. 위로받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 나 정말 힘들긴 힘들었나 봐.’
고개를 기울여 가까이 있는 제논의 가슴에 폭 기댔다.
일순 제논의 몸이 경직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는 오히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주었다.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더욱 다정해졌다.
가까이 있는 탓인지 그의 숨결까지 머리 위로 느껴지는 것 같았다.
그 안온함에 키리아는 평화롭게 눈을 감았….
‘감기는 개뿔!’
별안간 정신이 번쩍 든 키리아는 숙였던 몸을 바로 세웠다.
동시에 제논을 향해 고개를 치켜세웠다.
자신이 지금 제논과 얼마나 가까이 붙어 있는지 모르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저 이제 괜찮―”
“……!”
제논은 제 품에 기댄 키리아를 향해 나긋이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 자세로 키리아가 갑작스레 고개를 쳐올리자 피할 수가 없었다.
두 입술이 스쳤다.
부드럽고 말랑한 감각이 선명했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커졌다.
키리아는 몸이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감히 움직일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저, 그게…. 죄, 죄송….”
제논의 시선이 깊게 가라앉았다.
“…미안합니다.”
“아뇨, 잘못은 제가― 음!”
키리아의 뒷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별안간 덮쳐온 제논의 뜨거운 입술이 말을 삼켜버렸으니까.
키리아의 떨리는 숨결이 제논의 입술 위에서 진득하게 뭉개졌다.
그에게 전염된 듯 홧홧한 열기가 키리아의 전신으로 번졌다.
키리아는 경직됐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머릿속에 새하얘졌다.
그녀가 뻣뻣해지자 제논의 거친 움직임이 느려지더니 이윽고 멈췄다.
그리고 면목 없다는 듯 천천히 그녀에게서 입술이 떨어졌다.
그 순간.
키리아의 손이 멀어지려는 제논의 머리칼과 너른 등을 움켜잡았다.
그러곤 제 쪽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
제논의 눈이 더없이 커졌지만, 그는 곧 기꺼이 눈꺼풀을 감고 고개를 비틀었다.
서로가 더욱 깊게 맞물렸다.
열린 입술 사이로, 서로의 숨이 마나 진단을 하던 그때처럼 휘감겼다.
몽롱하고도 황홀한 감각이 키리아의 온몸을 지배했다.
지금만큼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하기 싫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안은 손길이 갈급해졌다.
단정하던 옷차림이 금세 흐트러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아얏!”
키리아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몽롱했던 감각에서 화들짝 깨어났다.
제논의 마물의 팔에 돋은 뾰족한 비늘이 키리아의 하얀 살갗을 찌른 것이었다.
가느다란 선혈이 흐르고 말았다.
“아.”
제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열띤 분위기가 단번에 깨졌다.
제논은 제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합니다, 키리아. 나 때문에.”
“네? 뭐가 미안해요. 이 정도는 그냥 연고만 바르면 바로 낫는데요.”
“…….”
하지만 제논의 가라앉은 표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왜 죄라도 지은 표정인 거야…. 뭘 잘못했다구.’
키리아는 속상했지만, 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제논은 키리아에게 연고를 발라주고 상처가 아문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
그때까지도 죄인 같은 얼굴은 그대로였다.
“…눈치 없는 마물병 같으니. 에휴.”
키리아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애초에 내가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에 긁혔던….
화끈.
키리아는 제 뺨을 감쌌다.
“근데 나… 공작님 좋아하냐?”
두 번째 키스는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건 맞는데, 솔직히 분위기에 휩쓸린 감도 있다.
혹시 공작님도 그런 걸까?
분위기 때문에?
톡톡.
또다시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제논이 무언가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그래. 물어봐야지. 아니다, 그냥 묻지 말까?”
공작님도 분위기에 휩쓸렸다고 한다면 기분이… 썩 좋진 않을 것 같았다.
물어보기가 괜히 무서웠다.
“아, 이런 고민 너무 싫다….”
질문을 던질까 말까 고민하면서 키리아는 긴장한 얼굴로 창문을 열었다.
“왜 다시 오셨…?”
창문을 열면서 말을 꺼냈는데, 제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공작님?”
어리둥절해서 창문 옆을 살펴봤을 때.
휘익!
순식간에 번득이는 칼날이 키리아를 향해 휘둘러졌다.
“꺄악!”
기겁한 키리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옆으로 확 틀었다.
덕분에 목덜미를 조금 베였을 뿐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몸을 옆으로 던진 탓에 키리아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채 일어나기도 전에 온몸을 검은 복장으로 가린 암살자가 키리아의 방으로 소리 없이 들어섰다.
그러며 키리아를 놀리듯 창문을 닫았다.
“누, 누구야! 신전에서 보냈어?”
키리아는 소리치며 물었다. 이러면 바깥에 있는 호위병들도 들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데 즉각 반응이 있어야 할 호위병들이 조용했다.
‘서, 설마.’
키리아는 불길한 짐작에 몸을 떨었다.
암살자는 그저 흥, 비웃고는 곧바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
위기 상황에서는 자신의 평소 신체 능력의 배를 발휘한다고 하던가?
키리아가 지금 그랬다.
그녀는 비명도 못 지를 만큼 놀라면서도 암살자를 피해 네 발을 짚듯 일어났다.
바로 앞에 있는 책상에서 아무 물건이나 집어 암살자에게 던졌다.
그건 키리아의 책상을 장식하고 있던 재채기 유발 독약이었다.
“에취!”
갑자기 터진 재채기에 암살자의 어깨가 들썩였다.
“에취, 에에취!”
약물이 유발한 재채기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이었다.
흉흉한 기세를 뿜던 암살자가 연신 재채기를 해대는 모습이 다소 우스웠다.
‘지금 나가야 해!’
키리아는 달려가 문고리를 돌렸다.
하지만, 상대는 훈련된 암살자였다.
그는 재채기에 굴하지 않고 키리아를 향해 검을 내찔렀다.
“……!”
키리아의 가슴이 검에 꿰뚫리려는 바로 그 순간.
퍽!
다른 검이 암살자의 몸을 관통했다.
몸을 부르르 떨고 축 늘어지는 암살자.
그가 바닥으로 쓰러지자 검을 회수하는 제논이 보였다.
“키리아.”
그가 다급히 키리아에게 다가왔다.
“괜찮습니까? 다친 곳은?”
“하….”
제논의 얼굴을 보자 키리아는 긴장이 탁 풀렸다. 다리에 힘이 빠져 주르르 주저앉았다.
놀란 제논이 그녀를 부축하다가 키리아의 상처를 발견했다.
“목을… 베였군요.”
제논의 목소리가 이를 악문 듯이 낮았다.
키리아는 혹시나 그가 또 자책할까 봐 얼른 아무렇지도 않게 헤헤 웃었다.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죠? 역시 전 대단하다니까… 요… 어라….”
이상하다? 왜 공작님이 뿌옇게 보이지?
“키리아!”
키리아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순식간에 열이 올라 눈앞이 흐리고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암살자의 검에 독이 발라져 있던 것이다.
키리아가 고개를 가누지 못하고 목을 늘어뜨리자 제논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암살자의 검날에 살짝 혀를 대어 보았다가 뱉었다.
“이건….”
언젠가 그도 당한 적이 있는 독이었다.
뜨거운 열과 함께 독이 빠르게 번져 손쓸 틈도 없이 목숨을 앗아간다.
제논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독이지만, 평범한 사람인 키리아에게는 아니었다.
‘가울, 로하넨을 데리고 와라. 당장!’
가울에게 급히 전언을 보냈지만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최소한 독을 조금이라도 빼내야 했다.
제논은 키리아의 목깃 단추를 풀어 내렸다. 그녀의 어깨와 목 사이에 선명한 검상이 보였다.
제논은 곧바로 키리아의 상처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강하게 빨아올렸다.
“흐으!”
상처가 자극되어 아픈지 키리아가 우는 소리를 냈다.
바동거리며 제 몸을 덮은 제논을 밀어내려 들었다.
그런 그녀를 달래듯 제논이 키리아의 머리카락과 얼굴을 쓰다듬었다.
“미안, 미안합니다. 조금만 더.”
“흐아….”
계속해서 독을 빨아내고 뱉기를 반복했다.
효과가 있는지 키리아의 열은 더 이상 오르지 않았다.
제논이 흐트러진 숨을 뱉으며 그녀에게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키리아의 이마를 짚어보며 말했다.
“이제 됐습니다. 곧 로하넨이 올 겁니다. 조금만 참아요.”
“…….”
색색 숨을 몰아쉬는 키리아의 눈동자는 여전히 혼몽했다.
하지만 울면서 그를 밀어낼 때보다는 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키리아가 무어라 입술을 달싹였다.
귀 기울여 듣기 위해 제논은 그녀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의 뺨을 뜨거운 손으로 감싸며 키리아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 다칠 때마다 그런 표정 할 거예요? 그러다 울겠네.”
“…….”
“공작님 잘못 아니니까 자책하면서 땅 파지 않기로 해요. 절 위한답시고 밀어내지도 말고.”
키리아는 정말 질색이라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랬단 봐. 나 사교성 없어서 밀어내면 그대로 밀려나는 타입이니까.”
“……!”
제논은 뜨끔한 얼굴로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에 만족한 듯 키리아가 푸스스 웃었다.
손을 뻗어 제논의 푸른 머리카락을 사르르 쓰다듬었다.
“…….”
제논의 눈동자가 일렁였다.
뜻밖에 가슴을 파고드는 따뜻하고 저릿한 감각에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이윽고 고개를 든 그가 말했다.
“키리아, 난….”
하지만 키리아는 더는 못 버티겠는지 기절한 뒤였다.
후. 낮게 숨을 뱉은 제논은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다행히 고통스러워보이진 않았다.
그는 가만히 키리아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
“마음을 얻어야 하는 건 나인데, 오히려 그대가 내 마음을 자꾸만 가져가 버리면 어떡합니까.”
애초에, 그녀를 밀어낼 생각은 없었다.
이제 와서 그런 건 불가능했다.